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생
【정견망】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전체 우주는 가장 미시적인 것에서 가장 거시적인데 이르기까지, 가장 작은 것에서 가장 큰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질의 입자(粒子)에는 모두 특성이 존재하고 있는데 真(쩐)ㆍ善(싼)ㆍ忍(런)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 真(쩐)ㆍ善(싼)ㆍ忍(런) 우주의 특성인 그는 부동(不同)한 층차의 우주 중의 일체의 일체를 제약하고 있다.”(《오스트레일리아법회설법》)
또 《시드니법회설법》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이 방대한 우주, 그는 무척 완비하고 무척 지혜롭다.”
내가 이해하기에 우주 중의 일체는 다 대법(大法)의 제약과 통제 하에 있고, 일체 일은 모두 대법의 균형과 배치 속에 있으며, 이 대법은 공정무사(公正無私)하며 불가능이란 없다. 만약 당신이 대법의 요구에 따라 한다면, 다시 말해 법에 따라 행동한다면 법은 곧 당신에게 행복과 아름다움을 배치할 것이다. 이는 대법 자비(慈悲)의 일면을 체현한다.
만약 당신이 대법의 요구에 따라 하지 않고 대법에 배치되어 행동한다면 곧 법의 제약과 징벌을 받게 되는데 이는 대법 위엄(威嚴)의 일면을 체현한다.
사부님께서는 《2003년 정월대보름설법》에서 “법은 중생에게 慈悲(츠뻬이)하지만 위엄도 함께 존재한다. 법은 또한 표준이 있으며 중생에게 불변불파(不變不破)한 것으로서, 이는 함부로 좌우지할 수 없다.”라고 하셨다.
또 《유럽법회설법》에서는 “그러나 이 우주 중에는 한 가지 이치가 있는바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하고 얻었다면 당신은 곧 잃어야 하며, 잃었다면 당신은 곧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이다.”라고 하셨다.
내가 이해하기에 얻음과 잃음 양자는 앞뒤로 연대(連帶)된 것으로 얻음의 뒤에 잃음이 따라오고 잃음의 뒤에 얻음이 따라오는데 짝으로 나타난다. 얻음 단독으로 오거나 잃음 단독으로 오는 경우는 없다. 만약 당신이 인간 세상에서 대가 없이 무언가를 얻었다면 이는 당신이 잃지 않고 이 물건을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잃지 않고 공짜로 얻었다면 이는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는 법리를 위배한 것이라 법은 강제로 다른 공간에서 당신의 덕(德)을 잃게 한다.
이렇게 보면 당신이 인간 세상에서 뭔가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무언가를 얻었다면 이는 다른 공간의 덕으로 교환해온 것과 같다.
사부님께서는 《미국서부법회설법》에서 “주왠선(主元神)이 바로 당신 자신”이라고 하셨다. 내가 이해하기에 주원신의 득실(得失)이야말로 진정한 당신 자신의 득실이다. 덕은 주원신 몸에 따라다니기에 이는 진정으로 당신 자신의 것에 속한다. 인간세간의 것은 주원신과 같은 공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 주원신이 몸에 지니고 갈 수 없다. 다시 말해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니다. 당신이 자신 몸에 지닌 덕으로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인간세상의 것을 교환해 자신이 손실 받게 하는데 이는 바로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이다.
…중략….
당신이 인간세상의 것으로 다른 공간의 덕을 바꿔올 수 있다면 그럼 이는 당신이 그것을 얻은 것과 같다. 물론 수련인으로서 말하자면 이 방면에 꼭 그다지 신경 쓸 필요는 없고 속으로 어떻게 된 일인지 알면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전히 주동적으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바로 인간세상에 현존하는 것을 대법의 자원으로 삼아 간주하고 이런 자원을 잘 이용해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다. 이는 조사정법하고 중생을 구도하려는 숙원을 실현하는 것이자 또한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하는 위덕을 세우는 것이다.
마치 외국 동수들이 꾸린 매체나 항목처럼 경제적인 효율을 중시하고 돈을 벌어야 하지만 돈벌이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 돈으로 보다 많은 사람을 구하는데 쓰고 사람을 구함이야말로 최종적인 목적인 것과 같다. 이는 몸소 실천을 통해 대가를 치른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시드니법회설법》에서 “왜냐하면, 우리가 보기에 사람은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사람은 모두 속인사회의 가짜 현실에 미혹되었으며 사람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라고 하셨다.
