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나는 7.20 이전에 법을 얻은 제자지만 부끄럽게도 정법(正法)이 곧 끝나가려 함에도 아직 색욕심을 깨끗이 제거하지 못했다. 때로는 염두가 아주 강해서 예쁜 이성을 보면 종종 품지 말아야 할 생각이 나오고 배척하면 염두가 사라지는 늘 이런 상태에 처해 있었다. 나는 조급하고 화가 나면서도 어찌할 수 없었다. 비록 매번 발정념을 할 때 “내 공간장에서 일체 색욕의 요소를 깨끗이 제거하고 완전히 없앤다”라는 일념을 추가했지만 크게 돌파하지 못했다.
꿈속에서 한 차례 고험도 넘지 못했다. 한동안 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름 노력을 했으니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최후에 원만할 때가 되면 사부님께서 반드시 이런 것들을 깨끗이 없애주실 것이다.
그러다가 최근에 한차례 발정념을 할 때 천목(나는 천목이 열리지 않았고 이번 한 차례만 본 것이다)으로 선명하게 보았다. 눈앞에 큰 돌이 나타났는데 높이가 1미터 남짓했고 돌 아래에 뱀들이 있었는데 몸에서 빛을 내면서 함께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생각했다.
‘뱀은 종종 색욕지심(色慾之心)을 가리키니 돌 아래 뱀이 있는 것은 역사적으로 내가 색욕 방면에서 큰 업을 지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금생에 색욕심이 어찌 이리 중할 수 있단 말인가?’
법을 얻기 전에 어떤 사람이 나더러 초류향(楚留香 역주: 고룡 무협소설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플레이보이)이라며 바람둥이라고 했다. 나는 음란물을 많이 보았고 많은 이성들과 관계를 가져 산처럼 업을 쌓았다. 이 경력은 내 수련에 마음의 병을 만들어주었다. 만약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벌써 끝장났을 것이다.
지난 20여 년간 나의 가장 큰 고뇌는 바로 색욕심 제거였다. 꿈속에서 관을 넘지 못한 것은 물론 청성할 때에도 늘 색념(色念)이 아주 강했다. 가슴을 치고 발을 굴러도 보고 스스로 뺨도 때려 보았다. 또 여러 차례 사부님 법상 앞에 무릎을 꿇고 빈 적도 있고 매번 발정념을 할 때마다 내 공간장의 색욕의 요소를 깨끗이 제거한다는 염두를 더했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번 꿈은 내게 단번에 문제의 실질을 보게 했다.
나는 이 물건이 내 공간장에서 아주 두터운 것을 발견했는데 마치 온몸에 물든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이 내가 아니며 본성(本性)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나는 걱정했다.
‘만약 정법이 결속되어도 색욕심을 깨끗이 없애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지? 26년을 수련했지만 아직도 《전법륜》에서 언급하신 그 무한(武漢) 젊은이가 입정 중에 자신을 잘 파악한 것만도 못하다니.’
이번에 천목으로 본 것은 나로 하여금 색욕에 대한 인식에 돌파를 가져다주었다. 전에 나는 색욕심을 자신의 것으로 보았다. 즉 내게 색욕심이 있고 그것도 아주 중하며 사념(邪念)이 많고 떳떳하지 못한 일들을 했다고 여겼지만 기점이 줄곧 내게 있었다. 이는 자신에게 ‘너는 색욕심이 중하게 여기니 마땅히 스스로 닦아 없애는 것을 책임져야 한다’고 성격을 규정한 것이다. 개인의 기점에서 수련하면 아주 어려운 것으로 이는 구세력이 배치한 길을 걷는 것이다.
사전(史前)시기부터 지금까지 구세력은 매 대법제자마다 모두 아주 세밀한 배치를 했다. 사부님께서는 심지어 박해 중에서 몇 대를 때리고 몇 번 소리를 지르는 것까지 배치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대법제자 색욕심의 많고 적음을 구세력이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이런 배치는 감독과 배우의 관계와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을 연출한 건 구세력이고 대법제자더러 가서 연기하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배우가 피동적이며 스스로 원해서 한 게 아니라면 그럼 책임은 마땅히 감독이 져야 하는 게 아닌가? 어떻게 배우를 찾을 수 있는가?
그런데 만약 배우가 주동적으로 스스로 책임을 떠안는다면 구세력이란 감독이 너무나도 원한 게 아니겠는가.
