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일본 대법제자
【정견망】
최근 중공 병독(病毒)이 만연하면서 동수들 사이에서도 일부 부동한 인식이 있는데 나 자신의 법리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 병업관을 넘기는 것에 대한 개인 인식을 말해보고자 한다.
1. 대법을 수련하는 각도에서 보기
우리는 모두 우리가 수련하는 것이 우주대법이며 우리는 창세주(創世主)의 제자임을 알고 있다. 우리는 우주를 창조한 대법에 따라 수련하고 있고, 층층 천체(天體) 및 그 천체 속의 불도신(佛道神)을 창조한 대법에 따라 수련하고 있다. 대법제자란 칭호는 우주의 운운중생(芸芸眾生)들이 모두 흠모하는 칭호이다. 바로 우리가 대법을 수련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바로 무량한 위덕이 있는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우리가 병에 걸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우주 중에서 가장 큰 분자로 구성된 병독이나 세균에 감염될 수 있는가?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럼 왜 일부 개별적인 수련생에게 이런 병업반응이 나타날 수 있는가?
나는 우리의 마음 때문이라고 보는데 우리의 인식이 ‘대법제자’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해서 조성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내가 그에게 대학의 것을 가르쳐 주는데, 그는 늘 나에게 어떻게 인도하는가, 어떻게 의념활동을 하는가 하면서 초등학생의 일을 묻는다.”라고 하셨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가장 좋은 대학인 동경(東京)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우수할 것이고 또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본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인정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주에서 가장 좋은 대학에 들어간 것과 같은데 우리는 이런 인식이 없고 또한 자신을 초등학생으로 간주하면서 여전히 일반적인 수련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이 일념의 차이가 부동(不同)한 후과(後果)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하셨다. 사실 우리 자신이 자신을 낮춰 보고 작게 보는데 다시 말해 우리가 대법을 작게 본 것이다. 우리의 이런 인식은 우리의 능력을 제한하는 동시에 또 대법이 우리에게 부여한 위덕을 제한한다. 당신의 인식이 이 층차에 있으면 그럼 당신 역시 마땅히 이 층차의 상태에 부합해야 하며 병업반응이 나타나는 것 역시 정상이 된다.
‘병업(病業)’이란 이 명사를 말하자면 내가 이해하기에는 바로 업력이다. 수련인에 대해 말하자면 바로 소업(消業)이고 신체정화이지만 그것의 표현형식이 마치 병과 같기 때문에 ‘병업’이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동수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종종 ‘병업’을 언급하기만 하면 바로 ‘병(病)’을 떠올리고 ‘병’의 관념으로 생각하는데 이렇게 하면 ‘병’과 관련된 각종 집착과 각종 관념을 초래할 수 있고 이로 인해 각종 번거로움을 가져올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우리 진정으로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은 병이나 병독 세균과는 인연이 없다. 여기에는 신(新)수련생을 포함한다. 하지만 신수련생에겐 소업과 신체정화 현상이 존재할 수 있다. 신수련생에 대해 말하자면 관건은 이런 현상이 나타난 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만약 당신의 천목이 열려 있고 또 아주 분명하게 볼 수 있다면 당신이 소업할 때 당신 신체가 점점 더 순정해지는 것을 볼 수 있고 끊임없이 불체(佛體)로 전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면 당신이 두려울 게 있겠는가? 내 생각에 당신은 두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아주 기뻐할 것이다. 당신은 아마 업력이 더 빨리 소멸되고 더 빨리 전화되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지 못하고 또 ‘병’이 있다는 관념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집착이 있을 수 있다. 이때 만약 우리가 정념을 확고히 하고 대법의 법리로 가늠할 수 있다면 곧 집착이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련인데 인식이 제고되면 자연히 무병(無病)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소업과 신체정화 자체는 변화가 없지만 우리의 인식이 제고되어 올라왔기 때문에 더는 저층의 요소에 제약받지 않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경고하는 말〉에서 “만약 당신들이 사람마다 모두 내심에서 법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비로소 위력이 끝없는 법의 체현 ― 인간 세상에서 강대한 불법(佛法)의 재현(再現)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신수련생이건 노제자건 만약 우리의 인식과 심성이 대법제자가 마땅히 도달해야 할 그 층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역시 저층의 교란요소가 나타날 수 있다.