나의 이해는 사람의 눈은 오직 표면만을 볼 수 있고, 자신이 인간세상에서 무엇을 얻는가만 볼 수 있을 뿐 다른 공간에서 무엇을 잃는가는 볼 수 없다. 자사(自私)관념의 지휘 하에 죽어라 세간에서 보다 많은 것을 얻으려 하지만 도리어 다른 공간에서 더 많은 것을 잃게 하는데, 진정한 자신의 주원신이 보다 많은 것을 잃게 한다.
수련인으로서 말하자면 법으로 미혹을 타파하고 속세의 가상을 간파할 수 있으며 바른 법리로 문제를 볼 수 있다. “사람의 타산은 하늘의 타산만 못하다.”(《전법륜 제2권》〈사람을 제도함에 설법하지 연출을 하지 않는다〉)
그 언제나 일체는 다 대법이 결정하니, 우리는 반드시 겸손하고 숭경(崇敬)하며 존중하는 심태로 대법을 대해야 하며 에누리 하지 말고 법에 따라 한다면 당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수련인으로서는, 당신들이 수련하려 함은 타인을 위하고 공적인 것을 위함으로, 생명은 모두 정법정각(正法正覺)의 생명으로 변해야 하는데, 이는 수련인을 가리킨다.”(《각지설법 15》〈2018년 워싱턴DC설법〉)
나의 이해는 인간세상에서 사람들이 사심(私心)을 움직일 때는 모두 자신만을 위하고 남이 좋고 나쁨은 상관하지 않는 것으로 오직 자신만 좋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고층 공간 신(神)의 군체 사회는, 그는 공동으로 아름다운 사회이며, 사람마다 모두 하나의 공심(公心 공적인 마음)을 지니고 한마음으로 남을 위하며 모두 주동적으로 남을 위하는데 결과적으로 모두가 다 좋으며 완전히 모두 대공무사(大公無私)한 심태다. 이런 세계야만이 영원히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얻었다면 당신은 곧 잃어야 하며, 잃었다면 당신은 곧 얻을 수 있다.”
(《유럽법회설법》)
나의 이해는 당신이 남을 위해 대가를 치를 때 법은 곧 당신에게 보답을 배치한다. 이렇게 하면 당신은 곧 좋은 것을 보답 받는다. 원래 남을 이롭게 하려던 일이 결국에는 자신을 이롭게 한다. 그러므로 위타(爲他)와 위아(爲我)는 전후로 연대된 일체이며 위타가 바로 위아가 되고 선량하게 대가를 치르면 공동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다.
당신이 한마음으로 남을 위한다면 이는 한마음으로 자신을 위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비록 오직 남을 위하더라도 당신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있으며 비록 당신이 남을 위해 대가를 치를 때 보답을 바라는 생각이 없을지라도 대법은 오히려 당신이 헛되이 대가를 치르지 않게 하고 반드시 보답을 배치할 것이다. 왜냐하면 잃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법(法)이 정한 원칙이다.
…중략….
대법 속에 살아가는 생명으로서 우리는 이렇게 큰 법이 있으니 일체는 다 보장이 있는 것이다. 당신이 오직 대법에 동화해 법에 따라 실천하기만 하면 대법은 곧 당신에게 행복과 아름다움을 보장할 것이다. 사람이 사심(私心)을 움직여 자신을 지키려 하면 사실 이는 대법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으며 자신이 자신을 지키려는 것이다. 대법은 선량(善良)을 실천하도록 요구하는데 사람이 일단 사심을 움직이면 곧 대법의 요구에서 어긋나게 되며 대법의 제약과 징벌을 받게 된다. 이는 스스로 재수 없는 것을 찾는 것과 같아서 자신의 바람을 지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상처를 주며 일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선량은 남을 이롭게 하는데서 시작하지만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끝나고, 자사(自私)는 남을 해치는 데서 시작해 자신을 해치는 것으로 끝난다.
선량은 공동의 아름다움을 이끌어낼 수 있지만 자사는 공동의 피해를 이끌어낸다. 사람은 모두 자신이 상처 받을까 걱정하지만 사실 진정으로 자신을 상처 주는 것은 바로 자신의 이 이기적인 사람마음이다. 사심을 내려놓고 선량을 선택하면 이는 곧 자아를 해치는 것을 포기하고 행복과 아름다움을 선택한 것과 같다. 만약 정말로 자신이 행복하고 아름다워지려면 그럼 남을 위하는 것에서 시작해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주생명의 가장 아름다운 선택이다.
