글/ 계하(桂霞)
【정견망】
전에 《전법륜》을 공부하다가 “내가 여러분에게 불교 중의 옛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과거에 한 사람이 무척 애써 수련하여 나한(羅漢)으로 성취하게 되었다. 그 사람이 정과를 얻고, 나한으로 수련 성취하게 되었는데, 그가 기뻐하지 않을 수 있는가? 삼계(三界)를 벗어나게 되었다! 이 기뻐함이 바로 집착심이고 환희심이다. 나한은 마땅히 무위(無爲)이며,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데, 그는 떨어졌으며 수련이 헛되었다. 수련이 헛되었으면 또다시 수련해야 하지 않는가. 또 새롭게 위로 수련하며 무척 애를 써서 다시 수련해 올라왔다. 이번에 그는 두려워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나는 기뻐하지 말자, 다시 기뻐했다가는 또 떨어질 테니.’ 그가 두려워하자 또 떨어졌다. 두려움 역시 집착심이다.”를 읽을 때 왜 나한은 무위이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데 이 사람은 왜 환희심과 두려운 마음이 생겨나 떨어졌을까? 다년간 법을 공부하면서 줄곧 이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최근에 법을 공부하다 깨달은 것은 나한의 경계(境界)에는 표준이 있는 것으로 그것이 바로 “나한은 마땅히 무위이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그의 진정한 상태이다. 그런데 그는 왜 기뻐하거나 두려워했는가?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수련 성취했다고 여겼기 때문인데. 그 ‘기쁨’과 ‘두려움’은 모두 자아(自我)를 집착하고 사(私)를 집착했기에 떨어진 것이다.
사존께서는 《전법륜》에서 또 “우주공간은 본래 선량한 것이고, 真(쩐)ㆍ善(싼)ㆍ忍(런), 이런 특성이 있는 것으로서, 사람이 태어나서는 우주와 동성(同性)이었다. 그러나 생명체가 많이 생겨나자 일종의 군체(群體)적 사회관계가 발생했다. 그중에 일부 사람은 아마 사심(私心)이 증가함으로써 그들의 층차가 서서히 낮아져 이 한 층차 중에 있을 수 없게 되었으며, 그들은 곧 아래로 떨어져야만 했다. 그러나 다른 한 층차 중에서 또 그다지 좋지 못하게 변해 그들은 또 있지 못하게 되었고, 계속 아래로 떨어져 최후에는 인류 이 한 층차 중까지 떨어져 내려왔다.”라고 하셨다.
내가 깨달은 것은 사심(私心)이야말로 가장 크고 가장 근본적인 집착이다. 고층차에서 떨어져 내려온 원인은 그 한 층차에서 사심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층차(低層次)의 사람이 되돌아 올라가 고층생명이 되려면 사심을 닦아 없애야만 한다.
생명이 고층차에서 떨어진 원인이 이 사심 때문이니 수련해서 이 사심을 제거해야 한다. 내 층차에서는 바로 그 어떤 일에 부딪치든 담담히 받아들이고 우연은 없으며, 내게 배치해준 것은 바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이고, 수련은 마땅히 무위여야 한다는 것이다. 매 사람의 수련의 길은 모두 사부님께서 잘 배치하신 것으로 수련인은 오직 자연스러움에 따르면 된다.
‘내가 하려는 것’을 내려놓고, ‘나의 위덕’을 내려놓고, ‘나의 층차’를 내려놓으며 ‘나의 원만’을 내려놓고 수련 중에 결과에 집착하는 그 어떤 마음이든 내려놓으며, 결속시간에 집착하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하며 심지어 “내가 오직 잘 닦기만 하고 내가 원하는 일체를 내려놓기만 하면 내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곧 있을 것”이란 이 일념마저도 내려놓아야 한다.
곧 순정하게 대법에 따라 닦고 일을 해야 하며 그 어떤 결과든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런 심태가 우리 수련의 일종 정상적인 상태가 되어야 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21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