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천우(天宇)
【정견망】
어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외웠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수련의 길을 걷겠다고 생각하는, 이 의념(意念)이 움직이기만 하면 마치 금과 같이 빛나서 시방세계(十方世界)를 진동하기 때문이다.”(《전법륜》)
나는 깜짝 놀랐다. 원래 사람의 의념이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나는 많은 염두가 법에 부합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생각이 나올 때 법으로 가늠하지 못했다.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신이 문제를 봄에 그는 총체적으로 보고, 입체적으로 보나, 사람은 단지 표면상에서 본다. 어떤 때 대법제자가 내 곁에 있으면, 당신의 일사일념, 당신의 표현에 대해, 나는 아예 당신의 표면, 당신의 행위를 보지 않고, 나는 당신의 진정한 그 동기를 보며, 나는 당신의 진정한 사상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본다.”(《대법홍전25주년 뉴욕법회설법》)
사부님 법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대법은 바로 수련의 근본이며 우리의 염두가 법에 부합할 때라야만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선천의 본성은 법에 동화된 것으로 층층 아래로 내려오는 과정 중에 본성이 저층의 불순한 물질에 의해 끊임없이 뒤덮였기 때문에 우리가 삼계라는 이 미혹의 공간에 내려오면 신체는 이미 아주 많은 불순하고 변이된 우주중의 패괴(敗壞)된 물질을 지니게 되는데 우리가 수련이란 이런 염두를 움직이기만 하면 곧 사부님과 연을 맺는 것으로 바로 우리가 사부님과 맺은 서약을 실천해 조사정법(助師正法)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요시공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컨대 지구에 미국이 있고 워싱턴이 있어 그의 장 중에도 미국이 비쳐 나오고 워싱턴이 비쳐 나오지만, 그것은 그림자(影子)이다. 그렇지만 그림자 역시 일종의 물질존재로서 그것은 대응하여 비쳐온 관계며, 저쪽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말하는 요시공능이란 바로 그 자신의 공간장(空間場) 범위 내의 것을 보는 것이다.”
사부님 법에서 깨달은 것은 우리가 신변에서 부딪치는 일은 자신의 공간장이 사람이란 이 표층공간에 반영된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 3》〈유럽법회에 보냄〉에서 “당신은 정말 누구를 위해 수련하고 있는지를 모른단 말인가? 당신은 이 내키지 않는 일이 당신의 수련을 도와주고, 당신의 사람 마음을 제거하고, 당신의 집착을 제거하고 있다는 것을 정말 모른단 말인가? 당신이 수련하는 그날부터 시작해서, 인생의 길이 수련의 길로 개변된 것이 아닌가? 당신이 마주친 일체는 모두 우연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당신은 신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씀하셨다.
사부님의 법은 나로 하여금 수련의 엄숙성을 깨닫게 했다. 어느 정도로 엄숙해야 하는가 하면 당신의 일사일념(一思一念)이 모두 법에 있어야 하고, 이 어지럽고 혼란한 세상에서 근본을 지키고 대법을 지켜야 하며, 어지러운 현상에 흔들리지 말고 마음이 고요한 물과 같아야(心如止水) 한다. 아마 이런 상태라야만 비로소 당신이 법에 동화된 그 한 층의 체현일 것이다.
구우주는 끊임없이 해체되고 있고 신우주는 구도할 생명을 선별하고 있는 이 특수한 역사시기에 대법제자는 사부님과 동행하며 대법 속에서 끊임없이 정화되고 순정해지는 과정이 바로 대법제자의 사명을 실천하는 여정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떻게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을 잘하고 어떻게 자신을 잘 닦아 법으로 시시각각 자신을 대조할 것인가는 구우주를 따라 해체되려는 천상(天象)과 여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각종 어지러운 현상을 보면서 대법제자가 어떻게 법을 지키고 어지러운 현상에 이끌리지 않으며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흐름을 거슬러 거짓말에 몽폐된 세인을 구할 수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부동심(不動心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란 어떤 상태인가? 현 단계에서 나의 깨달음은 ‘부동심’이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다. 우리는 조사구인(助師救人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함)의 사명을 짊어지고 사부님께서 거대한 대가로 연장하신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현재 더욱 시간이 빨라짐을 느끼는데 나의 깨달음은 바로 첫째 정법노정이 더 가속화되었고 둘째는 사부님의 가지 하에 대법제자의 층차 돌파가 더 빨라졌다는 것이다.
시간은 신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말해서 시간이 더 빨라진다고 느낄수록 대법제자에 대한 법의 요구는 더욱 높고 더욱 엄격해진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의 한 가지 염두가 수련 경지를 체현할 수 있는데 현 단계에서 우리는 아직 사람 속에 있고, 사람 속에는 곧 저층의 변이된 물질이 존재하며 이런 변이된 물질은 각종 방면에서 체현된다. 그것들은 우주에서 도태될 생명들이며 그것들의 변이된 사상과 패괴된 물질이 대법에 대한 교란요소를 구성했는데, 극단적인 사(私)가 그것들을 대법에 순응하지 못하게 했고 변이된 사유방식이 대법에 교란을 가져다주었다. 그것들은 도태되지 않고 해체되지 않으려 하지만 정법(正法)에는 표준이 있는 것으로 우주 중의 일체생명은 모두 그 속에 있다.
