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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스승으로 삼다’에 대한 작은 깨달음

글/ 중국 대법제자 소은룡(小銀龍)

【정견망】

최근 몹시 뒤엉킨 일을 만나 나로 하여금 곤란한 경지에 처하게 했다.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생각해보았으니 그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일이 아주 촉급해서 고민할 시간도 많지 않았고 정말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이 들었다.

이때 나는 전에 내가 썼던 교류 체회를 떠올렸다. 바로 사부님의 법(法)은 마치 큰 바다의 항로표지와 같아서 천만의 대법도(大法徒)들이 파도를 헤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항로를 이끄신다는 내용이다.

나는 자신에게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어야 하며 법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고 일깨웠다. 그러나 내가 법을 볼 때면 사부님의 법리(法理)에서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한다고 깨닫지만 그러나 현실로 돌아가면 사람마음이 올라왔다. 각종 이유를 찾아 자신의 사람관념이 옳다고 설득하는데 그러나 사람의 방법은 또 길이 통하지 않고 곧 이곳에 가로막힌다.

그것은 바로 ‘위아(爲我)’와 ‘무아(無我)’ 중의 선택이다! 법리상으로는 마땅히 ‘무아’를 선택해야 함을 알지만 그러나 ‘무아’가 막 두각을 나타날 때면 ‘위아’가 곧장 아주 설득력 있는 구실을 들고 나타나 ‘무아’의 출현을 억누른다. 수련상태에서 체현되는 것은 바로 마음이 답답하고 고민하며 모순에 빠지거나 또는 일부 소극적으로 자신이 법리상의 인식을 확신하지 못하게 한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수련 성취한 각자(覺者)라면 어떻게 할까? 대답은 수련 성취한 각자의 첫 일념은 중생이 구도 받는 것을 고려하고 법을 크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또 물어보았다.

‘네가 중생을 위한다고 하지만 지금의 아주 많은 세인들은 종종 도덕의 최저선마저도 없다. 우리 대법제자 역시 자신이 처한 환경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대답은 당신의 정념(正念)이 좋지 않은 사상을 지닌 사람에 대해 대법을 선하게 대하고 대법에 죄를 짓지 않게 해야 하는데 이 역시 다른 방식으로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정념으로 사악의 요소를 해체할 수 있다면 그럼 당신이 자신의 위덕(威德)을 세울 수 있다.

여기까지 쓰자 나는 마치 좀 정확한 답안을 얻은 것 같았다. 그것은 바로 소위 고민스런 일이란 사실 우리 마음을 겨냥한 것이다. 고민처럼 보이는 이 일이 당신 신변에 나타났을 때 당신이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 일에서 법으로 자신을 가늠해 보았는가? 어디에 자신이 발견하지 못하거나 또는 내려놓지 못한 것이 있는 게 아닌가?

이때 나는 사(私)를 보았고 구우주의 변이요소를 보았는데 그것의 주선은 ‘자아(自我)’를 중심으로 하고 ‘위아(爲我)’를 목표로 삼아 전반 사람을 사(私)의 바다 속에서 발버둥치게 했다.

수련인에겐 명백한 일면(一面)이 있어서 당신의 사람마음이 적어질 때면 수련이 잘된 그 면이 당신의 정념을 주재한다. 여기까지 깨달았을 때 나는 마치 좀 명백해진 것 같았다. 바로 내가 어느 사건 속에 빠져있을 때 이 일의 표면현상을 보지 말아야 하며 이 일의 표상을 통과해서 자신이 어느 기점에 서서 대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만약 사람의 관념을 사용하고 사람의 방식을 고려한다면 그럼 곧 일속에 빠진 것이다. 정반대로 당신이 법의 기점에 서서 가늠할 수 있다면 바로잡힌다. 그럼 당신은 곧 법속에 있는 것으로 만약 당신의 사상과 행위가 법에 부합한다면 그럼 우주 진선인(真善忍) 특성에 순응할 것이고 당신이 직면한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는 일이 우주의 운행기제 하에서 곧 원용하고 해결될 것이다.