올해로 이미 대법제자가 박해를 받은 지 23년이 되지만 지금 박해 형세는 여전히 아주 엄중하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 바로 구세력이 우리 심성의 누락이 있는 틈을 타서 조성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관찰하기에 심성상의 가장 근본적인 누락은 바로 심성의 본질상에서 근본적인 전변(轉變)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로 구우주의 위사위아(爲私爲我)한 근본속성이 아직 전변되지 않은 것이다.
어떤 동수는 설령 좋은 일을 하거나 조사정법(助師正法)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바른 일을 하면서도 출발점이 위아(爲我)하다. 표면적으로는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원만을 위해 한 것이다. 법을 실증하는 협력 중에서도 어떤 동수는 우선 생각하는 것이 법을 수호하고 정체를 수호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수호하고 자신을 견지하며 자신을 실증하며 법을 실증하지 않는다.
대법은 선(善)을 해낼 것을 요구하는데 우리는 오히려 선하지 못했고 사심(私心)으로 대했으니 이는 엄중하게 대법의 요구에서 벗어난 것이다. 심성에 이렇게 큰 누락이 있는데 구세력이 손을 쓰지 않고 방관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분명 틈을 탈 것이다. 때문에 박해 형세가 줄곧 엄중한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근본에서 해결해야 하며 심성에서 해결해야 한다. 심성에서부터 본질적으로 자신을 철저히 개변해 자사자아(自私自我)한 관념과 후천적으로 형성된 ‘자아(自我)’를 내려놓아야 하며 “무사무아 선타후아의 정각(正覺)을 수련해” 내야 한다. 신(神)과 같은 심태로 모든 것을 대할 수 있다면 구세력이 틈을 탈 수 없게 되며 문제는 곧 철저히 해결될 것이다.
자사자리(自私自利)의 관념과 후천적으로 형성된 자아, 이런 것들은 모두 자기 생명을 해치는 것들이며 또한 모두 가짜다. 자사자리는 가짜 이치(假理)고 자아는 가짜 나(假我)다. 당신이 이런 가짜이고 사람을 해치는 것을 남겨서는 무엇 하는가? 마땅히 빨리 그것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것들이 자신을 더 해치고 자신을 속이며 자신을 좌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진선인(真善忍)만이 우주 진리이고 주원신(主元神)만이 진정한 자신이다. 가짜 이치와 가짜 나를 내려놓고 진짜 이치와 진짜 나가 자신을 주재하게 해야 한다. 철저하게 사람에서 신으로 전변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기왕 구세력이 틈을 타는 것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법을 실증하는 일도 할 수 있고 이렇게 해야만 진정으로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이 모태에서 출생할 때 어떤 속인의 사상도 없고 오로지 젖을 먹고 울 줄만 알 뿐이었는데 후천적으로 그에게 속인 중의 일체를 부어넣었다.”(《유럽법회설법》)
“나는 어린이 보기를 아주 좋아한다. 왜냐하면 어린이의 사상, 마음과 그의 신체가 참으로 순수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수련한다면 매우 빠른데, 그는 사람의 후천적으로 길러진 그 어떤 집착도 없다.”(《북미 제1기 법회설법》)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관념은 후천에 형성된 것으로써 나이를 먹음에 따라 점차 형성되는 것이다. 4~5세 되는 어린이들은 관념이 없는바, 그에게는 어떠한 관념도 형성된 것이 없다.”(《창춘보도원법회설법》)
내 인식에 어려서 막 출생했을 때는 그 어떤 속인의 사상도 없지만 6살이 되면서 서서히 관념을 형성한다. 인간세상의 미혹된 공간은 반대로 만들어졌고 이곳에서는 우주진상을 볼 수 없으며 사람에게 펼쳐 보이는 것은 모두 가상(假相)이다. 이 가상에 따라 인식을 총결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란 바로 반대되는 이치나 가짜 이치다.
막 출생한 아이는 사심이 없고 아주 순결하다. 그러나 성장함에 따라 외부 주입의 영향을 받는다. 어른이 아이를 교육할 때 종종 “사람이 살면서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데 일에 부딪히면 자신을 위해 고려하고 좀 약아야 하며 손해를 보지 말아야 한다”고 알려준다. 이런 주입을 받으면서 아이는 점차 하나의 ‘자아’ 개념과 자사자리(自私自利)의 관념을 형성한다.
