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천진자(天真子)
【정견망】
먼저 나는 ‘믿음(信)’의 의미와 그 속의 함의를 알아야 했다. 이것은 내가 매번 하나의 진리를 증득(證得)할 때마다 시작해야하는 숙제였다. 수련과정에서 매 하나의 관을 통과하는 것과 내려놓지 못한 집착은 모두 신사신법의 높이까지 인식이 올라간 것이었다. 마주치는 일들은 대부분 신사신법과 관련되었으며, 나는 늘 신사신법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할 수 있었다.
2017년 가을이 되자, 나는 나의 이 한 층차에서 신사신법의 진정한 의미를 증득(證得)했다. 뭇신(衆神)들이 나를 비웃던 모습을 생각하면, 오늘 나는 마침내 기를 펴고 내가 증득한 신사신법의 진정한 의미를 우주를 향해 큰 소리로 선포할 수 있었다. 선포한 후, 내 생명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고 나는 하나의 방대한 생명으로 성취되었다. 이 우주에서 그 어떤 요소도 나를 제약할 수 없으며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고 느꼈다.
동시에 사부님의 《홍음》〈넓음(洪)〉이 눈앞에 펼쳐졌다.
“창궁 무한히 머나
생각 움직이니 눈앞에 다가오고
건곤 무한히 크나
法輪(파룬)은 천지에 돌고 있네.”
나는 이 가운데 약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자연히 마음이 매우 기뻐서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사부님, 제가 수련해 올라온 것을 봐 주세요. 저는 제가 개공개오(開功開悟)하려 한다는 것을 압니다.”
바로 이 시각 나는 문득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그 사람이 생각났다. 나한으로 성취되는 관건적 순간에 사람 마음이 나와서 실패한 교훈으로, 나더러 신념(神念), 즉 무념(無念)을 지키라고 경고해주었다. 나는 결가부좌를 하고 두 손을 제인(結印)한 후 눈을 살짝 감았다. 이때 나는 한 껍질 속에 앉아 있었는데 날개가 풍만해서 나는 이미 수련 성취되었고 곧 껍질을 깨고 나오려 했다. 내 몸 속에 솟구치는 거대한 에너지가 있었는데, 일단 석방되어 나오면 하늘과 땅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에너지는 잠겨 있었고 나는 전혀 그것을 석방할 수 없었다.
나는 사부님께서 대법제자가 원만할 때 우리와 소통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생각났다. 이때 내가 느낀 소통은 바로 스승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이다.
“제자야, 너는 이미 수련 성취하여 도를 얻었으니 사부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자.”
나는 마땅히 이런 한마디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오시면 곧 자물쇠가 열리며, 나는 나의 에너지로 이 껍질을 산산조각 낸 다음 사부님의 손에 이끌려 사부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장엄하고 신성(神聖)한 순간인가!
나는 온 정신을 집중하여 사부님께서 부르심에 귀를 기울였다. 기다리고 또 한참을 기다려도 사부님께서는 나를 부르지 않으셨다.
나는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내 인내심을 시험하시는 것이 틀림없으니 조급해 하지 말자.’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사부님께서는 여전히 나를 부르지 않으셨다.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며 사부님께서 어디로 가셨을까? 하고 고개를 들어 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사부님은 보이지 않고 사부님의 〈무(無)〉가 보였다. 자세히 확인해보니 그것은 사부님의 법이었다. 나는 곧 ‘무(無)’ 속에 진입했고 ‘무’의 박대정심(博大精深)한 내함을 직접 생생하게 감수할 수 있었다.
내가 이해하기에 진법(真法)은 글자 자체가 아니라 우주 속에 체현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구체적인 법은 하나의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데, 그 세계는 바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구체적인 법으로 구성된 것이다. 글자 표면의 의미와는 차이가 상당히 크다. 법(法)이 깊어질수록 법 역시 끊임없이 우주의 더욱 높은 생명의 경계로 뻗어나간다.
무(無)와 공(空)을 말하자면, 과거의 수련인들이 모두 이야기하고 있지만, 내가 알기로 구우주(舊宇宙)의 생명 중에는 진무(真無)와 진공(真空)을 말할 수 있는 생명은 하나도 없다.
