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향(劉香)
【정견망】
나는 96년 법을 얻었고 법을 얻은 후 정력이 충만해지고 온몸이 가벼워져서 병이 없어졌다. 나는 다른 한 동수와 함께 매일 3시가 좀 넘으면 삼륜차로 큰 녹음기를 싣고 우리 시(市)에서 가장 큰 광장에 나가 연공을 했다. 날이 밝아지면 사면팔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연공음악이 울리면 시끄러운 소리가 일순간에 조용해지면서 마치 부대처럼 신속하게 대열을 갖추고 상화(祥和)한 음악을 들으며 연공을 시작한다. 그때는 사람이 아주 많아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장면은 얼마나 장관이고 또 상화했는지 모른다.
1. 처음 북경에 가서 법을 실증하다
7월 20일 당일 나는 전처럼 광장에 나와 연공했다. 막 포륜(抱輪)을 할 때 한 동수가 급히 달려와 어제 저녁 몇몇 보도원들이 잡혀갔고 상부의 명령이며 우리를 X교로 공격한다고 했다. 우리는 깜짝 놀랐다. 이렇게 좋은 공법이 누가 어떻게 말한다고 해서 그렇게 된단 말인가? 연공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아야 하는가? 우리 북경에 가서 상황을 반영하고 공정한 도리를 말해보자.
우리 십여 명은 두 대의 차를 세냈다. 중간에 패주(霸州)시에서 가로막혔는데 한 동수의 지혜로운 말로 넘어갔다. “우리는 성도(成都)에 여행하러 갑니다.”
원래 우리 동수 중 한 명이 옷과 모자를 팔았는데 출발할 때 모두 여행 모자를 쓰고 왔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무사히 북경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졌고 또 가랑비가 내렸으며 먹구름이 두터웠다. 그때는 발정념을 몰랐고 나는 그저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의 말을 했다.
“먹구름아 빨리 흩어져라, 비야 그쳐라,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했고 사부님께선 결백하시다. 우리는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잠시 후 먹구름이 정말 흩어졌고 비도 줄어들었다. 우리는 어느 직장을 찾았는데 무슨 공장 대문 문동(門洞)에서 밤을 보냈다. 축축한 가운데 매 사람마다 두 장의 신문(올 때 어떤 이유 때문인지 내가 신문 한 뭉치를 가져왔다.)을 가졌다. 이렇게 하루를 묵고 새벽에 간단히 먹은 후 우리는 곧장 천안문 광장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따라오는 동수가 한 노인을 보고는 사부님께서 오셨다고 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우리는 아는데 그 노인이 바로 사부님이셨다. 사부님께서는 줄곧 우리를 따라다니셨던 것이다.
청원을 담당하는 신방판(信訪辦)에 가니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물샐 틈도 없었다. 근본적으로 무슨 말을 할 수 없었는데 누가 당신의 말을 들어주겠는가! 본래 이 사람들은 밀어낼 수 없었는데 전국 각지의 동수들이 여전히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경찰은 동수들을 한 대 한 대 차에 실어 북경체육관으로 운반했다.
체육관 역시 각지 동수들로 가득했고 우리의 호소는 들어주지 않았다. 우리는 곧 《논어》를 외우고 《홍음》을 외웠다. 내가 한 구절 외우면 동수들이 다음 구절을 이어서 외웠고 내가 외우다 지치면 다른 동수가 이어서 외웠다. 그 장면은 천지를 놀라게 했고 그 소리는 산하(山河)를 진동시켰다! 내가 화장실에 가려고 하자 경찰이 말했다.
“당신은 너무 크게 소리를 질렀으니 갈 수 없다.”
정말로 사악했다! 누가 주소를 말했는지 이튿날 우리 지역 경찰이 와서 우리를 데려갔다.
