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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 상자 이야기

글/ 산동제자 중생(重生)

【정견망】

열흘 전 남편과 장을 보러갔다가 물건을 다 산 후 막 집에 돌아오려는데 장터 입구에서 귤을 파는 상인이 있었다.

내가 가서 물어보았다.

“한 근에 얼마에요?”

“근으로 팔지 않고 상자로 팔아요.”

“한 상자에 얼만데요?”

“한 상자에 30위안입니다.”

“신가요?”

그러자 그가 차 안(차 안에 있는 귤과 상자에 든 귤은 다른 귤이다)에서 귤 하나를 꺼내오더니 과도로 잘라서 나더러 한 조각 맞을 보게 했다. 먹어보니 하나도 시지 않고 아주 달았다.

“그럼 한 상자 주세요.”

내가 30위안 진상화폐를 건네자 그 사람이 돈을 받으면서 말했다.

“6상자만 남아서 이건 밑지고 파는 거예요.”

귤을 사서 집에 돌아온 후 가장 좋은 6개를 골라 깨끗이 씻은 후 먼저 사부님께 바쳤다. 그리고 5개를 가져다 과도로 잘라보고는 멍해졌다. 귤안에 수분이라곤 전혀 없었고 속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조금 맛을 보자 아무 맛도 없었다. 이걸 어떻게 먹지? 또 하나를 집어서 잘라보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계속 하나씩 잘라보아도 여전히 마찬가지였고 5개 귤을 전부 잘라도 마찬가지라 먹을 수 없었다.

남편이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말했다.

“우리 그 사람을 한번 도와준 셈 쳐요. 아니면 그 사람도 이렇게 물건을 팔지 못했을 거고 손해를 보지 않았겠어요? 장사하기도 쉽지 않아요.”

나는 속으로 생각해보았다.

‘아마 그가 진상화폐에 적힌 진상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그래서 나한테 귤을 팔았을 거야. 먹을 수 없으면 버리지 뭐!’

이 일은 이렇게 지나갔고 나는 더 이상 이 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후 나머지 다른 귤들(차고에 보관하고 있었음)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먹을 수 없다고 여겨 그것을 더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며칠 후 한번은 남편과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와서 손 가는 대로 상자에 있던 귤 몇 개를 가져왔다. 집에서 그중 하나를 잘라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어째서 이렇게 완전히 변했지? 맛을 보니 아주 달았고 수분도 꽤 많았다.

나는 곧장 남편에게 가져가서 맛을 보게 했다.

남편이 말했다.

“이건 아주 좋은 귤인데! 정말 달아! 이거 당신이 처음에 가져왔던 그 귤이 맞아? 그때 나쁜 거만 골라왔던 거 아니야?”

“당신 아직도 절 몰라요, 저란 사람은 항상 좋은 것부터 먹잖아요? 또 사부님께 올리는 건데 어떻게 좋지 않은 걸 올릴 수 있겠어요?”

“그럼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지?”

“자비하신 사부님께서 제가 자비심이 나와 상인이 속인 걸 탓하지 않고 그의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한 것을 보셨을 거예요. 그래서 사부님께서 먹지 못하는 귤을 전부 가장 좋은 귤로 바꿔주신 거죠. 사부님의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이튿날 또 귤 8개를 가져와 맛을 보아도 여전히 좋았다. 이치상 슈퍼에서 파는 귤도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수분이 빠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내가 산 귤은 모두 최상품이었고 수분이 전혀 손실되지 않았으며 모두 아주 달았다. 이때 나는 사부님 법상 앞에 올린 그 귤이 생각났다. 빨리 가서 확인해 보니 역시 아주 좋았다. 처음 잘랐을 때 그런 상태가 전혀 아니었다. 내가 먹어보니 마음속까지 달콤했다.

자비하신 사부님께 정말 감사드린다. 제자가 대법에 부합하는 요만한 작은 일을 하자 곧 사부님께서 ‘표창’해 주신 것이다.

이 작은 일에서 나는 한 가지 법리를 깨달았다. 그것은 수련인이 그 어떤 일을 하든 늘 대법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해야 하며 곳곳에서 남을 위해 생각하고 이익에 관한 마음을 철저히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어떤 물건을 사든 고르지 말아야 하며 파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우리가 좋은 걸 골라 가면 좋지 않은 것만 남을 텐데 그럼 상인이 손해를 보지 않겠는가? 또 사람의 육안으로 일체를 다 똑똑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살 때는 분명히 가장 좋은 걸 골라도 만약 속인의 마음을 지녔다면 그럼 집에 돌아오면 좋지 않게 변할 수 있다(내게는 전에 이런 사례들이 있었다).

왜냐하면 수련인이 부딪히는 일체 일은 모두 우리의 심성제고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문제를 고려한다면 그럼 살 때 겉보기에는 좋지 않아도 어쩌면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대법을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속인과 정반대의 바른 이치[正理]에 따라 문제를 보아야 하며 어떤 일에 부딪히든 다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수련한 후에 발생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우리 수련인과 직접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정면(正面)적이라면 우리를 더 정진하게 할 수 있고 부면(負面)적이라면 이를 통해 우리의 심성을 제고하고 층차를 제고하게 할 수 있다.

이는 모두 좋은 일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방면의 법을 말씀해주신 적이 있지 않은가? 수련인이 부딪친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좋은 일이 아닌가? 모순이 없다면 어떻게 제고하겠는가? 우리는 마땅히 정확하게 모순을 대해야 하며 모순 속에서 자신을 제고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층차를 제고해서 최후에 원만에 도달해야 한다.

한 가지 작은 일에서 깨달은 체험이니 법에 있지 않은 곳이 있다면 여러분들의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46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