내가 “나아가면 만만물(萬萬物)을 이룰 터이고”(《홍음 2》〈무(無)〉)를 보았을 때 나는 미래 우주와 우주 중의 모든 것은 다 사부님께서 창건(創建)하셨음을 이해했다.
보고나서 나는 매우 기뻤다. 왜냐하면 내가 아주 어릴 때 사부님께서 나더러 이렇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남의 것이 아무리 좋아도 네가 달라고 할 수 없다. 남의 집이 아무리 좋아도 너는 갈 수 없다.”
내가 내려올 때 사부님께서는 내게 또 당부하셨다. 그래서 나의 주원신이 다른 공간에 도착하면 오직 멀리 서서 다른 사람의 집과 세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좋아져서 나는 미래의 신우주 어디든 다 갈 수 있었다.
더 아래를 보니 “물러서면 전부 없나니 영원한 미혹이로다”(《홍음 2》〈무(無)〉)였다.
내가 이해하기에 정법(正法)이 완성된 후 사부님께서 우리 이 우주를 곧 떠나시는데 영원히 떠나시기에 내가 더는 사부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나의 사상의식 속에서 내 생명의 전부다. 나는 원래 영원하고 항구적인 것을 좋아했지만 그러나 영원히 이곳에 놓여있는 것은 너무 끔찍하다.
나는 사부님께 여쭈었다.
“당신께서 가시면 그럼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사부님께서는 “너는 장차 너 자신의 세계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사부님께서 하신 말투가 아주 사무적이었다.
나는 듣자마자 마음이 급해져서 사부님께서 더 말씀하시지 못하게 막으며 말했다.
“저는 세계도 원하지 않고, 법왕이 되고 싶지도 않고 중생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무엇도 원하지 않습니다. 저더러 수련하라고 하신 것은 당신이시고, 저더러 반본귀진(返本歸真)해서 자신의 선천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으니 저는 곧 제 선천으로 가려고 합니다. 왜냐면 저의 선천은 바로 사부님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을 끝냈지만 사부님께서는 나를 무시하셨다. 나를 무시하셨다는 것은 내가 한 말이 잘못이며, 내가 말한 일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나는 사부님께서 동의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곧 말했다.
“그럼 저는 수련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죽어버리면 그만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여전히 나를 무시하셨다. 내가 한번 생각해보니 자신이 방금 한 말이 정말 잘못이었다. 사부님께서 가장 듣고 싶지 않으시는 말이 바로 수련하지 않는다거나 누가 수련해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이런 생명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신다.
사부님께서는 용맹정진해서 어떤 곤란도 가로막을 수 없는 제자를 좋아하신다. 사부님께서 정말 화를 내시면 어떻게 하지? 사부님께서 화가 나시면 곧 나를 버리고 혼자 가실 것이다.
나는 급히 말을 바꿨다.
“제가 돌아가서 수련하는데 당신을 뵐 수 없으면 저는 날마다 당신을 소리쳐 부를 겁니다. 1분도 쉬지 않을 것이고, 지쳐 죽을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습니다.”
내가 말을 마친 뒤에도 사부님께서는 여전히 나를 무시하셨다. 생각해보니 내가 한 말이 또 틀렸다. 이는 내가 사부님을 위협하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 정말 화를 내시면 어떻게 하지? 지금 나는 사부님께 부탁해야만 한다. 수련 중에 나는 아무리 큰 어려움을 겪어도 사부님께 부탁하지 않았고 늘 나는 항상 내가 대장부라 느꼈고 대장부는 하늘을 떠받치고 사방에 우뚝 서야하며 관(關)이며 난(難)은 스스로 넘겨야 한다고 느꼈다. 지금은 사부님에게 부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렇게 말씀드렸다.
“사부님, 저 좀 보세요, 저는 사부님의 말씀을 잘 따르고 수련도 아주 수련했습니다. 저는 아주 많은 일을 배웠고 당신께 번거롭게 해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 말 뜻은 내가 수련을 통해 성숙해졌고 자신을 돌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더 이상 과거처럼 사고 쳐서 사부님을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부님 저를 데려가시고 저를 버려두지 마세요.”
