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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찾는 자체가 바로 하나의 집착

글/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어느 날 두 다리와 발에 부종이 생겼는데 특히 두 발목 부근의 피부가 터질 것처럼 견디기 힘들었다. 오후에 퇴근한 후 나는 곧장 길을 걸어가면서 사부님의 광주(廣州)설법을 들었다. 설법을 듣는 과정에 머릿속에 난잡한 염두들이 밖으로 튀어나왔고 나는 있는 힘껏 그것들을 배척하면서 집중해서 법을 들었는데 이 과정이 몹시 힘들었다.

어느 사거리에서 신호등을 기다릴 때 나는 똑바로 서서 큰 소리로 사부님의 법을 따라 외웠다.

“나는 리훙쯔(李洪志)의 제자이다. 다른 배치는 다 필요 없고, 모두 승인하지 않겠다.”[1]

그리고 계속 앞으로 가는데 사거리를 지나자 문득 두 다리가 아주 가벼워진 걸 느꼈다. 나는 이것이 방금 내보낸 견정한 염두가 법에 부합했기 때문임을 알았다.

이튿날 두 다리가 아직도 좀 부어있었다. 나는 계속 안으로 찾았다. 최근에 직장에 새로 온 신입사원이 이직 수속도 마치지 않고 갑자기 출근하지 않았고 또 그가 컴퓨터에서 했던 작업을 모두 삭제해버렸다. 사장님이 이를 알고는 몹시 화를 내면서 조회에서 일부 기분 나쁜 말들을 했다. 나는 비록 사건의 전모는 잘 몰랐지만 사장님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좀 고소한 감정이 올라왔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누가 당신더러 평소 직원들 앞에서 뒷담화를 하라고 했는가!’

하지만 나는 이것은 남이 재앙에 빠진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임을 알았다. 대법 수련인으로서 말하자면 이는 틀려도 너무나 틀린 것이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실망하고 힘들어하며 남이 잘 안 되는 것을 보면 도리어 기뻐하는데, 남의 재앙을 기쁘게 여기는 심층의 원인은 바로 질투심이 아닌가!

이에 나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그의 무엇을 질투하느냐? 그에게 집이 있고 차가 있는 것을 질투하는가? 가정이 행복한 것을 질투하는가? 말을 잘하는 것을 질투하는가?”

대답은 “그게 아니다. 다 아니다. 바로 그가 나 자신이 설정한 좋은 사람의 표준에 부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였다.

이 대답에 나 자신마저도 깜짝 놀랐다. 나는 속으로 사부님의 법을 외웠다.

“수련이란, 바로 자신을 수련하는 것인데, 사실 바로 이러한 일이다.”[2]

나는 어찌하여 남을 수련시키려 하는가? 아울러 대법제자가 하는 일체는 다 법을 실증하기 위한 것인데 나의 이런 생각과 방법은 분명히 자신을 실증하는 것이 아닌가!

한편으로 나는 자신이 남보다 일을 잘하고 일을 빠르게 한다고 여겨왔는데 아울러 자신이 이 분야에서 다년간 종사했기 때문에 신입사원보다 경험이 많다고 여겼다. 하지만 동료들이나 사장님은 내게 마땅히 있어야 할 호평과 좋은 대우를 해주지 않았고 이에 속으로 평형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또 한편 남이 나에게 잘해주고 아주 친근할 때면 나는 그들이 또 나를 이용하려 한다고 생각하면서 기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들에게 큰 반감을 품었다.

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두 자아(自我)였다! 그러나 마음을 조용히 하고 자신이 법을 실증하는 것과 자신을 실증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하게 하면 나는 오히려 대법을 선택하고 자아를 내려놓는 것이 아주 행복한 일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왜 일단 현실 속에 들어오기만 하면 자신도 모르게 피동적으로 자신을 실증하는 것에 끌려가는가? 대체 어떤 물건이 이렇게 강하고 뜻밖에도 나를 흐리멍덩하게 멋대로 끌고 가는가?

생각해보고 찾아보았으며 또 찾아보고 생각해보았다. 결국 나는 이는 당문화(黨文化)의 물건임을 발견했다. 그러나 당문화의 물건도 아주 많아서 거짓, 사악, 투쟁, 색정, 도박, 마약 등이 모두 당문화다. 아울러 상세히 분석하자면 매 하나의 당문화 속에 또 이런 것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복잡다단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느 한 점은 거짓이 조성한 것이고 어느 한 점은 또 사악이 조성한 것인데 경계를 나누기가 아주 어렵다. 아울러 하나하나 제거하자면 어느 때에야 깨끗이 제거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업무환경 속에서 수시로 당문화 분위기 속에 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여전히 오염될 수 있고 이렇게 한다면 대체 언제 대법의 순정(純淨)한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아무런 희망이나 도움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왜 나는 스스로 법리를 바르게 깨달아 실천할 수 없을까 하고 고뇌했다.

이때 갑자기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한 단락 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누구도 나를 알아낼 수 없으며, 누구도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아낼 수 없다. 그들이 나의 사상활동을 요해(了解)하고자 했기에, 그들은 나의 동의를 거쳐서, 어느 한 단계 나의 사상을 그들과 연결했다.”[3]

나는 활연히 깨달았다. 이런 상태가 나타난 이유는 내가 동의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비로소 나를 교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나의 이런 동의는 명확하게 “어, 좋아, 그래 등등이 아니라 내가 남이 좋게 변하는 것에 집착한 것으로 밖으로 찾은 것이다. 옳다! 이 집착은 바로 밖으로 찾음이다.”

나는 곧 이 ‘밖으로 찾음(向外找)’을 ‘안으로 찾음(向內找)’으로 바로잡았다. 그러자 즉각 주위 환경이 아주 화평해졌고 사나운 기로 그렇게 가득차지 않음을 느꼈다.

주:
[1] 리훙쯔 사부님 저작:《2003년 정월대보름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각지설법 10》<따지웬회의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전법륜》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6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