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천우(天宇)
【정견망】
‘위타(爲他)’의 일념은 수련경계의 체현이다. 당신의 첫 일념이 남을 고려할 때 뒤이어 당신의 염두가 나온다면 당신은 구우주(舊宇宙)의 한 층 껍질을 벗어난 것이다. 동시에 신우주(新宇宙)로 한걸음 진보한 것이다. 우리는 속세에서 윤회전전전하고 또 진상을 볼 수 없는 이 미혹의 공간 속에 있다. 이 삼계 내의 일체는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모두 허환(虛幻)하고 부실(不實)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경문 《진수》에서 “당신들이 비할 바 없이 아름답고도 성결(聖潔)한 세계에서 떨어져 내려오게 된 것은, 당신들이 그 층차 중에서 집착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비교해 보면 가장 더러운 세계에 떨어지고서도 당신들은 재빨리 되돌아 수련하지 않고, 오히려 또 더러운 세계 속의 그런 더러운 것들을 붙안고 놓지 않으며, 심지어 조금만 손해를 보아도 고통스러워 어쩔 줄 모른다.”[1]라고 하셨다.
사부님의 설법은 나로 하여금 우리가 성결한 우주 천체에서 우주 가장 중심의 ‘지구’라는 이 미혹의 공간속으로 떨어져온 것임을 체오하게 했는데 사람의 일사일념(一思一念)은 모두 그의 상태의 좋고 나쁨을 체현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전 우주의 바르지 못한 일체를 바로잡고 계시는데 구우주 성주괴멸의 우주법칙은 흠결이 있고 불완전한 것이다. 때문에 비로소 구우주의 변이된 요소가 나타났다.
사부님께서는 구우주가 변이된 근본을 보셨고 미래 우주의 원용불파(圓容不破)를 위해 신우주를 새로 만드셨다. 사부님께서 전하신 파룬따파가 바로 신우주의 표준이며, 우주 중의 만사만물은 모두 그 속에 있으며, 모두 대법에 동화해야만 비로소 신우주로 진입할 수 있다.
구우주와 신우주의 근본요소는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구우주의 특성은 ‘위사위아(爲私爲我)’다. 사부님께서 육성하신 신우주는 ‘무사무아(無私無我)’하고 완전히 위타한 것이다.
때로 법을 공부할 때 나는 이 방면에서 깨달은 것이 그리 분명하지 않았다. 단지 표층에서만 이해하고 진정한 내함은 여전히 뚜렷하지 않았다. 왜 위타해야 하는가? 우리는 곧바로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하면 되는 것인데 어떻게 ‘무사무아(無私無我)’로 수련 성취할 수 있는가!
이 한 점에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방황했다. 마치 그 껍질을 늘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끊임없는 법공부와 동수의 교류문장을 보면서 나는 마치 약간 호전되는 것 같았는데 어느 날 발정념을 할 때 머릿속에 ‘위타’에 대해 약간의 체오가 생겼다.
‘위타(爲他)’와 ‘위사(爲私)’는 신우주와 구우주의 근본적인 구별이다. 사부님의 정법은 구주우의 변이된 일체를 바로잡는 것으로, 대법제자가 대법 중에서 수련함은 다시 말해 끊임없이 구우주의 변이요소를 벗겨내 점차적으로 신우주의 표준에 동화하는 것이다. 이 과정이 바로 끊임없이 자신을 성취시키는 수련과정이다.