2. 우리 생명본원에서 층층 아래로 내려오는 과정에 형성된 업력과 각종 관(關)
사부님께서는 《북미 제1기법회설법》에서 “당신이 선천적으로 내원(來源)한 그곳의 그 신체, 그는 본래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내가 이해하기에 아마도 우리는 그 한 층에서 바로 그 한 층의 왕(王)이나 주(主)였을 것이다. 우리는 그 한 층의 중생을 대표해 창세주(創世主)를 따라 층층 아래로 내려와 대법에 동화하고 조사정법(助師正法)하고 중생을 구도하러 왔다.
그렇다면 우리에 대해 말하자면 최후 일세(一世)에 다시 말해 이 세(世)가 바로 극히 관건적인 것으로 이 세는 사부님의 정법과 관련이 있고 중생의 미래와 관련이 있는데, 다시 말해 우리 자신 생명의 미래와 관련이 있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우리가 생명의 본원에서 내려올 때 우리 자신이 최후 일세에 우리가 대법에 동화하고 조사정법하는 것을 교란하는 요소의 배치가 없을 수 있겠는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수많은 번거로움에 부딪히고 또 이런 번거로움이 정법을 교란할 수 있는가? 법공부에서 우리가 알다시피, 이 일체 교란 요소는 다 구세력이 배치한 것이다. 그럼 그것은 어떻게 배치했으며 구세력과 우리는 또 어떤 관계일까?
내가 이해하기에 우리는 생명의 본원 층차에서 사부님과 서약을 맺었고 또 사부님을 따라 아래로 내려올 때 미래에 대법제자가 되기로 정해졌을 것이다. 층층 아래로 내려오는 가운데 매 한 층을 내려오면 곧 그보다 위층의 기억을 봉폐시켰다. 아마 우리 최초의 경지에서 우리는 주(主)나 왕(王)이었겠지만 한층 아래로 내려온 후에는 그 층의 주(主)가 아닐 것이다.
가령 우리가 본래 한 나라의 국왕이라고 하자. 그러나 우리가 기억을 상실한 후 그 나라의 어느 한 마을에 왔다면 이 마을 사람들은 내 생명의 본원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나는 단지 보통 촌민(村民)일 뿐이다. 기억이 봉폐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도 자신이 일반 촌민과 마찬가지이며 다른 이들과 같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본원생명은 일찍이 사부님과 서약을 맺었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이 층차의 주와 뭇신들 역시 내가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희망을 또 우리 몸에 기탁할 것이며 동시에 내가 그들이 갖고자 하는 것에 도달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 일부 신들은 내게 배치했을 것이다. 층층이 다 이러한데 이런 배치가 바로 정법중의 교란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왜 나를 배치하려 하는가? 왜냐하면 그들은 내 본원생명체계 중의 한 층차이기 때문이며 내가 구도 받는 것이 그들의 미래와 직접적으로 관련되기 때문이다.
삼계(三界)에 내려와서 우리는 사부님을 따라 미래 정법의 수요를 위해 인류문화를 창조했다. 생생세세(生生世世) 윤회 중에서 인류문명을 개창하는 가운데, 그것들이 배치한 것 역시 각종 역사 사건을 통해 우리 생명 속에 수많은 집착과 관념, 각종 기호, 각종 성격특성 또는 업력 등을 더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를 장애하고, 우리가 최후에 설령 법을 얻을지라도 법에 대한 인식 상에서 차단작용을 할 것이다.
이 한 세(世)에 우리에게는 많은 집착이 나타난다. 아마 생생세세 지은 업 때문에 이 한 세에 우리에게 수많은 번거로움을 가져다줄 것이다. 만약 우리의 생생세세가 모두 이 한 세를 위한 것이라면, 모두 최후 한 세에 대법에 동화해 조사정법(助師正法)하는 작용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번거로움은 정법을 교란하는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일반적인 번거로움일 수 있겠는가?
우리 이곳에 표현되는 것은 우리의 집착과 업력으로 조성된 것이지만 이런 집착과 업력을 조성한 진정한 요소는 구세력이 아닌가? 구세력만이 진정한 주모자로 마땅히 죄과를 감당해야 한다. 이런 각도에서 말하자면 우리는 이런 교란을 마땅히 부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또 다른 각도에서 말하자면 우리의 가장 본원적인 경지(境界) 속에서 우리는 창세주와 직접 서약을 맺었기 때문에 제삼자는 끼어들 수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 배치한 생명들은 모두 우리 본원생명 체계 내의 생명들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또 그들의 주이고 그들의 왕인데 그렇다면 그들이 우리에게 배치할 자격이 있는가? 없다. 생명의 본원에서 말하자면 그들 역시 우리를 배치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 배치가 작용을 일으키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승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일체를 똑똑히 간파하고, 생명 깊은 곳에서 부정할 때면 그 배치 역시 작용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본원생명보다 더 높은 생명이 우리를 배치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아마 가능할 수 있겠지만 그들이 직접 우리 층차에 와서 우리를 배치하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아래로 걸어 내려오면서 있었던 경지의 생명을 통해 우리를 배치할 것이다. 다시 말해 직접 우리를 배치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보다 낮은 생명이다. 그럼 우리보다 낮은 생명은 첫째, 우리를 배치할 자격이 없고 둘째 배후에서 우리보다 높은 생명과 관련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수련하는 것은 우주대법으로 우리 배후에는 대법이 있고 창세주가 계신다. 그가 제아무리 높을지라도 모두 우주범위 내에 있고 모두 정법의 대상이다. 이점에서 말하자면 우리는 또 그들을 부정할 능력이 있다.
