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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아’를 닦아 없애 ‘진아’를 닦아내자

중국 대법제자 각연(覺緣)

【정견망】

동수들과 함께 교류할 때 늘 진아(真我)와 가아(假我) 문제를 똑똑히 가릴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듣는다. 아래에서 현재 층차에서 내가 이해한 것을 근거로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말해보고자 한다. 법에 있지 않은 곳이 있다면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사부님 법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아주 오래고 아주 오래 전에 아득히 먼 천체 속에서 우리는 다행히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과 성스런 인연을 맺고 서약을 했으며 우주 말겁(末劫)시기에 세상에 내려와 조사정법(助師正法)한다는 홍대한 서원(誓願)을 발했다. 그 후 사부님을 따라 층층 아래로 인간세상까지 내려왔다.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1]

다시 말해 일체는 다 사부님께서 관할하신다. 아래로 내려오는 과정 중에서 매 한 층마다 그 한 층차의 입자에 부합하도록 매몰되어야 했는데 다시 말해 이는 한 층의 의복을 입는 것과 같다. 이는 우리가 최후 시각에 법을 얻어 수련하고 조사정법할 수 있도록 보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발견한 것은 우리는 위에서 아래로 오면서 거시에서 미시까지, 생생세세 의복을 입기만 했지 벗진 못했다. 이렇게 우리가 입은 의복이 갈수록 많아지자 진아(真我)는 갈수록 더 무거워졌고 우주 공간 중에서 비행하는 것 역시 갈수록 멀어졌으며 속인사회라는 이 미혹 속으로 왔다. 우리는 다만 인체 겉면의 표상만을 볼 수 있을 뿐 생명의 진상은 볼 수 없다.

비유하자면 지금 노란색 상의에 파란색 바지를 입은 사람이 바로 ‘나’란 이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 역시 어떤 옷을 입으며 바로 누구라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의복이지 진아(真我)가 아니다. 그것은 구세력이 억지로 더한 위사위아(爲私爲我)한 집착심으로 형성된 관념이다.

여기서 몇 가지 예를 들어 우리 함께 어느 것이 ‘진아’이고 어느 것이 ‘가아’인지 구별해보자.

1. 나는 수련하지 전에 당뇨병환자였다. 수련 후에 아주 빨리 좋아졌다. 그러나 며칠 전 어떤 사람이 나를 보고는 “당신 전보다 말라보여요.”라고 말했다. 당시 나는 생각했다. ‘나더러 말랐다고 그럼 내 당뇨가 다시 도진 게 아닌가?’

때로 몸에 업을 갚는 상태가 나타나면 또 당뇨병이 다시 나타난 게 아닌가 의심하곤 한다. 이런 습관적인 사유는 구세력이 억지로 더한 후천관념으로 다시 말해 나의 신사신법(信師信法)이 부족해 구세력이 틈을 탄 것이다.

이런 습관적인 사유는 또 아주 많다. 가령 감기로 열이 나면 냉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병에 걸려 병원에 가서 치료받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고 여긴다. 신체 어디에 단단한 덩어리가 있으면 암이 아닌가 생각한다. 동수가 사악의 박해를 받으면 그가 분명 어느 방면에서 잘하지 못했다고 여긴다. 오늘 늦게 자면 내일 발정념과 법공부 할 때 피곤할 거라 여기거나, 자료를 집에 두면 안전하지 못해 박해받는 구실이 될 수 있다고 여긴다. 박해받는 것은 모두 나가서 진상을 했기 때문이며 집에서 법 공부하면 안전하다고 여기거나 사당의 양회(兩會)가 시작되면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는 등등(모두 부면사유다)이다.

창문이 열려 있으면 누가 이렇게 추운데 창문을 닫지 않았는가? 라고 질책한다. 또 나와 다른 의견을 들으면 그가 일부러 내게 말한 게 아닌가? 내가 좀 방비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한다. 그가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방법을 찾아 그를 다스려야겠다고 쟁투한다. 당신은 신수련생인데 어떻게 당신에게 맡길 수 있는가? 라며 질투하는 등등이다.

자아를 보호하는 이런 습관적인 사유들은 구우주의 위사위아(爲私爲我)한 법리로 조성된 것이다. 구세력은 중생을 훼멸하기 위해 억지로 이런 관념을 더했다. 목적은 최대한도로 그것들이 원하는 것을 보존하려는 것으로 이는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게 아니며 그것들이 탐탁찮게 여기는 중생을 도태시키려 한다. 여기에는 진아와 가아를 똑똑히 구별하지 못하는 대법제자를 포함하는데 누가 그것에 부합하면 그것은 그를 도태시킨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실 사람은 선천적인 순진(純真)을 제외하고 일체 관념은 모두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지 자신이 아니다.”[3]

법에서 우리가 깨달은 것은 구세력이 억지로 더한 일체 후천적인 관념은 모두 가아(假我)다. 오직 사부님을 따라 정법하고 대법에 동화된 ‘선천적 순진(純真)’만이 ‘진아(真我)’다.

2. 중국 대륙의 환경 속에서 나는 체면을 중시하고 폼을 잡는 나쁜 습관을 양성했다. 수련 후에 비록 많이 바뀌긴 했지만 아직 깨끗이 제거하진 못했다. 어느 날 한 동료가 내 앞에 찻잔을 놓고 차를 따라주려 했다. 이때 막 들어온 신입사원이 내 찻잔을 가져가더니 작은 술잔으로 바꿔놓았다. 일부러 나를 난감하게 만들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잃게 한 것이다. 내가 막 화를 내려다 문득 나는 연공인이니 참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입으로는 참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넘어가지 못했다.