내가 말을 마친 후에도 사부님은 여전히 나를 무시하셨다.
나는 일의 심각성을 느꼈다. 보아하니 사부님께서는 정말 더는 나를 데려가지 않으실 것 같으니 그 다음 부탁을 하자.
내가 말씀드렸다.
“사부님, 제가 당신이 그리워지면 어떻게 하나요? 제가 당신을 뵙고 싶을 때 뵐 수 있을까요?”
내가 말을 마친 후에도 사부님은 여전히 나를 무시하셨다. 내가 보니 이것도 안 된다면 내가 원만해서 무엇하고 그 집으로 나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사부님도 안 계시는데, 내가 돌아가서 무얼 한단 말인가? 나는 속으로 몹시 괴로웠다.
나는 생각했다.
‘한 사람이 수련 원만하는 것은 가장 큰 일이고 이는 가장 경축할만한 일이지만 나의 수련원만이 필경 이런 결말에 이른다면 이 우주는 너무 불공평하다. 장래에 온 세상이 다 경축하는데 나만 혼자 슬픔에 잠겨있을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았고 나는 또 사부님을 원망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예전에 한번 내가 삼계(三界)의 복잡함을 본 적이 있는데 아주 많은 생명들이 다 끼어 들어갔으며 지금의 삼계는 심지어 바늘 하나조차 꽂기 힘든 상태였기 때문이다. 중생의 은혜와 원한이 마치 천만갈래로 얽혀 있는 것처럼 하나를 움직이면 만 개가 연루되었다.
누가 움직이려 한다면 곧 예수와 같은 그런 결말이 될 것이다. 구세력이 사부님더러 하라고 했는데 사부님께서 해결하시려면 곧 이 무량한 중생들을 대신해 그들이 저지른 죄과를 짊어져야만 한다. 그 엄청난 업력에 사부님께서는 얼마나 고통스러우실까?
그때 나는 구세력을 몹시 미워했고 또 나 자신도 미웠다. 사부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지 몰랐고 수련을 잘 하지 않아 사부님께 걱정을 끼쳐드렸다. 지금 삼계를 보니 이 우주 중에서 너무 작아서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 사부님께서 구하려는 것은 전 우주의 중생이다. 그럼 얼마나 큰 업력인가? 사부님께서 얼마나 큰 고통을 감당하셔야 하는가? 사부님은 또 얼마나 피곤하실까?
한번은 내가 한밤중에 깨어나 생각해보니 이 집이 너무 낯설고 안의 가구도 너무 낡았다(새로 리모델링한 집이다). 내가 어떻게 여기서 잠을 잘 수 있었을까? 이때 나는 졸리고 피곤했는데 집안에서 몇 번을 돌아다녀도 잠잘 곳을 찾지 못해 울고 싶었다. 그제야 아이가 밤마다 울어도 잘 달래지 못하는 이유를 알았는데, 아마 지금의 나와 같은 기분일 것이다.
장차 자기 집에 돌아가서 사부님 옆에서 실컷 푹 자고나서 일어나면 상쾌할 것이다. 사부님께서 중생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을 다 소진했다고 생각하니 사부님께서도 마땅히 당신의 집으로 돌아가셔서 푹 쉬셔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또 달갑지 않았고 사부님이 나를 데려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그래서 집 안을 오가며 자신의 지혜를 다 짜냈지만 좋은 방법을 찾지 못했다. 결국, 가능한 유일한 방법은 계속 수련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수련을 더 높이 할수록 사부님과 더 가까워지고 사부님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부님을 뵐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나는 수련은 피라미드형임을 생각했다. 꼭대기에 오르면 곧 대궁(大穹)의 정상에 도착한 것이고 거기에 서면 곧 우주 밖을 볼 수 있고, 사부님을 뵐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이다. 나는 수련하여 꼭대기에 도달하고 싶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자 사부님께서 다시 내게 관심을 보이셨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네 스스로 결정하는 것으로 아무도 너를 강요하지 않는다.”
