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알몸으로 왔다가 감”을 말함

글/ 대륙제자

【정견망】

법을 얻은 처음 몇 년간 나는 돈을 추구하는 마음을 제거해 아주 가벼웠고 지금처럼 이렇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손해를 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마치 무엇이든 다 내려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때로 자료점에 돈이 필요하면 나는 몇 백 위안, 몇 천 위안을 내곤 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늘 낼까 말까 망설인다.

당시 나는 매일 많으면 4강까지 법을 읽었고 일반적으로 2강정도 읽었으며 연공도 늘 두 차례를 해서 정신상태도 좋았고 그야말로 돌비맹진(突飛猛進)했다. 마치 아무것도 나를 가로막을 수 없을 것처럼 한마음으로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들어 나는 제고가 아주 느린 것을 느끼는데 법공부도 매일 1강이고 두 강을 읽는 경우도 적었다. 관(關)을 넘기는 것도 시간을 끌었고, 이익을 얻으려는 마음을 말하자면 점차적으로 돈을 중시했고 돈을 벌고 싶었다. 돈을 쓸 때는 꼼꼼히 따지면서 늘 아끼려고 했다. 매달 사회보장기금 지출이 문자메시지로 오는데 나는 문자를 보면서 생각한다. ‘아 3만 위안이네, 좀만 더 모으면 5만 위안이고 내년 말이면 10만 위안에 도달할 수 있겠군!’

시장에 가서 채소를 살 때도 기어이 싼 곳을 찾았다. 한번은 2위안으로 큰 오이와 고추를 사서 집에 돌아와 며칠을 먹었는데 속으로 아주 만족스러웠다. 시장에 또 갔을 때도 여전히 싼 물건을 찾았다. 때로 상인이 가격을 높게 부르면 나는 자신이 바가지를 쓴 게 아닌가 의심했다.

이런 사람마음의 표현은 ‘처음’ 상태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나는 자신이 퇴보했고 사람마음이 많아졌으며 가부좌를 해도 조용해지지 못하는 것을 알았고 때로 또 아무 이유 없이 번뇌가 생겨나왔다. 사부님의 신경문 《깨어나라》가 발표된 후 나는 압력을 느꼈다.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느냐?”

나는 지금 고비에 있고 일 분 일 초마저도 자신을 단련하고 자신을 성숙시키는 최후의 관건적인 시각임을 깨달았다.

어제 한 동수의 집에 찾아가니 그녀가 말했다.

“어제 꿈을 꿨는데 당신이 해석 좀 해주세요? 꿈에 세상을 떠난 가족들을 봤는데 모두들 벌거벗은 알몸이었고 그 공간의 사람들이 다 그랬어요. 하지만 무슨 나쁜 느낌은 없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나는 말했다.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떠나니 이는 당신더러 사람마음을 내려놓으라고 점화하는 겁니다. 당신에게 혹시 잘 넘기지 못한 관(關)이 있나요?”

그런데 이 말을 마친 후 나는 문득 자신도 이틀 전에 같은 꿈을 꿨음에도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한 것을 떠올렸다. 꿈에서 나는 이미 고인이 된 장모를 봤는데 그녀 역시 알몸이었고 나를 등지고 자전거 위에 기대고 있었다. 동수가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을 때 나는 단번에 사실은 사부님께서 나를 점화해주신 것임을 알았다.

즉, “알몸으로 왔으니 갈 때도 알몸”이고 “자전거(自行車 자신의 언행을 잘 파악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 꿈은 나더러 장모의 교훈을 받아들여 그녀와 같은 길을 걷지 말라고 일깨워준 것이다.

장모는 살아생전에 수련에 아주 정진했다. 내가 매번 집에 갈 때면 늘 법공부와 연공하는 것을 보았으며 늘 내게 “돈을 중시하지 말게, 아무 소용도 없으니 수련을 잘 해서 반드시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야 하네!”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속으로 줄곧 장모님은 오성이 좋은 상사(上士)라 여겼고 한번 수련하면 끝까지 할 그런 분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한 차례 병업관을 겪은 후로는 점차 나태해졌고 마치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가 임시도로를 가는 것처럼 갈수록 느려졌다. 매번 그녀를 볼 때마다 그녀는 내게 묻곤 했다. “내 몸이 언제나 좋아질까?” 나는 “오직 정진하기만 하면 아주 빨리 좋아질 겁니다.”라고 했다. 그녀는 “누가 정진할 줄 모르는가? 내 몸이 좋아지면 더 정진할 텐데.”라고 하면서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법공부가 적기 때문에 사람마음이 마치 잡초처럼 자라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법에서 하는 말도 적어졌고 결국에는 일부 사람의 말을 물었다.