바로 우리 손에 상방보검(尚方寶劍 역주: 황제가 전권을 위임한 보검으로 이 보검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 처단할 수 있다)을 든 것처럼 정법에 대한 일체 교란을 우리는 다 타파할 수 있다. 그들이 정법에 대해 실질적인 교란을 조성했기 때문에 그들 자신 역시 극히 위험한 경지에 처해 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의 배치를 타파하고 그들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면 그럼 그들을 구도한 것이 아니겠는가?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누가 당신을 움직일 수 있다면 곧 나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면, 그는 곧 이 우주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부님과 대법 및 정법과의 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다면 우리는 곧 마땅히 마난(魔難)이 없어야 하며 소위 ‘병업’이란 더욱 없어야 한다.
3. 우리의 사명에서 본 업력과 관난(關難)
법공부 중에서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가 신(神)의 광환을 내려놓고 천담(天膽)을 무릅쓰고 사부님을 따라 세상에 내려온 것은 대법에 동화해 조사정법하고 중생을 구도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목적이자 유일한 목적인데 다시 말해 우리 대법제자의 사명이다.
하지만 구세력이 자신들의 원하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에게 억지로 더한 배치는 또한 우리 몸에 수많은 ‘위사(爲私)한 요소’를 지니게 했다. 정법이 시작되었을 때 다시 말해 우리가 전심을 다해 우리 사명의 완성에 투입할 때 이런 ‘위사(爲私)한 요소’는 오히려 엄중한 교란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우주는 정법하고 있고 우리는 또 정법의 참여자인데 이 얼마나 영광이고 얼마나 중대하며 얼마나 엄숙한 일인가! 만고(萬古)이래 오직 이번 한 번 뿐이고 이번 한 차례는 또 우주 모든 생명의 미래를 결정한다. 이 때 당신에게 병업이 나타나고 당신에게 하나의 큰 관(關)이 나타나 당신이 자신을 돌보느라 다른 여유가 없게 만들어, 본래 당신이 마땅히 구도했어야 할 중생과 마땅히 완성했어야 할 사명을 당신의 병업 때문에 수많은 기회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당신 개인이 관을 넘는 일이란 말인가?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이런 업력과 관난(關難)은 바로 정법에 대한 교란이 아닌가?
우리가 끝없는 광염을 지닌 위대한 신에서 세간까지 내려온 것은 고생을 겪고 소업하며 관을 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수련 역시 우리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다지는 작용을 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도항》〈미국서부법회설법〉에서 “진정한 부처인 그는 우주의 보위자(保衛者)이다. 그는 우주 중의 일체 바른 요소를 책임질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다 이 주선(主線)으로 회귀할 때, 우리가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 대한 모든 교란은 마땅히 부정해야 한다. 이 어지러운 세간에서 우리는 마땅히 끊임없이 이 목적을 강조해야 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미혹되어 길을 잃지 말아야 한다. 대법에 동화해 자아(自我)를 바로잡고 정법의 기점에 서서 병업의 관난(關難)을 부정하는 것은 위사(爲私)한 것이 아니라 바로 정법을 위한 요구이다.
4. 우리 사유방식에서 본 업력과 관난
이런 교란을 부정하려고 한다면 또 한 가지 요소가 있는데 바로 우리의 사유방식이다. 한 가지 일이 나타난 후 우리는 종종 관성적인 관념으로 보는데 이런 관념이 바로 일이 향방을 결정한다. 물론 만약 집착이고 또 잘못된 생각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것을 따라가는 것은 별개의 일이니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좋지 않은 사상임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또는 의식했어도 배제하지 못하는 상태다.