당신이 소위 일속에서 고뇌할 때면 자신의 사(私)가 건드려지고 해체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는 “당신이 수련인이 되었기 때문에 당신이 비로소 만나는 것이고, 당신이 수련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은 무릇 정면적인 반응이든 부면적인 반응이든 모두 좋은 일이다. (열렬한 박수)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이 수련하고 있는 이 길에서, 당신의 제고를 위해 준비한 것이기 때문이다.”[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사부님의 설법과 대조해 자신이 기점(基點)을 바로 놓지 못한 것을 찾아냈는데 가장 먼저 눈앞에 발생한 일을 아주 고뇌하고 고민스럽고 번거로운 일로 여겼다. 이는 모두 부면(負面)적인 물질요소다. 사실 일이 나타난 것은 감춰져서 발각되지 않는 그런 좋지 않은 물질을 폭로하고 이를 통해 법으로 대조해 자신의 부족을 바로 잡고 대법으로 오염된 물질을 깨끗이 씻어내 자신의 공간장(空間場)을 정화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사람의 관념으로 생각했으니 이것이 바로 이끌린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과거에 수련인은 “좋고 나쁨은 사람의 일념에서 나온다.”라고 말했다”[2]고 하셨다.

만약 내가 부딪힌 일을 번거롭고 고민스럽다고 여긴다면 그럼 이런 바르지 않은 염두는 곧 번거로움과 고민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이는 자신의 바르지 못한 사상이 유발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正)과 부(負)의 선택에서 나의 첫 일념은 부면적인 사유가 되며 법에 있지 않은 것이다.

이를 깨달았을 때 나는 곧 이 바르지 않은 염두를 바로잡았고 이런 부면사유는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진정한 사상내원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형성된 변이관념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구세력의 변이된 배치를 부정하는 것이자 또한 법을 원용하는 체현이다.

때로 생각해보면 우리 수련인은 사람에서 뛰쳐나와 신(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어떻게 뛰쳐나오고 어떻게 걸어가는가에 대해 나는 좀 명백하지 않았다. 오늘 교류 체회를 쓰면서 자신에게 약간의 감촉이 있었다. 나의 체오(體悟)는 우리가 법에서 승화해 올라갈 수 있을 때는 바로 그 한 층차의 법이 가지(加持)한 결과다.

그러나 수련이란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은 사부에게 달려”[3]있으니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수련해서 선을 향하는 그 마음을 원하시고, 우리가 법속에서 정념정행(正念正行)하길 원하신다. 우리가 정(正)과 부(負), 선(善)과 악(惡)의 선택에 직면했을 때가 바로 사부님과 법에 대한 우리의 견정한 믿음 정도를 고험하는 것이다. 하나의 선이 당신을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이 되게 할 수 있고, 하나의 부면사유가 당신을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지게 할 수 있다.

사실 가장 근본은 법(法)이다. 우리가 오직 법 위에 있어야지만 비로소 조사정법(助師正法)의 길을 바르게 걸어갈 수 있다. 때문에 신사신법(信師信法)은 우리 수련의 근본적인 보증이다. 한 생명은 대법이 육성한 것인데, 물론 한 생명 역시 마찬가지로 대법 속에서 자신을 성취하는데, 당신이 진정으로 법속에 용해될 때 그것만이 진정한 신사신법의 체현이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대법제자로서는 속인의 마음이 있는 게 두렵지 않다. 관건은 어떻게 자신의 정념을 수립할 수 있는지 하는 것인데, 만약 당신의 정념이 매우 강하여 시시각각 수련인답다면, 혹은 시시각각은 아니더라도 당신이 만나는 일부 일들에서 대법제자다울 수 있다면, 당신은 바로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되고, 당신은 바로 신적(神跡)을 나타낼 것이며, 당신은 특수한 표현이 있고, 당신은 시비를 분별할 수 있을 것이며, 당신은 일체를 잘할 수 있을 것이다.”[4]

현(現) 단계에서 작은 수련 체회(體會)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여러분들의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주:
[1] 리훙쯔 사부님 저작:《2014년 샌프란시스코법회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2004년 미국서부법회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전법륜》
[4] 리훙쯔 사부님 저작:《2004년 미국서부법회설법》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6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