사부님께서는 《2013년 미국서부국제법회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인체가 소우주라고 말하는데 여러분 생각해 보라. 사람의 대뇌 속에는 얼마나 많은 세포가 있는가? 세포는 얼마나 많은 분자로 구성된 것인가? 대뇌 속의 이 분자들은 얼마나 많은 더욱 미시적인 입자로 구성된 것인가? 매 미시입자의 공간 중에서의 위치는 사람의 눈으로 천체를 보는 것과 같다. 다들 모두 밖을 향해 보는데, 이 대우주 매 성구 위에는 모두 생명이 있다. 그것은 단지 이 표면공간에 있지 않아서 당신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2]
사부님의 법은 나를 명백하게 했다. 원래 사상내원은 때로 진정한 자신이 아니다. 만약 인체가 하나의 소우주라고 한다면 그럼 우리 공간장에는 얼마나 많은 우주체계가 있는가? 무량무계(無量無計)하다. 그렇다면 이 무량무계한 천체우주에는 또 얼마나 많은 세포조직이 있겠는가? 사실상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렇다면 이렇게 복잡한 인체에는 또 종횡으로 교차된 조직구조가 있으니 우리 인체 표면의 사상내원은 더 복잡하진 않겠는가? 나는 때로 자신도 모르게 환상(幻想)의 방식을 작동하는데 이 비현실적인 사상을 제멋대로 놔두면 자신의 공간장은 마치 실 끊어진 연처럼 바람에 따라 표류하게 된다.
지금 보자면 이런 소위 자신의 생각은 모두 부동한 공간의 변이된 관념의 산물이다. 오직 당신의 수련층차와 수련상태가 전개되어 나옴에 따라 우리가 전에 생각했던 염두를 한번 되돌아본다면, 당신은 이런 염두에 모두 하나의 주선(主線)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이 주선은 마치 한 그루 나무처럼 줄기가 바로 그 염두의 주선이고 가지는 주선에서 자라난 것이다. 마치 부동한 층차의 공간장처럼 나뭇잎은 가지 위에서 생겨난 것인데, 그것의 존재가 마치 부동한 층차의 공간장 속에 있는 것처럼 각종 변이요소를 자생(滋生)해낸다. 이렇게 하면 곧 똑똑히 볼 수 있는데 원래 우리의 일부 염두는 모두 ‘사(私)’를 둘러싸고 돌아가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구우주의 특성인 ‘위사위아(爲私爲我)’다.
사(私)가 있기 때문에 점자 이 군체(群體) 중에서 곧 보다 좋지 않은 마음을 만들어낸다. ‘사(私)’를 기점으로 하기 때문에 곧 해체와 도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구우주의 법칙이 바로 성주괴멸(成住壞滅)이기 때문이다.
수련에서 체현되는 것은 바로 수련에서 모순에 봉착하거나 혹은 마난에 빠져 걸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이때가 바로 당신이 법에 대해 진실로 믿는지 검증하는 것으로 당신이 내보낸 염두가 ‘위아(爲我)’인지 아니면 ‘위타(爲他)’인가 본다. 나의 체오(體悟)는 바로 당신이 어떻게 선택하고 어떻게 법으로 가늠하는가 보고 법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무아(無我)’란 법(法) 속에 용해된 체현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자신의 득실을 중시하지 않고 자신의 감수를 중시하지 않을 때 당신이 바로 법속에 있고, 당신이 법의 기점 위에 서있다면 당신은 신우주 ‘무사무아’의 표준에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사무아’에 도달할 수 있는가?
나의 체오는 먼저 ‘무사무아’와 ‘위사위아’를 똑똑히 갈라야 하는데 어떻게 똑똑히 가르는가? 전제는 법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자신이 진정으로 법속에 용해되어야만 한다. 당신이 진정으로 법에 서 있을 수 있다면 당신은 곧 ‘위사(爲私)’한 물질은 아주 협소하고 국한되어 있으며 사(私)의 기초위에 기점이 있는 것임을 똑똑히 보아낼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이 자신을 ‘위사’의 틀 안에 설정했기 때문에 당신이 이 ‘위사’로 구성된 틀 속에 있다면 갈수록 길이 더 좁아질 것이다. 마치 당신의 지혜와 당신의 능력이 모두 제약을 받아 발휘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기점이 틀렸기 때문이다. 마치 건물을 짓는 것처럼 건물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면 이 건물을 반드시 잘 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건물의 감당능력이 안되고 이 사(私)는 우주 중에서 정화해야 할 요소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의 염두가 ‘위타(爲他)’하다면 그럼 이 사상은 우주표준에 부합한 것으로 우주특성에 순응한 것이다. 우리는 “불법무변(佛法無邊)”[3]임을 아는데 만약 우리의 사상이 우주표준에 부합한다면 그럼 우리는 곧 법속에 있는 것이고 법속의 생명은 법에 의해 가지(加持)되어 마찬가지로 법의 위력과 법이 부여한 지혜와 능력을 구비한다.