나는 곧장 직장으로 송환되어 창고에 갇혔다. 창고는 아주 더러워서 모기가 윙윙거리며 온몸에 달라붙어 전신을 물어 가려웠고 아예 잠을 잘 수 없었다. 당직 동료가 나를 불쌍히 여겨 사무실 안에서 자게 했다. 다른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나를 깨웠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자신이 정정당당한 대법제자임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나더러 출근하지 못하게 하고 화장실 청소를 시키거나 주방에 내려 보내 야채를 다듬고 씻게 했다. 심지어 수위마저도 나를 대신해 불평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내가 지도자를 찾아가보겠다.”
남편이 와도 집에 가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직장에서 3~4개월간 머물렀는데 그들은 사위를 설득해 나 대신 수련하지 않는다는 보증서를 쓰게 한 후에야 풀어주었다. 나는 다시 정법 홍류 속으로 들어갔다. 처음에 목적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북경에 가서 법을 실증하려는 염두는 줄곧 내 마음을 맴돌았다. 때문에 나는 동수와 2번째 북경 행을 준비했다.
2. 두 번째 북경에 가서 법을 실증하다
당시 천지를 뒤덮을 듯한 탄압 기간이었지만 우리는 놀라지 않았다. 우리 몇몇 동수들은 미리 약속한 장소에 모였고 오교(吳橋 하북성 창주의 한 지명)에서 천진(天津)으로 가는 차를 탔다. 천진에서 또 북경으로 가는 차를 타고 북경 역에 도착했다. 그 후 여관을 찾았는데 곳곳이 만원이라 여관을 찾는 데만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후 휴식을 취했다.
이튿날 내가 막 《홍음》을 외는데 사부님께서 빨리 천안문에 가라고 점화하셨다. 우리는 간단히 짐을 챙겨 곧바로 천안문으로 갔다. 이때 천안문 광장은 경비가 아주 삼엄해서 세 걸음마다 초소가 있고 다섯 걸음마다 보초가 있었다. 그러나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 “우리 사부님의 결백을 돌려달라”는 호소가 이쪽저쪽에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경찰은 마치 미친 것처럼 이곳을 추적하고 저곳을 때리며 현수막을 빼앗아갔다. 하지만 그 누구도 굴복하지 않았다. 여기서 맞아 넘어지면 저쪽에서 일어났고 이곳에서 현수막을 빼앗기면 저쪽에서 또 펼쳐들었다. 그 함성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고 바람에 펼쳐진 현수막은 사악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순식간에 천안문은 정사대전(正邪大戰)의 장이 되었다. 경찰은 강제로 우리를 끌어내 북경주재 현지 판사처(辦事處)로 보냈다.
그곳에서 그들은 우리의 뺨을 때리고 수갑을 채웠다. 그러나 수갑에 빈틈이 있어서 나는 손을 빼거나 뻗을 수 있었다. 나는 사부님께서 나를 가지해주시는 것임을 알았다. 그들은 나를 쇠창살 안에 가뒀다. 이튿날 나는 현지 공안에게 인계되었고 직접 간수소에 감금되었다. 그곳에서 날마다 세뇌하고 강제 전향을 시켰다. 하지만 나는 전향하지 않았고 잘못이 없으니 단식했다.
단식 5일째 되는 날 저녁 나는 흐릿한 가운데 잠시 잠이 들었는데 사부님께서 한 덩어리 투명한 물건을 들고 와 내 입안에 넣어주시는 것을 보았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고 눈물과 그 투명한 것을 함께 삼켰다. 그 것은 너무나도 맛이 좋아 세간에 어디 그렇게 소중한 것이 있겠는가. 그 맛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내게 무슨 덕(德)이 있고 무슨 공로가 있다고 사부님께서 나를 먹여주신단 말인가! 나는 오직 정진 또 정진해서 세 가지 일을 잘해 사부님의 은혜에 보답할 따름이다!’
겨울이라 눈이 많이 내렸고 또 아주 미끄러웠다. 나는 또 며칠간 먹지 못했고 손에는 수갑이 있어 심문 받으러 나오다가 미끄러져서 허리를 다쳤다. 그럼에도 정법위 직원 단혜연(段慧娟)은 나를 집에 보내지 않았다. 가족들의 강력한 요구 하에 나는 37일을 갇혀 있은 후에야 비로소 풀려났다.