동시에 이 자아는 인간세상에서 생겨나 성장과정 중에 점차 형성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눈은 오직 인간세상의 것만을 볼 수 있고 다른 공간의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원신의 존재를 모르며 대법의 존재는 더욱 모른다. 그것은 바로 이 육신을 자신으로 간주하고 나의 대뇌가 무엇을 생각하면 이것이 바로 나의 사상이라고 여긴다. 또 내가 마음속으로 기뻐하면 이것이 바로 자아의 감정이라고 여긴다. 이 몸이 무엇을 감수하면 이것이 바로 자신의 감수라고 여기고 만약 이 신체가 사망하면 곧 자기가 사망한 것으로 여긴다.
이렇게 점차 ‘자아’개념을 형성하는데 또한 자아의식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자아’는 관념성의 산물이며 그것이 일종 이것이 바로 나라고 여기는 관념이다.
‘자아’ 개념이 형성된 후 이어서 ‘너, 그, 남’의 개념이 생기는데 이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구별하고 이것은 내 것이고 저것은 그의 것이고 남의 것이라며 점차 나와 남을 구별하게 된다.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위사(爲私)한 관념이 주입되면 자사자리의 관념이 생겨나고 갈수록 더 ‘자아’를 중시하고 ‘자아’에 집착하며 이후 이 ‘자아’를 위해 살아가게 된다.
모든 관념과 집착은 다 ‘자아’를 둘러싸고 형성되는 것으로 모든 나쁜 일은 ‘자아’의 이끌림 하에 관념과 집착에서 나온 것이다. 악에는 악보(惡報)가 따르기 때문에 생존 속에서 겪은 고난은 모두 ‘자아’를 촉성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속인은 수련하지 않기에 전혀 이런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데 그들은 모든 사상이 모두 그들 자신이라고 여긴다. 최후에 속인 중에서 형성된 관념이 사람을 지배하여 모든 것을 하고 있지만 사람은 오히려 그들 자신이 한 것이라고 여긴다. 인간 자신은 그때 이미 매몰되고 휩싸여 아무런 작용도 일으키지 못하므로 전혀 인간 자신이 아니다. 현재 사회의 사람은 모두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그가 대단하다고 칭찬하며 이 사람은 쉽게 손해 보지 않고,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으며, 재주가 있고, 노련하다고 여긴다. 나보고 말하라면 그는 더없이 어리석다. 그는 이 한평생 그 자신이 살지 않고 다른 것에게 자신을 맡기고 대신해서 살게 했는데, 그의 신체는 다른 것에게 통제당하고 있다.”(《오스트레일리아법회설법》)
나의 이해는 ‘자아(自我)’는 관념이며 또한 자신의 공간장 속에 존재하는 영체(靈體)다. 주원신만이 진정한 자신이기 때문에 자아는 진정한 자신이 아니며 그러므로 자아를 내려놓고 주원신이 자신을 주재해야 한다. 구체적인 방법은 우선 매사에 견정하게 자기의 주원신이 법에 의거해 움직여야 하며 다른 방면에서는 ‘자아’를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이 ‘자아’는 층을 나눠 존재한다. 내가 이 한 층을 깨끗이 제거하면 한층 아래에 또 있는데 반복해서 제거해야 한다. 표면으로 가면 갈수록 그것은 갈수록 더 약해지며, 당신이 자신을 쉽게 견정하게 하면 할수록 그것에게 좌우되지 않는다.
사실 이 ‘자아’는 바로 주원신을 봉폐하는 껍질인데 사람의 껍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곧 층층 자아의 껍질을 청리해야 하는데 최후에 자아가 사라지고 주원신이 완전히 드러나게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반본귀진(返本歸真)이다. 달리 말하자면 당신 마음속에서 ‘자아’를 내려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아직 당신 공간장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정념으로 그것을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
천백 년 간 인간세상이란 이 미혹의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이 자아의 주재 하에 살아왔고 진정한 자신의 주원신을 괴뢰로 만들어 후천적으로 형성된 ‘자아’에 의해 매몰되고 대체되었다. 그러나 이 ‘자아’가 아무리 많은 나쁜 짓을 했을지라도 결국에는 주원신의 몸에서 결산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평소에 사람들이 무슨 문제를 생각하고, 무슨 일을 함은 主元神(주왠선)이 결정한다.”(《전법륜》)라고 하셨다.