나는 “저 스스로 결정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사부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네가 계속 수련하려면 네가 원래 닦았던 것을 영(零)으로 되돌려야 한다. 너는 그래도 수련하겠느냐?”
나는 그 말씀을 듣고 어떻게 또 영로 돌아가야 할까? 라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까지 수련하면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겪었는가? 소업 중에 고통 속에서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다. 다시 말해 사람으로서 내가 이 나이에 처음부터 수련한다면 너무 늦은 게 아닌가? 그러나 사부님의 말씀은 변치 않는 진리였다. 이는 나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말씀드렸다.
“영으로 돌아가면 돌아가겠습니다.”
그러자 말이 나오자마자 나는 마치 깊은 계곡으로 한순간에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수련의 영성(靈性)이 사라졌고 사부님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다. 1999년 이전 사부님의 설법을 모두 찾아보았다. 왜냐하면 사부님의 그 설법들은 개인수련을 겨냥한 것으로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순간 나는 사람들이 희망이 사라졌고 두려움의 정도가 생사(生死)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때 하나의 관용구를 사용하여 자신을 설명하자면 바로 ‘모든 생각이 잿더미가 되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더는 내가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란 없었다. 유일한 길은 수련하여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곳에 내 생명의 희망이 있다.
오래되지 않아 내 무릎 관절에 단단하고 큰 혹 몇 개가 튀어나왔는데 반가부좌 하든 결가부좌 하든 다리를 굽혔다 하면 통증이 끔찍하게 아팠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오장공법은 한꺼번에 배운다”라고 하셨다. 나는 연공을 해야만 한다. 길을 걷는데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작은 광고를 나눠주었는데 모두 불 치료나 고약 따위의 광고였다. 나는 비록 반감이 컸지만 내가 절뚝거리며 길을 걸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고통을 참으며 최대한 정상적으로 걸으려고 노력했다.
어느 날 정공을 연마하는데 통증이 너무 심해서 사람이 완전히 무너질 것 같았다. 이때 나는 자신이 육교를 오르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너무 피곤해서 하나도 힘이 없어서 멈춰서 좀 쉬려고 했다. 머리를 들어 위로 쳐다보니 곧 정점에 닿을 것 같았고 더 아래는 평지였다. 그래서 계속 위로 올랐다. 이때가 내가 이번 마난 중에 처음으로 결가부좌를 한 것이었다.
한 단락 고통스러운 단련을 거쳐 나는 다시 정상적으로 연공할 수 있었고 다리에 있던 혹도 사라졌다. 나는 “공을 수련함에 길이 있으니 마음은 지름길, 대법은 끝없는데 고생을 배로 삼으세”(《홍음》〈파룬따파〉)의 약간의 의미를 깨달았다.
2018년 여름은 내 기억에 가장 더운 여름이었다. 공기가 응고된 것 같았고 사람이 가장 괴로울 때 나는 소업을 시작했다. 낮에는 좀 나았지만 밤이 되면 고통으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매일 밤 삶과 죽음을 넘기며 내 의지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나는 괴로워 마루 바닥에 누워 있었다. 자신이 안 될 것 같았고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이전에 나는 사망의 예감이 든 적이 있었고 이번에는 더 심했기 때문이다.
이때 정신이 맑았고 마음이 평온했다. 나는 수련의 길에서 최선을 다했고, 후회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누워서 속인처럼 존엄도 전혀 없이 죽을 수는 없었다. 나는 수련자이고 죽어도 거기에 똑바로 서 있어야 한다. 일어서려고 애를 썼는데 이때 나는 이미 숨이 완전히 막혔고 온몸의 모공이 다 닫혀있었다.
나는 열린 창문을 보았고 거기에 약간의 공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창가로 걸어가려 했지만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고 넘어지려는 순간 몸을 돌려 창턱에 앉아 생각했다. ‘이렇게 하면 그래도 존엄이 좀 있으니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말하지 않겠다.’
나는 심지어 눈을 뜰 힘조차 없었다. 나는 눈을 감았고 의식을 잃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지만 일어나보니 다시 숨을 쉴 수 있었고 더 이상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또한 일어나보니 다리에 힘이 생겨 집에서 두 번 앞뒤로 걸었는데 아주 좋고 괜찮았다.