사부님께서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을 보시고 곧 내 대뇌 속에 한 마디 말을 쳐내셨다. 대체적인 뜻은 “폼 잡는 게 좋은 것이냐?”였다. 수련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것이 없어야 한다. 사부님의 말씀은 즉각 나를 명백하게 했고 폼 잡는 건 좋은 게 아니다. 그것은 속인 속의 정(情 체면)이고 구세력의 등급(等級)관념이다. 그것은 남을 얕잡아 보고 곳곳에서 나를 첫 자리에 놓는데 대법을 첫 자리에 놓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중생 구도를 심각하게 교란한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더러 ‘명리정(名利情)’을 닦아버리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가아(假我)다. 나는 그것을 버려야 하고 자비로 중생을 대하고 중생을 구도해야 한다. 이때 나는 한 가닥 따스한 흐름이 온몸을 관통함을 느꼈고 곧장 정신이 상쾌해졌다. 이렇게 법속에서 승화해 올라온 나야 말로 ‘진아(真我)’인 것이다.

3. 2009년 초여름 나는 현지의 한 동수와 어떤 사람이 작은 부채로 광고하는 것을 보았다. 이에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이것을 이용해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나는 진상부채를 만들어 시장에 나가 진상을 알렸는데 사람을 구하는 효과가 아주 좋았다. 매일 많으면 십여 명을 구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우리 현지의 두 동수가 우리 법공부 소조를 찾아와서는 말했다.

“당신들이 제작한 부채 위에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새겼는데 속인이 대법으로 부채질을 하면 대법에 대해 불경하고 또 어떤 사람은 엉덩이에 깔고 앉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대법을 파괴하는 겁니다.”

나는 듣고 나서 나의 법인식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겨 곧바로 그들과 논쟁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전 국민이 다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 부채를 든다면 그럼 중공 악당이 넘어갈 겁니다. 또 사람들이 다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 부채를 든다면 이는 대법을 널리 알리는 겁니까 아니면 대법을 파괴하는 겁니까?”

당시 나는 화가 나서 팔다리가 떨릴 정도였다.

사실 이 일에서 누가 옳고 그른가는 중요하지 않다.

사부님께서는 “부동(不同)한 층차 중에는 부동한 층차 중의 법이 있다. 법은 부동한 층차 중에서 부동한 지도 작용이 있다”[1]고 말씀하셨다.

수련인의 층차가 다르고 서 있는 기점이 다르며 문제를 인식하는 것 역시 다르다. 동수는 아마 대법의 존엄을 수호하는 입장에 서서 인식했을 것이며, 나는 중생을 많이 구하는 각도에서 인식한 것이니 어느 것도 틀리진 않다. 틀린 것은 내가 남더러 말을 하지 못하게 한 것으로 말만 하면 바로 폭발하는 이 쟁투심이다. 틀린 것은 평온하고 온화하게 대법으로 자신을 가늠하지 못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부는 대법제자가 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오직 당신들이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이 소원에서 우러나온다면 당신들이 한 일을 나는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다.”[2]

내가 깨달은 것은 사부님께서는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길 원하는 내가 진아(真我)임을 긍정하셨다. 진아는 말 한마디에 폭발하거나 남더러 말을 하지 못하게 하거나 동수와 쟁투하지 않을 것이다. 동수와 쟁투하는 자체가 바로 명리를 다투는 것으로 내가 옳고 네가 틀리다고 다투는 것이다. 쟁투심의 작용 하에 말해낸 도리 역시 남을 부정하기 위한 것으로 자아를 견지하는 구실을 찾는데 그것은 남을 공격하는 몽둥이다.

사실 한 수련인으로서 명리정(名利情)에 대해 마땅히 법으로 가늠해야 하며 가볍게 보고 내려놓아야 한다. 이는 마치 눈으로 물체를 보는 것과 같다. 가령 당신이 한 손가락을 눈앞에 놓으면 눈앞의 모든 것을 가려 당신이 미혹에 빠지게 할 수 있다. 당신이 그것의 위치를 옮기면 눈에서 멀어질수록 더 작아진다.

명리정 역시 마찬가지다. 당신이 그것을 크게 보면 볼수록 당신의 욕망 역시 커지고 더욱 점유하려 하는데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이다. 반대로 당신이 그것을 작게 보고 가볍게 보면 볼수록 당신의 욕망 역시 더욱 작아진다. 다시 말해 내려놓기가 더욱 쉽고 그것을 닦아내는 것 역시 더욱 빠르다.

이 일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동수와 쟁투한 그 나는 위사위아(爲私爲我)한 집착심이 형성한 관념으로 바로 가아(假我)다.

진아를 닦아내려면 가아를 닦아 없애야 하는데 가장 먼저 마땅히 법을 많이 배워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고층차의 법을 반드시 투철히 배워야”[1]한다고 하셨다. 일체를 법으로 가늠하고 대법의 요구에 따라서 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사람의 전반 수련과정은 바로 끊임없이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과정이다.”[1]라고 하셨다.

마치 우리가 의복을 벗는 것처럼 의복을 많이 벗으면 벗을수록 우리의 부담은 더욱 가벼워지고 승화가 더욱 빨라지며 우리에 대한 우주특성의 제약이 더욱 적어져서 진아와 더욱 가까워진다. 최후에 모든 옷을 다 벗어버리면 진아(真我)가 완전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3가지 일을 노력해서 해야 하며 우리의 역사사명을 완수해야 하는데 그때가 되면 사부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선택해 우리를 이끌고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실 것이다.

주:
[1]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설법 8》〈2008년 뉴욕법회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42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