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사부님께서는 《로스앤젤레스 시 법회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더 이야기하지 않겠다. 여러분이 최후에 하면 할수록 더욱 잘하며 절대로 태만하지 말고 절대로 해이해지지 말며 절대로 마비되지 말기를 희망한다. 또한, 내가 방금 이야기한 것은 대법제자의 부족한 일환(一環)과 누락으로서, 바로 서로 간의 비평을 들으려 하지 않는 문제이다. 다른 사람의 정면(正面)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아서는 안 되며, 심지어 반면 의견도 건드려지지 않을 수 없기에, 이 마음을 지금부터 시작하여 모두 버려야 한다.”
사부님의 이 법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남에게 건드려지길 원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최근 며칠 일부 객관적인 원인 때문에 마음이 아주 시끄러웠다. 이때 집을 좀 청정(淸靜)하게 하려고 생각했지만 늘 나를 몹시 화나는 일들이 나타나곤 했다.
나는 이런 현상이 옳지 않음을 알기에 끊임없이 그것을 극복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좋지 않은 염두가 막 꿈틀거리는 것은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바로 오늘 일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작은 일 때문에 한차례 풍파가 생겼다. 이 풍파는 집안 분위기를 아주 긴장시켰고 나 역시 상대방에게 화가 나서 손이 덜덜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심성을 지키지 못하자 마치 둑이 터져서 홍수가 밀려오는 것처럼 단번에 한계를 돌파해버렸다. 나 자신도 감정을 통제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동안 쌓인 억울・원망・불만 등 부면(負面)적인 것들이 전부 석방되어 나왔다.
나중에 나는 일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해보았다. 20년을 넘게 수련했는데 어찌하여 아직 속인만도 못하단 말인가? 법에 대조해 자신을 찾아보자!
그러다 사부님의 이 설법을 보았을 때 나는 자신이 건드려지는 것을 두려워함을 느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건드려지길 두려워하는가? 모순이 발생한 장면을 상세히 돌아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아(自我)를 중심에 두고, 자신이 장기간 형성해온 관념을 사용해 각양각색의 모형(틀)을 만들어 이런 관념으로 물건을 만들어냈는데 개인을 중심으로 하고 자아를 주선(主線)으로 하는 것들이었다.
이럴 때면 주위 사람들은 곧 이 틀의 실험 대상이 된다. 당신이 주변 사람들의 행동거지에 반감을 가질 때, 당신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남을 못마땅하게 여길 때, 당신이 이익과 득실 앞에서 선택할 때, 만약 당신에 법에 서 있지 않고 첫 일념이 남의 감수를 고려하지 않을 때면 이때 이런 모형에 시장이 생긴다. 당신이 가아(假我)에 조종당하면 이런 모형이 가늠하는 표준이 되며 이것에 부합하면 옳고 부합하지 않으면 틀리게 된다.
그런데 이 모형은 자아를 중심으로 한 것으로 구우주의 변이된 요소를 지니기 때문에 당신이 계속 이렇게 해나갈수록 올가미에 걸려들고 결국에는 당신을 훼멸하게 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정법 중에서 건드려진 저층 환경 중의 그러한 가장 낮은 층차의 난잡한 저령(低靈)과 난귀(爛鬼), 바로 이런 것들이 대법제자의 일을 파괴하는 짓을 하고 있으며, 아울러 사악한 요소가 직접 통제하고, 더욱 높은 곳의 낡고 좋지 못한 요소들이 층층에서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2009년 대뉴욕국제법회설법》)
사부님의 법이 제자에게 지시해주시자 나는 마치 건드려짐 배후의 변이요소를 본 것 같았다. 자신이 건드려진 후의 반응을 보니 마치 마성이 아주 큰 것처럼 느껴졌고, 물건을 보면 곧 집어던지려 했고 마치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성가시고 마음 속에 마치 폭탄이 있는 것처럼 수시로 폭발할 기회를 찾았다. 체현되어 나오는 상태는 바로 늘 남이 옳지 않은 것을 보고 상대방의 잘못을 찾는 것이다. 하는 말에도 원망이 담겨 있고 또 상대방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등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폭발의 전조다.
사람의 인내력에는 한계가 있기에 나의 이런 무리한 행동이 상대방의 감당능력을 넘어설 때면 곧 모순이 나타난다. 이때 마치 탄창을 장착한 총이나 폭탄을 폭발시키는 것처럼 전체 환경이 부면요소에 휩싸이고 냉정해지려고 생각해도 아주 어렵고 마성이 당신을 점거해 이지적이지 못하게 만든다.