그러므로 대법제자가 직면한 어지러운 세상과 어지러운 현상들 및 온갖 다양한 교란은 우연이 아니다. 마치 이번 온역(瘟疫)과 같은데 사실 온역의 출현은 사람에게 주는 하나의 경고이다. 중공사당을 선택한 그런 세인들에게 중공사당의 사악한 본성을 똑똑히 보여주고 그것의 사당 조직(공산당 공청단 소선대)에서 탈퇴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온역이 당신을 멀리 피해가는데 왜냐하면 온역이 도태시키려는 대상은 중공사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온역에 대한 방역조치 중에서 중공사당은 또 한 차례 사악한 본성을 폭로했고 극단적이고 비인도적인 방역조치는 무수한 가정참사를 만들어냈으며, 대륙에서 살아가는 민중들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간 양처럼 중공의 손아귀에 목숨을 맡긴 것과 같다.
수련인은 중공사당의 사악한 목적을 간파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생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는 중공사당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령(邪靈)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배후에서 조종하는 공산사령 그것은 바로 사람을 훼멸하고 사람을 해치는 것으로 각종 수단을 동원해 사람을 해치고 사람을 훼멸하는 목적에 도달하려고 생각한다.
반면,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사람을 구하는 고덕대법(高德大法)으로 진선인(真善忍) 우주법리는 사람을 사령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으며 대법제자는 사람을 도탄에서 구하는 사자(使者)이다. 우리의 수련상태 역시 마찬가지로 사람을 구하는 힘으로 체현될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2015년 뉴욕법회설법》에서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제외하고 당신이 해야 할 것은 없으며, 이 세상에서 당신이 해야 할 것은 없다.”라고 하셨다.
때로 사상 속에 대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괴상한 염두들이 나의 공간장에 머무르는데, 나 자신도 잘 모르고 때로는 연공할 때 일부 염두가 나타난다. 내 생각에 연공이 입정(入靜)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이는 사법(邪法)을 연마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이런 염두를 원하지 말아야 하며 자신에게 염두를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또 연공음악을 들으면서 가급적 자신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자신에게 왜 이런 염두가 나왔는지 회상해보았다.
첫째는 자신의 정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념이 부족한 원인은 법공부가 부족해서 대법으로 깨끗이 청리하지 못한 곳이 있어서 잡념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자신을 돌아볼 때 이런 괴상한 염두들이 마치 아주 오랫동안 쌓인 잡물(雜物)임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서로 다른 시기에 생겨난 것으로 오랫동안 쌓아둔 곰팡내를 발산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수련상태 때문에 이런 잡물들이 건드려지지 않고 청리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들은 아직 바로 잡지 못한 나의 공간장에 존재하는데 정법홍세(正法洪勢)가 그것들을 건드릴 때가 되자 그것이 곧 뛰쳐나와 움직이는데 바로 해체되기 전의 반항이다. 표면에 체현되어 나오는 것은 바로 사상 중에 수시로 난잡한 생각들이 다시 나오는 것이다.
때로는 또 이런 생각에 좌우되어 피동적으로 된다. 끊임없이 법을 공부함에 따라 점차적으로 실질을 똑똑히 볼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일체 표상은 다 허환(虛幻)이다. 우리가 단지 이런 표상 속에서 미혹되지 않고 근본을 지키면서 대법제자의 사명을 망각하지 않는다면 그럼 곧 법 속에 있는 것이다.
둘째는 진정으로 ‘진아(真我)’와 ‘가아(假我)’를 구별하지 못하고 단지 아주 얕은 층차의 인식에 있었다. 수련이란 끊임없이 승화하는 동시에 당신의 지혜와 오성 역시 따라 올라가야 한다. 비유하자면 지금 전자제품이 아주 빨리 업데이트되는데 당신이 최신제품을 사용하자면 이 제품에 대한 한 세트의 조작방법이 있다. 만약 당신이 과거 제품의 조작방법으로 최신제품을 사용하려 한다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완수할 수 없다.
셋째로 이런 좋지 않은 사상이 나타난 근원은 바로 ‘정(情)’이다
사부님께서는 “정이란 불안정한 담장 위의 풀”(《홍음 6》〈몇 사람이나 행운인가〉)이라고 하셨다.
사부님의 법에 대조해 자신을 보니 삼계의 정에 잠겨 좀 마비되었고 수련이 처음 상태와 같지 않았다. 표면신체의 세포도 정에 이끌려 허환(虛幻)속의 거짓 현실에 집착했으며 득과 실 속에서 배회했다. 이는 바로 마음이 바르지 못해 초래한 변이된 관념이다. 대법은 우주의 근본대법으로 불변부동(不變不動)하고 영원한 것이다. 반면 이렇게 속박되고 흔들리는 나의 상태는 바로 저 담장 위의 풀처럼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것이다. 우리가 법에 있을 수 있을 때라야만 비로소 근본을 지킬 수 있다.
작은 깨달음이니 법에 있지 않은 곳이 있다면 여러분들의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586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