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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공부를 장애하는 구하는 마음을 파내 없애다

글/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나는 법을 얻은 지 26년 된 대법 노(老)제자다. 나는 법을 얻은 그날부터 시작해 한 번도 법공부를 느슨히 한 적이 없으며 법공부가 마음에 들어가게 할 수 있었고 한 번도 성의 없이 대충 한 적이 없었다. 책을 보고 법을 공부할 때면 한 번에 완성했고 또 늘 마음에 기억할 수 있었으며 마치 마음과 눈이 동시에 법을 배우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대법 속에서 끊임없이 고층차(高層次)의 법리를 깨닫는 그런 아름다운 감수는 수시로 나를 격려해주었고 나더러 법공부에 나태해지지 말라고 독촉해주었다. 사유가 넓게 열리고 지혜가 끊이지 않았으며 사상과 행동이 거의 같이 움직였다. 어떤 일을 하려고 생각만하면 곧 방법이 있었고 그리 머리를 쓸 필요조차 없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다 사부님의 가지와 가호(呵護)하에서 대법의 지도하에 얻은 것임을 깊이 안다.

사부님께서는 “당신에게 한 가지 진리를 알려주겠다. ‘사람의 전반 수련과정은 바로 끊임없이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과정이다.’”(《전법륜》)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사람마음은 때로 아주 깊이 은밀하게 숨어 있다. 수련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속인사회 속의 각종 바닥없는 패괴(敗壞)현상들을 마주하고, 파룬궁을 탄압하는 중공사당의 광적이고 사악한 마귀표현이 22년간 지속됨에 따라, 또 기나긴 수련의 길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망연함과 억눌림 하에서 내심을 바짝 졸이다보니 점차 소극적이고 나태한 부면(負面)적인 정서가 생겨나왔다.

최근 한 단락 시간 법을 공부할 때 사상 속에 각종 잡념이 아주 많아서 마음이 조용해지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사상이 법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고 늘 주의가 흩어졌으며 책을 볼 때면 마치 글을 아예 모르는 사람이 글을 처음 배우는 것처럼 매끄럽게 읽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긴 구절의 법은 연속으로 몇 번을 읽어야지만 겨우 표면적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마치 눈으로는 책을 보지만 마음은 법의 내함(內涵)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머리 위에 마치 큰 솥을 뒤집어쓴 것처럼 아주 답답했고 사람이 아주 작은 공간속에 속박된 것처럼 늘 돌파하고 싶어도 돌파하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대단히 불편했다. 법을 배우는 진도 역시 아주 느려졌다. 때로는 《전법륜》 한 강을 읽는데 몇 시간이나 걸렸다. 법을 공부하면서 늘 주의가 분산되어 눈동자는 책을 보지만 사상은 오히려 다른 곳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집안에서든 집밖에서든 예전 업무 중에 있었던 온갖 난잡한 일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때로 청성할 때면 나는 자신에게 “법을 공부할 때는 딴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잠시 후에 또 뒤집어 나왔고 법공부를 끝내고 나면 머리가 아주 피곤했다. 비록 매일 법을 읽긴 했지만 마치 형식적으로 일을 한 것과 같았고 오직 기계적으로 법공부 임무를 완성했을 뿐 고층차의 법리를 깨닫기는 아주 어려웠다. 이렇게 매일 법을 공부해도 오히려 법이 마음에 들어가지 않는 느낌이 나를 몹시 고뇌하게 만들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늘 사부에게 “저는 원래 법을 보기만 하면 그 층차가 제고되는 것도 빠르고, 책을 볼 때 인식한 것이 끊임없이 나타났는데, 왜 지금은 이 느낌이 없는지요?”라고 말한다. 그럼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보라. 당신은 ‘수련을 처음과 같이’ 했는가?”(《2013년 대뉴욕지역법회설법》)

나는 깜짝 놀라 안으로 자신의 문제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 나태하고 소극적인 표현은 진정한 나의 표현이 아니다. 나는 반드시 자신을 더욱 정진하게 만들고 반드시 수련을 처음처럼 하는 상태를 되찾을 것이다. 20여 년간 수련하면서 《전법륜》을 이미 수백 번은 읽었고 베껴 쓴 것만 해도 5번이고 또 3번이나 외웠는데 지금은 어째서 책을 읽는 것조차 유창하지 못하단 말인가? 나는 나의 법공부를 교란하는 그 근본적인 집착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집착이 내가 법공부에 전념하지 못하게 교란했는가? 내가 발견한 것은 전에 법공부 중에서 고층차의 법리를 깨닫는 그런 아름답고 오묘한 느낌이 내 마음속에 수시로 떠올랐는데 법에 용해된 그런 아름다운 느낌은 일종의 향수인 동시에 또 나를 정진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내가 발견한 것은 바로 그 “고층차의 법리를 보고 싶어 하는데 집착하는 만족할 줄 모르는 구하는 마음”이 내가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을 공부하는 것을 방해했던 것이다.

