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소(穹霄)
【정견망】
사존께서는 《전법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충칭(重慶)에서 우한(武漢)으로 설법하러 갈 때, 배를 타고 양쯔강(長江)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서, 산샤(三峽) 양쪽 산중턱에 동굴들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많은 명산에는 다 이런 것이 있다. 과거에 수련하는 사람은 밧줄을 타고 들어간 후, 밧줄을 끊어버리고 동굴 속에서 수련했는데, 수련해 내지 못하면 그 안에서 죽어야 했다.”
전에 이 단락 법을 읽을 때는 그저 과거에 산굴에 들어간 수련인이 벽곡이란 수련방법을 사용해 음식물이 없는 문제를 해결했다고만 이해했다. 최근 이 단락 법에 대해 새로운 이해가 생겼다.
산굴 속 수련인이 밧줄을 자르던 그 순간 그는 수련을 제외한 다른 모든 퇴로를 전부 잘라버린 것으로 형식적으로 세간의 일체를 깡그리 다 버린 것이다.
만약 그가 수련 성취하지 못한다면 안에서 죽을 텐데 그럼 그는 왜 감히 이렇게 했을까?
만약 생사를 내려놓지 못했다면 그가 밧줄을 자를 수 있겠는가?
만약 자신의 수련 성취에 대해 백분의 백 신심(信心)이 없었다면 그가 밧줄을 자를 수 있었겠는가?
만약 그가 수련한 그 한 법문이 자신을 수련 성취시켜줄 거라는 백분이 백 신심이 없었다면 그가 밧줄을 자를 수 있었겠는가?
1. 소침한 근원은 용감히 “밧줄을 자르지 못하기” 때문
정법은 이미 최후의 최후에 이르렀지만 늘 어떤 동수가 자신이 수련 성취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하는 태도를 지닌다는 말을 듣곤 한다. 자신이 잘 수련하지 못했고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을 잘하지 못했다고 여겨, 앞으로 수련의 길을 어떻게 잘 할 것인지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신은 원만할 수 없다는 생각해 일종의 소침(逍沈)한 상태에 빠져 자포자기한다.
나는 이것은 이미 신사신법(信師信法)에 문제가 있는 거라고 본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구세력은 이렇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또 그렇게 배치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하지 않으며 나는 그를 제도하고자 한다. 그가 오늘 잘하지 못했다 하여 구세력이 아직 박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로 하여금 내일 다시 수련하게 할 것이다. 꼭 그(그녀)들로 하여금 잘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박수) 실천이 증명하다시피 대법제자들은 더욱더 이지적이며 더욱더 청성하며 더욱더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욱더 확고해지지 않았는가?(박수) 당신이 최후에 정말로 확고할 수 있다면 당신이 이전에 한 그 일체는 다만 수련과정 중의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로 바로 그러하다. 사부는 가장 큰 慈悲(츠뻬이)로 이 일을 대하고 있다.”(《2003년 정월대보름설법》)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물론 이 일체, 박해든지 사악이 몰락으로 가는 것이든지 이 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대법제자로서는 법을 실증함에 방심해서는 안 되며 우리는 더욱 노력해야 한다. 특히 잘하지 못한 이, 늦게 걸어 나온 이들은 반드시 최후의 기회를 잡고 잘해야 한다. 사악이 정말로 없어졌을 때 이 일은 결속된다.”(《각지설법 3》〈2003년 미국중부법회설법〉)
사부님께서는 또 “특히 최후에 이르러 일부 수련생에 대해 말한다면 시간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특히 잘하지 못한 사람은 마땅히 시간을 다그쳐 잘하도록 해야 한다.”(《각지설법 6》〈2004년 워싱턴DC법회설법〉)라고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거듭 자비롭게 잘하지 못한 수련생들이 잘하길 기다려주셨다. 그럼에도 일부 수련생들에게 의기소침한 상태가 나타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감히 세간의 명리정(名利情)을 다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 백분의 백 신사신법(信師信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과감히 “밧줄을 잘라내” 오직 수련이란 이 길만 남기고, 사부님께서 우리를 원만하게 해주시고 우리 자신도 반드시 수련원만할 수 있다고 확고히 믿는다면 그런 의기소침하고 어쩔 수 없어하는 상태가 나타날 수 있겠는가?
2. 박해받는 것은 피동적으로 “밧줄을 자른” 것
박해받는 동수는, 구세력이 병업의 형식으로 박해하든 아니면 감금하거나 유리실소(流離失所)의 형식으로 박해하든, 우리는 그것을 구세력이 우리에게 누락이 있어 우리의 제고를 돕는다는 구실로 관련된 밧줄을 자른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의 진정한 목적은 바로 우리더러 “안에서 죽으라”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 이 법문은 모순 중에서 당신 자신이 공을 얻게 하므로, 우리는 최대한도로 속인에 부합해야 하는바, 물질상 당신에게 또 무엇을 실제로 잃으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 물질 환경 중에서 오히려 당신의 心性(씬씽)을 제고해야 한다.”(《전법륜》)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그 어떤 형식의 박해든 우리는 모두 근본적으로 부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배치하신 수련형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울러 정법시기 대법제자는 중생구도를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데 감금되거나 병업 박해를 받는다면 또 어떻게 중생을 구도하겠는가? 사부님께서는 “장계취계(將計就計)”(《20년 설법》)에 관한 법리를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어떤 사람은 나에게 묻는다. 왜 그는 이처럼 심하게 박해 당하는가? 아마 그의 배후에 있는 많은 생명을 위해 감당하고 있을 수 있고, 그가 보호하고 그가 구도하려는 생명이 너무나 크고 너무나 많을 수 있으며, 어쩌면 자신의 요소와 그가 구도하려는 생명의 요소 탓일 수 있고, 업력 혹은 감당한 역사적 요소가 너무 많기 때문일 수 있으며, 그리고 어쩌면 풀지 못해 쌓인 원한, 전혀 풀 수 없도록 굳어버린 매듭(死結) 때문일 것인데, 어떤 것은 오직 사람의 생명으로만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로소 박해 중에서 이런 복잡하고도 복잡한 형식이 조성된 것이다. 일부는 구세력이 한 것으로 교란받는 중에서 사부 역시 장계취계(將計就計)하고 있다. 어쨌든 간에 사부는 사부의 표준이 있으며 구세력은 한 것을 모두 갚아야 한다.”(《20년 설법》)
사부님의 법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박해가 발생하면 사부님께서는 곧 장계취계해 대법제자를 성취시키며 보다 큰 위덕을 수립해주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박해받는 가운에 박해를 부정하는 것 외에 또한 주동적으로 우리의 발목을 잡는 명리정이란 사람마음을 잘라버려야 한다. 그러면 곧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조용히 생각해 보니 집착한 일 얼마이더냐 사람마음을 덜면 악은 스스로 패하리라”(《홍음 2》〈슬퍼하지 말라〉)가 될 것이다.
개인의 깨달음으로 층차에 한계가 있으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7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