집에 돌아온 후 남편은 나더러 북경 집에 가서 좀 쉬라고 했다. 우리가 떠나면서 파출소 경찰 왕영림(王英林)에게 전화를 걸고 간수소에 전화를 했지만 모두 받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북경에 도착한 다음날 공안국과 직장에서 북경 집으로 나를 잡으러 왔다. 돌아온 후 나는 다시 집에 돌아갔고 그들은 더 이상 북경에 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 기간에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북경에서 각 지역 동수들이 함께 머물다보니 동수들은 우리 시(市) 동수가 제작한 현수막이 크기도 다양하고 글자체도 가지런하며 색깔도 선명하다며 좋아했다. 동수들이 법을 실증하는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우리 시의 한 동수가 부잣집 도련님으로 분장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가죽 옷에 가죽 신발을 신었으며 어머니의 팔짱을 끼고 두 차례나 두 개의 큰 자루로 현수막을 운반했다. 이 자루는 옷을 파는 상인들만 사용하는 아주 큰 것이다. 사부님의 가호 하에 놀람은 있었지만 위험하지 않았고 지혜롭게 속인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이는 그야말로 “제자의 정념이 족하면 사부는 회천력이 있노라”(《홍음 2》) 였다.
그 사악한 탄압 속에서 원래 있었던 법공부 소조는 흩어졌다. 그러나 단체 법 공부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형식이라 우리는 곧 새로 법 공부 소조를 조직했다. 법 공부 소조에서 우리는 배우면 배울수록 대법이 억울함을 느꼈고 사부님께서 이렇게 먹칠을 당하셨으니 제자인 우리로선 결코 좌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고 사부님을 위해 공정함을 강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소조는 몇몇 동수들은 또 북경에 가서 법을 실증하는 길에 나섰다.
3. 세 번째 북경에 가서 호법하다
2000년 12월 24일 나와 소조의 몇몇 동수들은 여러 장소를 거치며 우리 시에서 북경에 임차한 장소로 갔다. 시멘트 바닥이었고 장판이나 지붕도 없었다. 남자들은 북쪽 방, 여자들은 남쪽 방에서 식은 만두와 짠지를 먹고 찬 물을 마셨다. 이렇게 30일이 되자 우리 5~6명이 일제히 천안문으로 갔다. 지하철에서는 초소를 돌아 불심검문을 피했고 가는 길에 모두들 흩어져서 갔다. 천안문에 도착하니 나와 다른 한 동수만 남았다.
이때 동수는 경찰이 한 노인을 구타하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저지하며 노인을 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경찰이 그녀를 공격하며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찼다. 이때 나는 급히 소매에서 현수막을 꺼내 평생의 기력을 다해 큰 소리로 외쳤다.
“파룬따파하오! 우리 사부님은 결백하다!”
이 목소리는 너무나 크고 높아서 오랫동안 공중에 메아리쳤다. 그 순간 마치 천지가 응고(凝固)되고 공기조차 응고된 것 같았다. 내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악경들에 의해 경찰차로 끌려갔다. 동수는 힘을 다해 차문을 가로막고 나를 차에 태우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억지로 밀고 당기며 경찰차에 태워져 곧장 천안문 후원(後院)으로 갔다.