‘위타’는 우리 선천의 본성으로 당신의 사상염두가 ‘위타’일 때 이때 당신의 수련이 잘된 그 면이 미혹되지 않고 우주특성과 소통한다.
‘위사(爲私)’는 우주특성과 어긋난 것이라, 당신이 ‘위타(爲他)’의 선념을 드러내려 할 때가 되면 구주우 상생상극의 이치가 뛰쳐나와 저지할 것이다. 체현되어 나오는 것은 모종의 일 속에서 당신이 늘 ‘위사’와 ‘위아’ 속에 뒤엉키는데 다른 공간에서는 바로 한차례 정사대전(正邪大戰)이다. 이때 바로 당신이 법에 동화하려 하는지 아니면 사(私)를 수호하는지 본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대법제자가 어떤 일을 할 때, 모두 법(法)을 가장 크게 보아야 하며, 무슨 일을 처리할 때에도 당신은 모두 우선 법을 생각해야 한다. 여러분이 기억하다시피, 나는 늘 당신들에게 한마디 하는데, 대법제자는 어떤 일을 함에 모두 우선 다른 사람을 고려해야 한다. 매번 한 사건이 발생하거나 일종의 정황이 나타날 때, 설사 작은 일일지라도 나의 첫 일념(一念)은 우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 다른 사람을 우선해 생각하는 것은 이미 자연스러운 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4]
사부님의 설법은 나를 깨어나게 했고 나의 오성이 좀 제고되게 했다. 인체는 소우주(小宇宙)이고 우주의 운행법칙은 진선인(真・善・忍) 근본특성에 따라 운행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육성하신 신우주는 ‘무사무아(無私無我)’한 것으로 그럼 우리 인체라는 이 소우주가 장차 끊임없이 법속에서 동화해야만 신우주로 진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세상 주체(主體)의 일사일념(一思一念) 역시 신우주의 표준에 부합해야 하는데 그럼 곧 ‘위타(爲他)’해야 한다.
‘위타’는 또 일종 자비심의 체현이다. 우리는 부모가 자식을 애호하는 것을 아는데 종종 한 가지 일에서 첫 일념이 바로 자식을 생각하는 것이다. 오직 자식에게 좋기만 하면 부모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체라는 소우주 속에는 얼마나 많은 우리의 친인을 싣고 있겠는가!
미혹속의 우리에게는 미혹을 깨는 법보(法寶)가 있으니 바로 대법(大法)이다. 법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조사정법하고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함을 깨달을 수 있는데 그속에는 자기 세계의 운운중생을 포함한다. 이는 마치 망망한 큰 바다위에 있는 것과 같은데 사부님의 대법은 바로 항로의 표지가 되고 무수한 대법제자는 큰 바다 위에서 출항한 범선(帆船)이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끝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범선들이 바다 위를 항해하는데 사부님께서 이끄는 항로표지에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만약 당신이 사부님께서 이끄는 항로에서 벗어난다면 그럼 당신은 길을 잃고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당신의 사(私) 때문에 당신이 대법에 동화되는 것을 저애하지 말아야 하는데, 당신의 사 때문에 당신 천체의 중생들이 도태에 직면했다. 당신의 사 때문에 당신은 선천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고, 당신의 사 때문에 당신은 중생의 기대를 저버리게 되었다.
약간의 작은 체오(體悟)이니 법에 있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주:
[1]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진수〉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2013년 미국서부국제법회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설법》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2002년 보스턴법회설법》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64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