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육문(陸文)
【정견망】
우리가 법(法)을 통독(通讀)할 때면 흔히 딴 생각을 하기 쉽다. 생각을 딴 곳에 팔면 곧 원신(元神)이 딴 생각을 하는 것으로 눈으로는 책을 보고 입으로는 책을 읽고 있지만 마음(心神)은 그곳에 없다. 마음을 쓰지 않고 법을 공부하는 것은 마치 말을 타고 가면서 꽃을 구경하는 것과 같다. 꽃의 바다를 볼 수는 있지만 어느 한 꽃도 제대로 감상할 수 없고 매 한 꽃잎의 매력은 더욱 기억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법을 외울 때면 딴 데 정신을 팔기가 아주 어렵다. 법을 외우려면 반드시 염두(念頭)를 집중하고 정신을 모으며 온 정신을 다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면 정신이 집중되고 심신(心身)이 합일(合一)된 것이다. 이렇게 법을 공부하면 마음에 들어가고(入心) 정에 들어갈(入定) 수 있다.
주원신(主元神)이 청성하게 공부해야만 진정으로 자신이 법을 배운 것으로 이렇게 해야만 자신이 법을 얻을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법 공부는 형식에 치우치지 말고, 염두(念頭)를 집중해서 배워야 하며, 진정하게 자신이 배워야 한다.”(《오스트레일리아법회에》)라고 말씀하셨다.
법공부가 마음에 들어갈 때면 마음에 곧 건드려지는 게 있거나 심지어 진감(震撼)될 것이다. 법을 외울 때면 한편으로는 암송하고 다른 한편으로 법의 내함(內涵)을 사고하는 동시에 법리(法理)로 자신을 대조하기에 법의 보다 깊은 내함(內涵)을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심층(深層)의 집착과 변이를 캐낼 수 있다.
가령 “진정한 수련은 곧 마음을 닦아야 하고, 안으로 닦아야 하며, 안에서 찾아야 하는데, 밖에서 찾는 것이 없다.”(《전법륜》)를 당신이 한번 통독한 후 다시 10번을 암송한 다음 스스로 한번 느껴보라. 이 구절을 나는 수백 번도 더 통독했지만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해 너무 익숙해서 마치 보지 않은 것과 같았다. 그러나 암송할 때는 이 한 구절의 내함이 며칠이나 나를 놀라게 했다.
먼저 “진정한 수련”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진(真)이란 수련에 진짜(真)와 가짜(假)가 있다는 것이고 정(正)이란 수련에 정(正)과 사(邪)가 있다는 것이다. 안으로 찾지 않을 때면 곧 진수(真修)가 아니라 가수(假修 가짜 수련)가 된다. 안으로 찾지 않을 때면 바르지 않게 걷는 것으로 곧 비자각적으로 사(邪)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아주 많은 때 수많은 모순 속에서 안으로 찾지 못했는데 다시 말해 진정한 수련이 아니었다. 나는 진수(真修)했는가? 나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어보곤 하는데 묻고 나서 스스로 몹시 부끄러웠다. 가령 집안 어른이 불만을 털어놓으면 나는 늘 그가 무리하게 소란을 피운다고 여겼고 비웃었으며 동정하거나 포용하지 못했다. 지난 20여 년간 진정으로 수련한 때가 얼마나 되는가? 이후 나는 날마다 자신에게 물어본다. ‘너는 진정으로 수련했는가?’
“곧 마음을 닦아야 하고(就得向心去修)”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해야만 한다(得)는 것으로 이는 필수적이고 무조건적이다. 마음을 향한다(向心)는 것은 바로 표면적인 옳고 그름이나 시비에 들떠 있지 말고 자신의 마음씨와 동기나 목적에 문제가 있는지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닦는다(去修)는 것은 바로 없애어 바로잡는 것이다. 언젠가 가방을 수선하는데 숙련된 기술자가 망가진 지퍼를 가방에서 하나하나 떼어내고는 다시 새로운 지퍼를 대고 바느질을 했는데 망가진 것은 버리고 좋지 않은 것을 고치고 나서야 수선을 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상사가 일을 맡기면 나는 늘 그가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하다고 여기고 늘 표면적으로 자신이 잘못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이익심을 찾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찾지 않았다면 그럼 수련하지 않은 것이다.
