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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관념을 타파해 진아(真我)를 닦아내자

성도(成都)대법제자 우삼삼(宇森森)

【정견망】

사부님께서는 《20년 설법》에서 “특히 형성된 관념, 형성된 사유방식 그것은 자신에게 그런 비자각적인 사람 마음의 표현을 인식함에 있어 아주 어렵게 한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내려놓겠는가?”라고 하셨다. 

사부님의 이 단락 법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고 사람의 후천(後天)관념을 타파하는 것이 중요하며 수련 중에서 만약 일사일념(一思一念)이 법에 있지 않으면 아주 쉽사리 사람의 관념에 이끌려 문제를 사고해 수련에 문제가 나타나거나 때로는 심지어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함을 알게 했다. 

“어떤 관념이 형성되면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는데, 사람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이르기까지 이 사람의 사상을 좌우지할 수 있다. 이는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만약 이 관념이 시간이 길어지면 사람의 사상 중으로 녹아 들어갈 수 있는데, 정말로 자신의 대뇌 속으로 녹아 들어가, 이 사람의 성격을 형성할 수 있다.”(《불성(佛性)》)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홍진(紅塵) 속에서 속인사회에 오염되고 속인사회의 지식에 훈도(薰陶)되어 세계를 인식하고 사물을 인식하며 사람을 인식하는 한 세트의 관념을 형성하는데 관념은 또 사람의 한 세트 사유방식을 형성한다. 사람의 관념은 모두 좋지 않고 자사(自私)적이기 때문에 한 수련인으로서 사람의 관념을 타파해야 하는데 때문에 수련이라 한다. 관념은 조금만 유의하지 않으면 일종 무형의 것으로 당신을 통제하는데 당신더러 관념으로 문제를 사고하게 만들고 관념으로 말하게 하며 관념으로 일을 처리하게 한다. 이때 진정한 자기(自己)는 관념에 주재 당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 자신은 선천적인 자기 자신으로서 불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물을 인식할 때 흔히 일종 관념이 형성되기 쉬운데, 이런 관념은 자기가 아니다.”(《불성(佛性)》)

예전에 나는 사람의 관념이 아주 강해서 사유각도가 부정확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수련에 교란을 조성하고 중생 구도에 손실을 초래했다. 

사연을 이야기 하자면 이렇다. 

내 고향의 한 동수가 내게 호신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아주 기쁘게 응답했다. 이 기간에 많은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마침내 이 일을 잘 처리했다. 하지만 내가 이 동수에게 연락하니 핸드폰 전원이 줄곧 꺼져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문자 메시지로 택배받을 주소를 알려주면 이 호신부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도 명확한 답신이 없었다. 나중에 또 여러 차례 그와 연계를 시도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또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에야 마침내 그와 연락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 정확한 주소를 알려주면 호신부를 편하게 받아볼 수 있게 해주겠노라고 했다. 그는 다른 동수들과 상의한 후에 다시 연락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또 한참 시간이 지났지만 이 동수는 또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때 나의 사람마음이 올라왔다. 나는 속으로 ‘이 동수가 일을 하는 게 왜 이리 무책임한가? 어찌하여 이렇게 중요한 일을 망각할 수 있단 말인가? 분명한 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심지어 주소조차 남에게 알려주지 않다니 나더러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분명 그가 생각이 변해서 호신부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설사 필요하지 않더라도 내게 답신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줄곧 그가 수련을 잘했다고 여기며 그에 대해 탄복해왔기에 이번 일로 인한 실망이 더욱 컸다.

이에 나는 이 호신부를 현지의 다른 동수에게 보냈다. 나중에 내가 다른 동수(앞에 언급한 동수를 아는 동수)를 만나 그에게 한바탕 하소연을 했다. 그가 내 말을 다 듣고 나서는 내게 “정말 미안합니다. 그는 너무나 바쁘거든요. 정말이지 너무 바쁩니다. 이 호신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라며 사과했다.

이 동수의 진솔하고 선량함이 나를 진감(震撼)시켰다. 나는 이 일에서 자신의 사유에 문제가 나타난 것을 발견했다. 내 사유는 또 내가 문제를 보는 관념에 문제가 나타난 것이다. 나는 법에 있지 않았고 상대방의 각도에 서서 문제를 보지 못했으며 자아를 중시하고 아주 자사(自私)적인 위치에서 문제를 보았다. 나는 어떻게 옳게 했는데 상대방은 어떻게 틀렸다면서 남을 원망하고 비난했던 것이다. 이때 나는 사부님의 한 단락 법이 생각났다. 

“신과 사람이 우주를 볼 때 최대의 다른 점은, 신은 이 한 층의 입자의 구조에서 보지 않고, 그 이하의 각 층 입자와 이상의 각 층 입자에서 동시에 우주구조의 조합상(組合上)의 전 방위에서 입체적으로 보는바, 그는 물체의 우주의 부동한 층차 중에서의 총체적인 구성표현을 볼 수 있고, 근본에서부터 무슨 모양인지를 본다.”(《2004년 미국서부법회설법》)

이때에야 비로소 나는 관념을 전변해 안으로 찾기 시작했다. 한 수련인으로서 문제를 고려함에 마땅히 무사(無私)해야 하는 것으로 수련인은 마땅히 자기 이익을 수호하는 각도에 서서 문제를 보아서는 안 된다. 마땅히 시시각각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야 한다. 이 동수는 날마다 너무 바빴고 아마도 너무 바빴기 때문에 구세력의 교란을 받아 이 일을 잊었을 수 있다.

그러자 구세력이 곧 틈을 탔고 우리의 수련을 교란해 동수 사이에 간격이 생기게 함으로써 우리가 보다 효율적으로 중생을 구도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때 나의 법리인식이 보다 분명해졌는데 원래 이런 관념 그것은 내가 아니며 진정한 자기가 아니다. 이는 구세력이 억지로 더한 좋지 않은 생명이니 반드시 그것을 해체하고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 나중에 나는 또 그들이 호신부를 구매하는 것을 도와주어 제때에 이 과제를 보완해주었다.

이 일은 나로 하여금 수련의 엄숙성과 법공부의 중요성 및 수련에서 깨달음(悟)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했다. 대법의 법리(法理)는 지고무상(至高無上)하고 불변불파(不變不破)한 것이며 또한 금강부동(金剛不動)한 것으로 우리에 대한 법의 요구는 아주 높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최후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는가? 오직 법공부를 강화하고 정념을 강화해 수시로 법에 있지 않은 관념과 사유를 제거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잘 걷고 바르게 걸을 수 있다. 

무엇을 반본귀진(返本歸真)이라 하는가? 내가 이해하기에 오직 우리가 진정으로 법에서 수련하고 법에서 깨달아 사람의 일체 관념과 사유를 타파하고 사람의 각종 집착과 욕망 및 사람마음을 닦아버릴 수 있어야지만 비로소 진정으로 사람이란 이 층의 껍질을 벗을 수 있고 비로소 진정한 자아를 되찾을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12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