가령 병업관을 넘는 한 동수가 있는데 그가 이치는 다 알지만 자신이 여전히 그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여긴다. 자신에 대한 신심을 잃고 아주 어렵다고 느끼는데 이를 통해 또 두려운 마음이 나타나 관의 어려움을 더 크게 할 수 있다.
“자신은 아직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여기는” 이런 사유는 마치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법으로 한번 가늠해보면 곧 문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수련인으로서 문제에 봉착해 법으로 가늠해서 마땅히 옳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은 아직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여기는” 자체가 바로 자신이 옳지 않은 것을 선택하면서 구실을 찾는 요소가 된다. 물론 이는 잠재의식 속의 생각이며 아마도 표면상으로는 아직 모를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아직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병업의 감수(感受)를 정상으로 여기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이 관은 아주 장시간 끌 수 있고 심지어 엄중하게 변하는 것 역시 정상이다. 이어서 두려운 마음을 갖는 것이 정상이 되고 계속해서 더 내려가면 아마 보다 많은 집착이 나타날 것이며 아마 이 관을 더욱 크게 만들고 더 넘기 힘들게 만들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마 “이것은 바로 나의 감수가 아닌가, 나도 빨리 넘어가고 싶지만 넘어갈 수 없지 않은가.”라고 한다. 사실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여기는” 생각 자체와 소위 그런 감수 모두 외래요소가 억지로 더한 것이다.
수년 전에 나는 한 가지 체험이 있었다. 그때 자신의 각종 집착이 너무 많고 또 제거하기가 아주 어렵다고 여기면서 이렇게 수련하는데 어찌 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런 후 나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자신의 내심을 느껴보았다. 서서히 나는 자신의 신체 미시적인 속으로 들어갔다. 한층 미시적인 곳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그 한 층 미시적인 내게도 일부 집착이 있음을 느꼈고 그런 후 다시 더 미시적인 속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끊임없이 들어갔는데 내가 어느 한 층에 도달한 후 나는 그런 집착과 관념이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그 한 층의 나는 조용하고 상화롭게 그곳에 앉아 있었다.
이 체험은 내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는데 바로 그런 내려놓기 힘든 집착은 사실 모두 더해진 것이다.
물론 집착, 관념, 생각은 각양각색이라 여기서는 단지 예를 든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가늠하는 표준은 같은 것으로 모두 법으로 가늠해서 옳은 것은 우리가 받아들이고 옳지 않은 것은 우리가 벗겨버리면 된다. 이외에도 우리가 또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좋지 않은 생각과 관념 자체가 바로 우리에게 억지로 더해진 것이다. 우리는 또 자신이 입정(入靜) 상태(내가 보기에 미시적인 신체 속으로 들어간 것)에 들어갈 수 있다. 나는 우리가 그런 집착과 관념이 더해진 것임을 절실하게 체험할 수 있다면 더 효과적으로 그것을 벗겨내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션윈(神韵)의 한 프로그램에 어느 장군이 전쟁에 염증을 느껴 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도장(道長)을 만나는데 그는 이 도장에게 절을 올려 스승으로 삼고 도를 배웠다. 도장에게는 그보다 먼저 들어온 제자들이 아주 많았는데 이에 그는 여러 사형들과 함께 수련했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그는 입문이 가장 늦으니 마땅히 도행(道行)도 가장 낮아야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도장이 갑자기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자 여러 사형들은 모두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오직 그만이 사부를 따라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그런 후 여러 사형들은 사부가 그를 이끌고 상서로운 구름 속으로 백일비승(白日飛升)하는 것을 보았다.
사부가 뛰어내린 순간 이들 사형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생각해보라!
“어찌 이럴 수 있는가?”
“나는 어떻게 하지?”
“도를 닦을 희망이 사라졌구나.” 등등.
그러나 그들이 수도(修道)할 때 사부님에 대한 믿음과 수련에 대한 확고한 신심은 어디로 갔는가? 만약 그들이 이 한 점을 알 수 있었다면 곧 이런 생각을 제거하고 확고하게 사부를 따라 뛰어내렸을 것이다. 그럼 그들 역시 수련 성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념의 차이로 전부 다 잃은 것이다!
우리가 병업관을 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창세주의 제자로서 우주대법을 수련하며 또 중생을 구도할 사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관난에 직면해도 늘 만사를 구비한 것과 같으며 이때 우리가 단지 마음을 바로잡기만 하면 그럼 부족한 게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제자의 정념이 족하면 사부는 회천력이 있노라”(《홍음 2》〈사도은〉)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상은 내가 있는 층차에서의 인식이니 법에 부합하지 않는 곳이 있다면 여러분들의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4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