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자(粒子)
【정견망】
우리 수련인들은 다 알다시피 법 공부는 아주 어렵다. 설사 매일 《전법륜》을 외운다 해도 아무리 잘 외워도 한 단락 시간이 지나면 또 일부를 잊어버리고 법을 읽을 때도 쉽사리 글자를 더하거나 빼먹는 현상이 나타나곤 한다.
최근 단체 법 공부 때 한 동수가 법을 읽다가 한 글자를 더해서 읽었다. 다른 동수가 지적한 후 즉시 수정했지만 잠시 후 그는 “사실은 다 별 차이가 없다(其實都差不多)”고 말했다. 그의 의미는 비록 한 글자를 더해서 읽긴 했지만 그렇다고 구절의 뜻을 바꾼 것도 아니고 중국어 문법에서 보자면 확실히 그럴 수 있다는 뜻이다.
가령 “사실 이는 아주 어려운데”와 “사실 이는 아주 어려운 것으로”는 의미 차이가 거의 없고 다른 의견이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속인 중의 상황인데 수련인에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동수의 말은 나 자신을 생각해보게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전에 나 역시 법을 읽을 때 가급적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글자를 더하거나 빼먹지 않도록 노력했고 틀리면 즉시 고쳤다. 하지만 이는 사존(師尊)에 대한 존경에서 우러나온 것이지, 나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때로 글자를 더하거나 빼먹어도 이 구절에서 말하는 뜻을 고칠 필요가 없으니 “별 차이가 없고” 비슷하다고 여겼다.
그러다 전통문화 이야기를 읽고 나서 “한 글자 차이(一字之差)”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 별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아주 큰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인상 깊게 본 문장은 중문 대기원에 실린 《측자의 현기: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킬 징조는 어떻게 드러났나?(測字玄機 吳三桂造反之兆怎樣被拆穿?)》 중에 세 사람이 같은 글자를 해석했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는 이야기다.
이 문장의 일부를 인용해보자.
청나라 건륭(乾隆) 정묘(丁卯)년에 복건성(福建省)에서 향시(鄕試)를 치른 후 시험을 본 사정광(謝廷光)이란 인물이 시험 결과를 미리 알고자 다른 사람을 찾아가 자신의 합격여부를 물어보고자 했다. 어떤 사람이 홍산교(洪山橋)에 파자(破字)를 잘하는 선생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찾아갔다.
사정광이 그곳에 가서 ‘인(因)’자를 뽑은 후 이번 향시에 합격할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측자선생이 “인(因)은 나라(口) 안에 한 사람(一人=大)이 있으니 그대는 이번 시험에 수석을 차지해 해원(解元)이 될 것이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뛸 듯이 기뻐하며 “저도 이 ‘인(因)’자로 같은 일을 묻고 싶습니다.
측자선생이 말했다.
“그대는 아마 이번 과거에 합격할 인연은 없으니 다음 은과(恩科 역주: 정기적인 과거가 아니라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특별히 치르던 시험)에서 뜻을 이루게 될 것이오.”
그 친구가 물었다.
“왜 같은 글자로 같은 질문을 했는데 결과가 다릅니까?”
그러자 선생이 대답했다.
“저 사람의 인은 무심(無心)에서 나왔지만 그대의 인은 유심(有心)에서 나왔기 때문이라네.”
‘인(因)’에 한마음(一心)을 더하면 ‘은(恩)’이 되는데 그러므로 측자선생은 그가 마땅히 은과에 합격할 가망성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때 또 한 명의 젊은이가 희희낙락하며 손에 든 부채로 ‘인(因)’자를 가리키며 “저도 이 글자로 같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측자선생이 그의 이 질문을 듣더니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대 손의 부채가 마침 인(因)자 가운데를 가렸으니 바로 곤란(困)한 상이 되었군. 자네의 앞날은 평생 학생신분을 벗어나지 못할 걸세.”
나중에 세 사람의 운명은 과연 측자선생의 풀이대로 적중했다.
이 이야기를 본 후 나는 생각했다.
‘왜 세 사람이 동일한 글자를 뽑았는데 측자선생은 서로 다른 결과를 예측했을까?’