정말 한 순간에, 삶과 죽음이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사부님의 말씀을 떠올려보았다.
“보기에 안 되고 행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을 그러면 당신이 한번 시험해 보라. 도대체 행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만약 당신이 정말로 해낼 수 있다면, 당신은 정말로 고난 속에 광명이 있음(柳暗花明又一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전법륜》)
이때 사부님의 이 단락의 법을 음미하니 정말 오묘하기가 끝이 없었다.
나는 소업할 때 종종 고열이 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내게 다가온 아내마저 불에 타는 것 같은 것을 느끼고는 매우 걱정하면서 이것저것을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당신이 나더러 얼마나 힘드냐고 물으면 몹시 고통스럽다고 말할 거요. 하지만 나는 수련인이니 시험에 통과하고 고통을 감내해야 해. 당신이 나를 돌봐주려는 건 알지만 이렇게 하면 내 의지가 약해져요. 나는 별일 없을 테니 당신이 나한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내게 가장 큰 도움이 되오.”
다른 한편 수련인으로서 남에게 자신의 좋은 면을 보여주려 한 것이고 또 나의 고통을 남에게 보여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오랜 세월 밤낮으로 나와 함께한 가족들도 내가 겪은 일을 전혀 모른다.
그해 가을, 나는 어느 날 아침 연공을 하면서 연공음악에서 사부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미러썬야오, 천.” 이렇게 뻗음을 따라서 나는 단번에 수련이 올라왔다. 이때 뒤에서 시원한 북풍이 뒤에서 내 몸에 불어왔는데 마치 사부님께서 손으로 살며시 만지시는 것처럼 아주 미묘했다. 눈앞에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내 생명은 다시 태어난 것처럼 삶의 의미와 가치를 절실히 느꼈다.
그 때 당시의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나는 짧은 글을 썼다. 제목은 《나는 가을을 사랑한다》였다. 그중 한 단락은 이렇다.
“나는 가을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수확의 계절이기 때문인데 엄혹한 추위와 더위, 풍상을 겪어 이제 큰 결실을 맺는다.”
그 때 나는 내 수련의 결실을 보았다. 수련한 진(真)은 잔물결이 없는 물속에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제야 나는 자신이 걸은 것이 선천대도(先天大道) 수련의 길이며 생명을 주선(主線)으로 전개 된 것임을 알았다. 기쁜 나머지 나는 이것이 단지 수련의 길에서의 새로운 여정이자 새로운 기점(基點)임을 깊이 알았다. 가을이 지나면 혹독한 겨울이다. 나는 기꺼이 혹독한 겨울의 세례를 받아들이고 눈보라의 고험을 포용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의 생명으로 통하는 희망이자 염원의 교량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나의 수련 체험은 여기까지 쓴다. 이것은 단지 내 수련 중의 일부일 뿐이다. 글을 쓰는 과정을 최대한 단순화하고 개인 수련의 일부만을 작성하였다. 내가 수련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교훈을 말하여 다른 동수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이글이 처음 투고한 원고인데, 교육수준에 한계가 있어 글을 쓰기가 매우 어려웠다. 여러 번 작성한 후 그것을 찢어버렸다. 이번에도 동수들의 비평 하에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다.
수련의 전 과정에서 나는 늘 사부님을 쫓아다녔고 늘 사부님께서 바로 앞에 계신 걸 느꼈고 그곳을 향해 힘껏 수련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과 삶과 죽음의 난관이 닥치더라도 나를 막을 수 없었다.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사부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았다. 나는 사부님이 아직 앞에 계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수련할 것이다.
내가 걸어온 발걸음 하나하나가 스승님의 심혈이 흠뻑 젖지 않은 곳이 없다. 사부님께 고마움이나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었고, 표현하고 싶어 온갖 궁리를 다했지만 마땅한 언어를 찾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사부님, 영원히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수련 중 나 개인의 요소는 매우 작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내가 무슨 좋을 일을 했는지는 마음에 두지 않는다. “하여도 구하지 않으니”(《홍음》〈도중에서〉), “있어도 마음엔 없고”(《각지 설법 10》〈맨해튼설법〉)의 법리가 이미 내 생명에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사(私)가 없으면 천지가 넓어짐을 깊이 느꼈다.