“안에서 찾아야 하는데, 밖에서 찾는 것이 없다(向內去修,向內去找)”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마치 양파 껍질을 까는 것처럼 한 층 한 층으로 끊임없이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안으로 찾음은 한 가지 마음을 찾으면 거기서 멈추고 모든 게 다 끝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마음을 찾았으면 뿌리까지 뽑아버려야 한다. 그리고 다시 안으로 파보고 다시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 한번은 내가 가족들과 함께 일을 하지 않은 적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큰 풍파를 일으켰고 모두 나를 질책했다. 안으로 찾아보니 처음에는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마음과 화를 내고 억울하게 여기는 마음을 찾았다. 다시 찾아보니 변명하려는 마음, 자아를 실증하려는 마음이 있었는데 다시 찾아보니 남에게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과 대가를 치르려하지 않는 마음이 있었다. 더 깊이 찾아보니 또 이기적이고 계산하는 것을 찾아냈다.
“밖에서 찾는 것이 없다(沒有向外去找的)”는 것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진수(真修)는 밖으로 찾는 게 없고 그렇다면 밖으로 찾는다면 곧 진수가 아니다. 나는 습관적으로 남의 잘못을 보는데 자신이 이유를 거듭 강조하면서 늘 자신을 덮어 감췄다. 다른 사람에게 교활한 궤변을 한다면 이는 모두 밖으로 찾는 것이 아닌가? 진수는 무조건적으로 안으로 자신을 찾아야 하며 밖으로 찾는 게 조금도 없어야 한다. 고인(古人)은 “만약 진정한 수도인이라면 세인(世人)의 잘못을 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남의 문제를 끄집어냈을 뿐만 아니라 또 남이 잘못한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속으로 미워하고 원망하는 표정을 짓는데 이렇게 해서야 어찌 허허 웃으며 지나갈 수 있겠는가? 남들은 매일 허허 웃으며 지나가는데 나는 날마다 인상을 찌푸렸다. 이는 모두 내가 밖으로 찾았기 때문에 걸음을 떼기 힘들고 각종 모순이 중첩되게 했던 것이다. 이후 나는 매일 자신에게 “밖에서 찾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일깨워준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강변(強辯)에 부딪혀도 다투지 말지니
안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수련이라
밝히려 할수록 마음은 더 무거워지거니
마음 비워 집착 없으면 명견(明見)이 나온다네”
(《홍음 3》〈논쟁하지 말라〉)
이 시를 외운 후 나는 강변에 부딪쳐 말을 하거나 표현하면 곧 말싸움이나 쟁투가 됨을 인식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자신을 표현하는데 조급해 하는가? 이미 수련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오직 안으로 찾는 것만이 자신을 닦는 것이다. 해명하려 하고 반복해서 어떻게 해명할지 생각하는 것은 바로 사람마음이 너무 무거운 것이다. 오직 철저히 내려놓고 아무런 집착이나 누락이 없어야만 정견(正見)이다. 각종 형식으로 다양하게 은폐하거나 회피하고 변명하는 것은 모두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으로 수련이 아니다.
법을 외우지 않았을 때는 몰랐지만 일단 외우고 나자 나는 깜짝 놀랐다. 찾지 않을 때는 몰랐지만 일단 찾아보니 놀라서 펄쩍 뛸 정도였다. 나는 법의 표준과 진정한 수련의 표준에서 벗어났는데 차이가 아주 작은 게 아니라 십만 팔천 리였다.
당신이 만약 《전법륜》 암송을 견지하고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해 겨냥성을 지니고 암송을 강화한다면, 법공부가 마음에 들어간 후 당신은 날마다 당신 앞에 펼쳐지는 것은 모두 완전히 새로운 법이며 예전의 법이 아님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부동한 층차의 법이다. 당신이 이미 유창하게 암기해서 배울게 없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당신은 법(法)에는 끝이 없고 배움에 끝이 없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잘 안다고 여겨 대충 넘어가지 않는다면 당신은 곧 정신이 집중되고 숨까지 차분해지며 (법공부가) 너무 좋아서 손에서 내려놓으려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반복해서 법을 외우면 마음속에 법이 많아지고 법이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는데, 다시 모순 충돌에 부딪치면 관련된 법리가 자연스레 떠오를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곧 자연히 법을 스승으로 삼고 안으로 찾을 수 있으며 심성(心性)을 지키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사람 몸을 지니고 법(法)을 배우지 않는다면 너무나 애석한 일이고, 법을 배우면서 법을 외지 않는다면 더욱 애석한 일이다. 지금 나는 자신이 법을 외운 시간이 너무 늦었음을 후회하는데 너무나 많은 소중한 시간을 놓쳐버렸다. 여러분들이 나의 교훈을 받아들이길 바란다.
작고 졸렬한 의견이니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388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