사실 사람의 일생은 이미 잘 정해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우리는 또 이런 정황을 보게 된다. 한 사람이 태어날(降生) 때, 특정한 공간 중에는 그의 일생의 존재 형식이 모두 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생명이 어느 한 부분에 와서는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모두 그 속에 있다.”(《전법륜》)
생로병사의 정보는 한 사람이 출생할 때부터 이미 사람 몸을 따라다니는 것으로 그의 일언일행(一言一行)에서도 모두 이런 정보를 드러내는데 단지 속인의 눈으로 볼 수 없을 뿐이다. 그러나 측자선생은 전통문화의 배양을 거친 후 이 기교를 이용해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에 따라 지닌 정보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글자를 파자해도 결과가 다른데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원인이다.
만약 더 능력이 뛰어난 고인(高人)이라면, 가령 공능을 지닌 수련인이라면 더 많은 것을 풀어낼 수 있다.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하거나 또는 한 글자만 적어도 그에게 얼마나 큰 업력이 있는지 생생세세의 상황까지 보아낼 수 있다. 한 글자면 가능하다.
그렇다면 법(法)을 읽을 때 만약 한 글자를 더 했다면 그 글자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게 아니라 내가 한 말이다. 그렇다면 그 글자의 배후는 무엇인가? 자신의 모든 정보인데 여기에는 아직 제거하지 못한 업력도 포함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매 한 글자 배후에는 층층첩첩 불도신(佛道神)이고 사부님의 법신(法身)인데 이는 우주 진리의 전개이다.
그런데 여기에 자신의 글자를 삽입한다면 이는 바로 난법(亂法)이다. 물론 우리가 일부러 난법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고치면 된다. 하지만 만약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중시하지 않거나 심지어 함부로 한다면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본래 이렇게 아주 엄숙한 문제인데 왜 나는 이를 개의치 않고 별 차이가 없다고 여겼을까? 안으로 찾아보니 자신이 사람이 되는 것에 습관이 되어 매사에 오직 표면만 보았고 표면적으로 별 차이가 없으면 곧 별 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눈으로 본 것만이 사실”이라는 관념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여전히 사람의 사유와 사람의 관념으로 일체를 보는 것이다. 자신을 한 신(神)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신의 사유방식을 배워 사고하려 하지 않았다.
사부님께서는 여러 차례 설법에서 늘 신(神)은 어떻게 사물을 대하는지, 어떻게 문제를 처리하는지, 신과 사람의 구별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또 천목이 열린 동수들도 다른 공간의 각종 상황을 상세히 묘사했는데 가령 정념으로 악을 제거한다거나 만물에는 영(靈)이 있다거나 윤회전생하는 등이다.
이런 것들은 사실 이미 이런 수련하는 대법제자가 육안의 습관과 의존에서 벗어나 신(神)의 눈으로 문제를 보는 것을 배우게 하기 충분하다.
가령 일체 물체는 모두 영체이고 생명이라고 보면 그것과 소통할 수 있고 또 소중히 여겨야 한다. 또 한 사람을 볼 때 설사 좋지 않은 언행이 있을지라도, 그가 아득히 먼 우주대궁에서 와서 천만년의 고생을 겪은 것을 본다면 소중히 여기고 존경할 만한 생명이다. 그의 좋지 않은 언행은 단지 저층에서 오염된 것일 뿐 그의 본질이 아니다.
또 온라인 게임을 보면 그것 배후에 수많은 마(魔)들이 어지럽게 춤추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속인의 소설이나 TV를 보면 그것 배후의 작가를 보거나 심지어 작가를 조종하는 영체(靈體)에 관한 정보 전체를 볼 수 있는데 검고 불결한 등이다.
표면을 보지 말고 다른 공간을 보아야 하며 본질을 보고 역사를 보고 종심(縱深)으로 깊이 보고 전면적으로 본다면 사람 속에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표면은 아주 복잡해서 옳은 것 같아도 틀린 것이 아주 많고 마치 미궁(迷宮)처럼 빠져 들어가면 벗어나기가 아주 힘들다.
뛰쳐나와서 사물을 본다면 극히 간단하다. 왜냐하면 본질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인데 본질로 갈수록 더 간단하다. 명백히 말해 자신을 신(神)으로 간주하고 시시각각 일사일념에서 모두 이렇게 자신을 요구한다면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은 사부에게 달린”(《전법륜》) 것이라 신으로 성취할 바람과 노력이 있다면 사부님께서는 곧 제자를 도와 사람 이 층의 껍질을 제거해주실 것이다. 일체는 다 사부님께서 하시는 것으로 일체는 모두 사부님과 대법이 부여한 것에서 내원한다.
개인의 깨달음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허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7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