가령 “어느 아이는 어떤가?” “어느 아이는 왜 오지 않았는가?” “누구누구는 지금 무얼 하는가?” 등이다. 그리고 대답을 하지 않으면 화를 냈다. 전에 정진할 때 장모는 수중의 돈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나더러 늘 “내려놓게! 내려놓아야지만 갈 수 있다네.”라고 했었다.

그러나 병업 기간에 나는 그녀가 돈을 아주 중시하는 것을 발견했다. 늘 장인더러 “통장에 돈이 얼마나 남았어요?”라고 물었다. 장인이 “아직 그대로야 쓰지 않았어.”라고 대답했다. 이때 장모의 얼굴에 아주 기뻐하면서 위안이 된다는 표정이 나타났다.

수련인이 이런 상태에 처해 있을 때는 이미 사람마음이 우세를 차지한 것이다. 구세력은 박해를 가중시켜 당신이 이 상태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고 신체는 갈수록 나빠지게 할 것이다. 장모가 바로 그랬다. 갈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했고 유감만 남겨놓을 뿐이다.

오직 떨쳐 일어나 스스로 ‘처음과 같은 상태’를 회복하도록 노력해야만 비로소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고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소홀히 여기는 관건적인 지점이다.

사부님께서는 내게 꿈으로 점화해주셨으니, 나더러 빨리 사람마음을 제거하라고 일깨워주신 것이다. 단지 돈뿐만 아니라 그 어떤 마음이든 다 내려놓아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돈이 있고, 아무리 높은 직위가 있으며,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안일하든지, 당신은 모두 가지고 가지 못한다. 올 때에 알몸으로 오고 갈 때에도 역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바, 유일하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수련 중에서 얻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직접 인간의 眞體(쩐티)에 있기 때문이다.”(《뉴질랜드법회설법》)

안으로 찾아보니 이익심이 확실히 아주 무거워서 때로는 정서마저 가라앉고 고민하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생각해보니 근본에서는 모두 돈과 관련이 있었다.

가령 친구가 나더러 차로 짐을 실어가라고 했는데 내 돈으로 기름을 넣으면 속으로 얼마간 평형을 이루지 못했다. 또 남이 내게 수납장과 쇼파를 줬는데 어떤 동수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차를 구해 보내주면서 속으로 뭔가 불편했다. 또 새 옷에 가까운 옷 몇 벌을 친척에게 보내주었는데 친척이 거만한 모습을 보이자 나는 보내지 말았어야 한다고 후회했다.

한번은 아내가 내게 “돈 좀 주세요, 좋은 옷을 사게.”라고 했다. 나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즉각 반응했다. “당신도 돈을 벌잖아? 왜 당신이 번 돈을 쓰지 않아요?”

당신이 보라, 이 한마디 말에 얼마나 많은 사람마음이 담겨 있는가? 가족 앞에서는 당신이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는지 가장 잘 볼 수 있지 않은가? 사(私)가 얼마나 큰지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의 꿈 속 점화 및 동수와의 교류를 거쳐 나는 단번에 사상이 많이 제고되었다. 돈을 중시하는 마음, 과시심, 쟁투심, 불평하는 마음, 색욕심 등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많은 싹이 텄음을 본 나는 발정념으로 이것을 철저히 제거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나는 동수가 쓴 노래 《소중히 여기세요(珍惜)》의 감동적인 가사 몇 구절이 떠올랐다.

“봄에는 꽃 가을엔 달에 취해
명예와 이익 좇으며 피곤한줄 몰랐네.
되돌아보면 부귀영화란 헛되니
평생 몸부림친들 누구에게 남겨주리?
기연(機緣)을 소중히 여기고 구도의 배에 올라
잡념을 쓸어버리고 하늘로 돌아가세.”

그렇다! ‘하늘로 돌아갈’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무엇을 내려놓지 못한단 말인가? 내려놓기로 생각했으면 기회 역시 많지 않으니 오직 정진하고 또 정진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사부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유감을 남기지 않을 수 있다.

현재 층차에서 작은 소견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2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