이 집착심에 이어 나는 또 수많은 사람마음을 찾아냈다. 과시심, 환희심, 명리심(名利心), 자아를 실증하려는 마음, 남이 나를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 비평과 질책을 들으려 하지 않는 마음, 자신이 남보다 뒤처질까 두려워하며 비교하는 마음, 질투심, 자신의 결점과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허영심, 체면을 중시하는 마음, 동수가 내가 법에 있지 않다고 말할까 의심하는 마음, 안일한 마음, 위사위아(爲私爲我)한 마음 및 강력한 사상업력 등등. 이런 것들은 모두 그 만족을 모르고 구하려는 마음 아래 숨어서 내가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을 공부하는 것을 교란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집착을 가지고 법을 배우는 것은 진정한 수련이 아니다. 하지만 수련 중에서 자신의 근본적인 집착을 점차 인식하여 그것을 제거함으로써 수련인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

“당신들이 책을 볼 때 난잡한 생각을 하면 그 책 속의 무수한 불(佛)·도(道)·신(神)은 당신의 가소롭고도 가련한 사상을 보고 있고, 사상 속의 업력이 가증스럽게 당신을 통제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데 당신은 아직도 잘못을 고집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다.”(《정진요지 2》〈원만을 향해 나아가자〉)

나는 오로지 내가 날마다 법공부를 견지하고 사상 속에서 끊임없이 그것들을 배척하기만 하면 사존(師尊)께서 나를 도와 그것들을 제거해주실 것임을 확신했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이제 여러분들도 내가 왜 당신들에게 책을 많이 보라고 했는지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법은 일체 집착을 타파할 수 있고, 법은 일체 사악을 타파할 수 있으며, 법은 일체 거짓말을 타파해 버릴 수 있고, 법은 정념(正念)을 확고히 할 수 있다.”(《정진요지 2》〈교란을 배제하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만약 사부님께서 수시로 나를 돌봐주시고 바로잡아 주시지 않았더라면 수련 속에서 점차 법에서 벗어나도 스스로 몰랐을 것임을 깨달았다. 설령 이 문장을 쓰고 있을 때조차도 교란이 아주 컸다. 막 첫 번째 원고를 완성하자마자 어쩐 일인지 단번에 문장 전체가 삭제되어 버렸고 어떻게 해도 회복할 수 없었다. 당시 나는 멍해졌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속으로 몹시 낙담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나는 곧장 이것이 마(魔)의 교란이며 기왕에 나더러 그것들을 폭로하지 못하게 하고 또 나더러 화를 내서 층차가 떨어지게 하고 나의 심성제고를 저지하려는 것임을 알아챘다.

나는 이에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이제 너에게 넘어가지 않고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글이 지워졌다면 다시 쓰면 되고 문장 안에 사람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그런 부분을 제거해서 내 문장이 더 순정하고 더 위력을 지니게 하겠다. 또 그런 집착심과 사상업 및 그것들을 이용해 나의 정념을 교란하는 사악한 마와 난귀(爛鬼)들은 모두 다 해체할 것이다!’

그러자 그것들은 죽으려하지 않으며 죽어라 발버둥 쳤고 곧 온갖 수단을 동원해 나를 교란했으며 내가 그것들을 폭로하는 것을 저지했다. 하지만 그것들이 어찌 뜻을 이룰 수 있겠는가? 기왕에 내가 그것들의 존재를 알았으니 그것들을 꽉 붙잡아 전부 부숴 해체해서 파내어 제거할 것이다! 절대로 임시방편으로 하지 않을 것이다.

사존의 가지 하에 나는 또 이번 원고를 새로 완성했다.

수련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늘 법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어떻든지 막론하고, 아무리 바빠도 여러분은 수련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시간이 아무리 없더라도 여러분은 법공부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일을 함에 적은 노력으로 많은 효과를 거둘 수 있고, 비로소 당신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잘할 수 있다.”(《따지웬 씬탕런매체법회 설법》)

수련(修煉)이란 바로 고생을 겪고 소업하며 집착을 제거하는 것으로 괴로움을 참고 정진해야만 심성을 제고하고 층차를 제고할 수 있으며, 순정(純淨)한 마음으로 법을 공부해야만 비로소 법을 공부하고 법을 얻을 수 있으며 이렇게 해야만 고층차의 법리를 깨달을 수 있다.

현 단계에서 작은 체험이니 여러분의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2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