전에 나는 입만 열면 “나는 색욕심이 강하고 색욕 방면에서 어떠어떠하다”라고 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감독의 책임을 배우의 몸으로 넘긴 게 아닌가? 우리가 이 관계를 똑똑히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라는 큰 연극의 배우로서 우리는 윤회 속에서 누구와 부부가 되고 누구와 친구가 되었으며 어떤 생활환경 속에서 어떤 이성을 접촉하고 무슨 일을 하는가부터 누구와 어떤 말을 하는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어떤 역할을 연기한다면 구세력의 배치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색욕심이 중한 것은 아마 역할 안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기녀였거나 또는 기루의 손님이었거나 또는 다른 무엇을 맡았을 것이다.
구세력은 개인수련의 틀에 대해서는 아주 익숙하지만 정법수련은 이해하지 못한다. 개인의 기점에서 서서 색욕심을 제거하면 그것들은 기뻐하는데 그것이 당신을 색욕심 제거란 진창에 빠뜨려 걷기도 힘들게 하며, 늘 다 닦아내지 못하게 하고 구실을 잡는다.
“너 스스로 색욕심이 중하다고 인정하지 않았느냐? 이 방면에서 업을 많이 지었다고 승인하지 않았느냐? 그럼 네가 깨끗이 닦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럼 닦아라, 언제까지 닦아버리지 못하면 그때 청산한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는 구세력 자체의 출현과 그것들의 배치한 일체마저 모두 부정하는 것으로, 그것들의 존재마저 승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그것의 이 일체를 부정하며, 그것들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중에서 당신들이 행한 일체야말로 위덕이다. 그것들이 조성한 마난 속에서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승인하지 않는 가운데서 자신의 길을 잘 걷는 것이며, 그것들 자체를 제거하는 마난의 표현마저도 승인하지 않는다. (박수) 그럼 이 각도에서 볼 때, 우리가 마주한 일은 바로 구세력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이다.”(《각지설법 4》〈2004년 시카고법회설법〉)라고 하셨다.
이 점을 깨달은 후 나는 구세력에게 물었다.
“내 생명의 본질은 순정(純淨)한 것으로 모든 색욕물질은 너희들이 억지로 더한 것이며 너희들이 시킨 것이다. 만약 너희들의 배치가 아니었다면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반드시 너희들이 감당해야 한다! 모든 색욕의 요소는 전부 너희들에게 돌려야 이치에 부합한다.”
이 점을 인식한 후 나는 침중(沈重)한 압력에서 벗어나 더는 색욕심을 없애지 못한 것 때문에 번뇌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실증하는 것은 대법이지 구세력의 배치가 아니다. 색욕의 요소는 나를 대표할 수 없으며 나는 승인하지 않는다. 이때 나는 일종 진창 속에서 뛰쳐나와 연못 밖으로 올라온 느낌이었고 몸이 밖에 있으면서 이런 바르지 못한 요소들을 바로잡았다. 힘이 아주 큰 것을 느꼈고 그런 것들이 나의 공간장에서 마치 깨끗이 제거된 것 같았다.
며칠 후 꿈을 꾸었다. 한 마리 아주 큰 뱀이 땅속에서 드러났는데 몸 굵기가 한자가 넘었지만 나에게 머리를 맞아 죽었다. 지금 비록 내 공간장에는 색욕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병근(病根)’이 뽑힌 후에 남아 있는 약간의 검은 기일뿐 아무 것도 아니다. 내 생명의 본질은 이미 근본적으로 돌파했고 정법의 기점에 서서 일체 구세력의 배치를 제거하고 있다. 정말로 파죽지세인데 그 무엇이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나는 또 생각했다. 일찍이 ‘삼서(三書)’를 썼고 또 사부님을 비방하고 법을 비방했으며 색의 잘못을 저지르고 병원에 입원했던 것 등등 모든 마난의 근본원인을 더는 자신의 몸에서 찾지 말아야 한다. 이는 구세력이 배치해서 억지로 더한 것이다. 만약 여전히 자신의 몸에 책임을 넘기거나 또는 자신을 비난하고 후회한다면 그럼 감독과 배우의 관계가 뒤집어진 것이 아닌가? 누가 배치했고 누가 강요했다면 그가 책임져야 한다. 정법이 최후에 이르렀으니 우리는 더 명확하게 구세력이 배치한 이 일체의 죄악을 볼 수 있고 정법의 기점에 서서 그것을 철저히 제거하자!
최근의 작은 깨달음이니 법에 있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부디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43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