비록 마음속으로 아주 힘들었음에도 나는 여전히 자신은 수련인이니 사부님의 말씀에 따라 안으로 자신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자신을 건드릴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이거나 가장 고수하려는 것이자 가장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임을 발견했다. 이리 하여 나는 건드려진 배후에 원인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는 패괴(敗壞)된 물질 요소가 교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층공간의 변이된 생명이 통제해 조성한 것이다. 그것들의 목적은 바로 정법을 교란하고 세인을 구도하는 것을 저애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 나는 구세력에게 걸려든 것이다. 관념으로 만들어낸 모형을 사람을 가늠하는 표준으로 삼고 가아를 자신으로 삼았으며, 자신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면서 조종당한 것이다.
계속해서 안으로 이런 현상을 초래한 근본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그 근원은 일에 부딪쳐 사람의 이치로 가늠하고 처리하고 법에 입각해 처리하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사악에게 교란당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법에 입각하지 못했는가?
나의 체오(體悟)라면 당신의 공간장(空間場)에 패괴된 물질요소가 있을 때면 당신의 공간장이 불순해진다. 수련이란 바로 끊임없이 대법 속에 동화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대법으로 자신을 깨끗이 씻는 것이다. 당신이 좋지 않은 물질을 청리하려 할 때 체현되어 나오는 것은 바로 당신 체내의 일종 물건이 끊임없이 당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때 당신이 자아의 기점에 서서 마주하면 이런 난잡한 변이물질의 습격을 해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신은 연속으로 패배해 물러나는데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면 곧 마성이 크게 발작한다. 당신을 교란하는 이런 저령(低靈) 패물들은 다른 공간의 물질인데 당신이 사람 속에 진지(陣地)를 설치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없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2008년 뉴욕법회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특히 박해 이후의 몇 년 동안 당신들이 한 법을 실증하는 이러한 일들 중에서 어떤 구체적인 일들에 부딪혔든지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준 적이 있는데, 그것은 모두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수련했기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사부님의 법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건드려질 때 심성의 상태가 수련인의 경계(境界)를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나 자신을 예로 들자면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 것을 좋은 일로 여긴 이 첫 일념이 바로 틀린 것이다. 애초 자리매김(定位)이 틀렸으니 이로부터 초래된 결과는 바로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제때에 법으로 자신의 부면사유를 바로잡지 못하면 그럼 가아에게 통제당해 이지적이지 못하게 되거나 심지어 부면요소에 이끌려 마성이 크게 드러나게 된다.
사실 나는 이 방면에 대한 법리가 분명하지 않았다. 때로 동수들의 교류문장을 보면서 그에게 모순을 만들어준 사람에게 마음속으로 감사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동수와 경계차이가 아주 먼 것 같다. 동수는 이렇게 잘하는데 나는 왜 해내지 못하는가? 모순을 마주하고 왜 이것이 자신이 제고할 계단이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가? 법리상으로는 아주 명백한 것 같은데 왜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나는 계속해서 찾아보았다. 이렇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근원은 무엇인가? 나는 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가?
1. 법리(法理)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초에 삼계를 만들 때 바로 반대로 만든 것으로, 여기에는 바른 이치가 없다. 바른 이치가 있다면 석가모니도 올 필요가 없고, 예수도 올 필요가 없으며, 법을 전하는 이 일이 없고, 더욱이 여기의 법을 바로잡는 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반대로 된 이치로서, 행위와 형식 모두가 반대로 된 것이다.”《2008년 뉴욕법회설법》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삼계의 이치는 반대 이치라고 알려주셨지만 자신은 여전히 삼계의 이치를 바른 이치로 여겼으니 이것이 근본적인 잘못이다.
2. ‘사(私)’에서 파생되어 나온 안일심과 자아를 보호하려는 마음이 자신이 눈앞의 모순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음을 조성했다. 왜냐하면 만약 받아들이면 부면사유가 곧 자신에게 그것이 너무나 고통스런 일이라고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신이 비록 법리상에서 명백한 것 같아도 왜 해내지 못했는가 하는 원인이다. 그러나 해내지 못하면 수련이 아니며 자신을 잘 수련하지 못하면 제고할 수 없다. 제고하지 못하면 층차가 떨어지는데 장시간 이런 상태라면 어찌 될 수 있겠는가?
이번에 건드려지는 경험을 통해 나는 사람 그 한 층 껍질이 얼마나 완고한지 또 자신의 관념을 견지하는 것이 얼마나 강렬한지 볼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사(私)’가 남김없이 다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수련인에 대해 말하자면 관념의 전변은 정말이지 사람이 신(神)으로 걸어가는 관건이다.
나의 체오는 이렇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사부님의 말씀에 따르며 가아(假我)에 이끌리지 말아야 하며 마성을 억제해서 시시각각 사람의 본성은 선량하며 마성을 띤 일체 요소는 모두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수련인은 법(法)을 스승으로 삼아 매사에 대법으로 가늠해야 하며 자신의 감수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자신의 소위 사상・감수・경험이 꼭 법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대법제자는 바로 법속에서 자신을 바로잡고 자신을 동화해야만 비로소 조사정법(助師正法)과 중생 구도를 더욱 잘할 수 있다.
작은 수련 체회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7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