이곳에는 이미 각지에서 상방하러 온 동수들로 가득했다. 사부님 고향의 동수들이 가장 세심하게 준비했다. 그들은 확성기와 마이크를 가져와 《논어》와 《홍음》을 선창했다. 이 사람이 외우다 지치면 저 사람이 이어받았고 그가 목이 쉬면 또 이 사람이 받았다. 수련생들은 마음이 하나가 되었고 일제히 외치는 함성소리가 여기저기서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 함성소리는 공중에서 오랫동안 메아리쳤다. 경찰이 우리를 저지하려 했지만 아예 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마치 미친 것처럼 후원 안에 있던 경찰들이 전기충격기와 고무봉을 들고 와서는 우리를 때렸다. 건물 위의 경찰들은 물을 가져다 뿌렸고 심지어 국을 우리한테 쏟아 부었다. 어떤 젊은이들은 맞아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누가 때렸는지 묻자 경찰 아저씨들이 때렸다고 했다. 우리는 이렇게 맞기를 기다리고만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 일제히 하나, 둘, 셋하고는 밖으로 달렸다. 하지만 이게 어찌 쉽겠는가, 대문이 잠겨 있었고 또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우리는 대열을 지어 집주소와 이름을 말하면 현지 공안이 데려갔다. 말하지 않으면 북경 각 구(區)의 파출소에서 나눠서 데려갔다. 나와 동수는 문두구(門頭溝) 파출소로 끌려갔다. 파출소에서는 우리의 진술을 기록하고 신체검사를 했다. 우리는 여전히 주소를 말하지 않았고 나는 그들에게 등에 시퍼렇게 맞은 상처를 보여주었다. 내가 보니 그들은 모두 진술서 위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끝난 후 그들은 우리에게 번호표를 부착해 감옥에 넣었다.
당시 모두들 황망히 왔기 때문에 아무것도 가져온 게 없었다. 우리 시의 한 동수는 주도면밀해서 올 때 집에서 통장을 가져왔는데 5~6천 위안을 침대 위에 뿌리며 돈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가져가 일용품을 사도록 했다. 동수들은 모두 슬리퍼나 일상용품을 샀다.
이튿날 새벽 그들은 또 우리에게 주소를 물었다. 나는 창주(滄洲)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창주에서 사람이 나온 후 나는 또 뭔가 맞지 않음을 느꼈다. 연공인은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곧 그에게 솔직하게 사과했다. 당신들에게 번거로움을 가져다주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러자 그가 아직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안에 있던 경찰들이 가만 있지 못했다.
한 여자가 발로 나를 차면서 말했다.
“누가 너더러 허튼 소리를 하고 멋대로 달아나라고 했는가?”
내가 말했다.
“당신은 강택민을 찾아가서 말하라, 그가 우리를 박해하지 않았다면 누가 이곳에 오고 싶었겠는가?”
이때 한 남자가 떠들었다.
“거짓말을 했으면 총살을 시켜야 해.”
나는 “애초 살아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이는 법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한동안 괴롭힘을 받은 후 나는 아프고 피곤한 가운데 서서히 잠이 들었다.
막 잠에 들었을 때 사부님께서 내 귀에 대고 말씀하셨다.
“6일 후에 나갈 것이다.”
정말로 6일이 지난 후 우리는 석방되었다. 우리를 석방할 때 한 경찰이 말했다.
“당신들 정말 운이 좋은 거야. 내일부터는 한 사람도 석방하지 않아. 모두 신강(新疆)에 데려가서 힘든 노역을 시킬 거니까.” 정말 사악했다!
나온 후 나는 딸집에 갔다. 이튿날 딸이 별일 없다고 했지만 그들은 아직 끝낸 게 아니었다. 나는 곧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막 3층을 올라가는데 남편이 나와서는 나더러 빨리 달아나라고 했다. 그들이 위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 집은 6층에 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유리실소(流離失所)하는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품팔이도 하고 아이도 보고 보모 노릇도 했으며 또 한 식물인간(들리는 말로는 전에 임표의 조종사였다고 함)을 간병하기도 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들은 내가 이번에 북경에 갔다는 이유로 노동교양 3년 판결을 내렸고 체포되었다면 직접 제남(濟南) 노교소로 보내졌을 거라고 했다. 사부님의 가호 하에 나는 이 겁난을 피할 수 있었다.
2002년 8월 가족이 나를 찾아왔고 그제야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매 차례 법을 실증하면서 매번 구타당하거나 체포되었지만 나는 아무런 원망이나 후회도 없다. 대법(大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고 사부님의 결백을 위해 말했으니 아무리 고생스럽고 아무리 어려워도 아쉬울 게 없다. 아무리 위험하고 험악할지라도 사부님의 인도 하에 나는 서약을 실현하고 사명을 완성했다. 나는 더욱 정진하며 세 가지 일을 잘해서 사부님의 은혜에 보답할 것이다.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동수 여러분 감사합니다! 허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65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