또 한 가지 방면은 바로 어떤 것은 써도 되고 어떤 것은 쓸 수 없는지, 이 척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어떤 글은 썼는데 또 글이 잘못됐다고 생각되어 곧 삭제했는데 상당히 괴로웠다. 나는 이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 사부님에게 여쭤보았다. 내가 얻은 정보는 그만하라고 점화할 때까지였다. 생각해보니 역시 그랬다. 어떤 것은 말로 누설해버리면 곧 의미가 사라진다.
우리 대법제자는 큰 과위를 성취해야 할 생명이기에, 돌파해야할 것이 단지 사람 속의 조그마한 그런 것만이 아니다. 매 사람의 인신(人身)은 모두 방대한 생명군과 연계되어 있으며 우리의 수련은 오직 성공만 할 수 있을 뿐 실패는 없다. 사람에게는 각종 집착이 있지만 집착의 본질은 일치하는데 바로 두려움으로 각양각색의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또한 유사유아(唯私唯我 오직 사만 있고 나만 있는 것)와 위사위아(爲私爲我) 유사유아(維私維我 사와 아를 지키려는 것)에서 온다. 이 아(我)와 사(私)를 떼어내지 않는다면 사람은 질적인 변화가 없을 것이다.
삶과 죽음은 사람의 각기 다른 성격과 품행을 반영하는 거울이며, 더욱이 한 생명의 본질적인 진실(真實)을 비춘다.
내가 체험한 것은 이렇다.
설령 진정으로 절망적일 때에도 나는 내 신념과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내게 주신 수련계통은 강력한 위력이 있었다. 그것은 사부님의 위덕(威德)・지혜(智慧)・자비(慈悲)로 형성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법의 속성에 내재된 현기[玄機 또는 선기(旋機)]를 직접 몸으로 겪은 적이 있다. 오직 마음이 그 속에 있기만 하면 사람은 곧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때로 부모를 보면 자기 아이들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고 후회가 없다. 또 자기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정말로 자신의 일체를 다 버릴 수 있다. 수련 중에서 만약 이런 마음을 지니고 수련하면 무엇이든 다 있을 것이다. 성공은 수련의 과정이 바로 휘황한 역사가 되고, 실패는 바로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일이다.
법공부 속에서 나의 체험은 이렇다. 법공부를 진지하게 하고 마음을 써야 하며, 많이 대조하며 많이 생각하면서 용감히 실천해야 한다. 대충 지나가거나 앵무새처럼 흉내만 내는 방식으로 법공부를 할 순 없다. 대법수련은 한 방대한 체계의 거대한 공정이다. 수련의 정체에서부터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이해하고 인식해야만 비로소 단장취의(斷章取義) 하지 않을 수 있고, 비로소 법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으며, 비로소 불패의 지위에 설 수 있다.
명혜(明慧)와 정견(正見) 동수들이 우리를 위해 이렇게 좋은 교류 플랫폼을 만들어준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 속에서 동수들의 거대한 헌신과 사심 없는 공헌을 느낄 수 있다. 내심 깊은 곳에서 이런 동수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 플랫폼을 통해 얻은 수익이 적지 않다. 나의 전체 수련 중에 얼마나 많은 동수들의 지혜가 녹아들었는지 모른다. 감동적인 수련체험이든, 삶의 철학이 담긴 인생통찰이든, 자연이 부여한 고귀한 인격과 매력을 전하는 산문이든, 그것들은 내 인생에 모두 낙인을 남겼다. 그것은 나의 궁극적인 수련 성공에 측량할 수 없는 도움이 되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명혜 라디오의 한 구절을 빌려 끝을 맺고자 한다.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언젠가는 지나가며, 따뜻한 봄이 눈앞에 있으며, 사악의 광기는 이미 힘이 빠져버렸고 인류 미래의 길은 빛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96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