자아가 신체를 주재해 나쁜 일을 하지만 그것 역시 주원신이 확고하지 못해 조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는 또 주원신이 이 후과(後果)를 감당해야 한다. 생각해보라, 이 얼마나 억울한가! 얼마나 재수가 없는가! 윤회전세(輪回轉世) 중에서 생생세세 겪은 각종 고난은 모두 이 ‘자아’가 나쁜 짓을 해서 촉성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미 수련을 했으니 마땅히 이 자아를 빨리 제거하고 주원신이 자신을 주재하며 진정으로 자신을 위해 살아가게 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은 백년 후에 자신의 육신체(肉身體)에서 나올 때, 사람이 일생 중에 한 일들, 세 살 때 한 일을 포함하여 마치 1분 전에 금방 한 것처럼 눈에 역력하다. 이 공간ㆍ시간을 떠나면 이 공간ㆍ시간과 같지 않기 때문에 일체는 마치 방금 한 것 같다. 그때 사람이 일생 중에 한 일의 옳고 그름을 자신이 모두 알게 되는데 그때서야 후회한다.”(《휴스턴법회설법》)
내 생각에 장래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잘해야 한다. 다시 말해 또 어떤 일을 만날지라도 나는 대법의 요구에 따라 반드시 일을 잘할 수 있다면 그 ‘자아’가 작용하지 못하고 이는 곧 자신을 견정하게 한 것과 같다.
‘자아’는 속인 중에서 형성된 것으로 그것은 육신(肉身)을 자신의 주체로 삼고 육신과 연대된 일체를 모두 자신으로 간주한다. 육신 대뇌의 사상을 자신의 사상이라 여기고, 육신이 얻은 것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며, 육신의 정서반응을 자신의 감정이라 여긴다. 물론 육신 대뇌 속에 반영된 관념과 집착을 모두 자신으로 간주하고 이를 모두 자신의 생각이라 여긴다.
우리 수련은 바로 사상을 직접적으로 겨냥해 닦는 것으로 “사람의 대뇌는 결코 사상을 생성하는 근원(根源)이 아니다.”(《각지설법 2》〈2002년 미국필라델피아법회 설법〉)
나의 이해는 사상염두(思想念頭)는 대뇌에서 생기지만 대뇌 자신이 독립적으로 무슨 사상염두를 만드는 게 아니라 다른 생명의 조종 하에 생기는 것이다. 어떤 것은 육신 밖의 것에 조종당하고 어떤 것은 육신 안의 것에 조종당한다. 우리는 모두 사부님께서 관할하시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바르게 잘하면 사부님께서는 곧 외부 조종의 발생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니 여기서는 육신 안에서 오는 조종에 대해 한번 토론해보자. 우선은 주원신이지만 또 부원신과 공간장 속의 각종 관념, 집착이 있는데 모두 대뇌를 조종할 능력이 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대뇌 그것은 이미 갖추어져 있는 기계이므로 누구든 조종할 수 있다. 당신이 조종하지 않고 포기하면 다른 사람이 와서 조종하는데, 그것은 사람의 규범이 없다.”(《스위스법회설법》)
“당신의 元神(왠선)은 가장 미시적(最微觀)이고 가장 미소(最微小)한 물질로, 가장 본원적인 물질로 구성되었다. 당신의 성격, 당신의 특성은 물질의 본원에서 이미 운명적으로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수많은 시간과 생생세세를 거쳐서도 개변하기가 몹시 어렵다. 하지만 본성은 선량한 것이다.”(《파룬따파의해》〈창춘파룬따파 보도원을 위한 설법〉)
나의 이해는 주원신은 개변되지 않지만 매몰되는데 후천적으로 형성된 ‘자아’에 의해 대체된다. 다시 말해 육신의 이 대뇌는 ‘자아’에 의해 통제당하며 그것은 자신의 필요에 근거해 관념이나 집착이 대뇌를 통제해 신체를 지휘해 일을 하게 하여 ‘자아’의 목적에 도달하게 한다.
우리 수련은 바로 후천적으로 형성된 ‘자아’, 각종 관념, 각종 집착을 모두 제거해 자신을 원래 오염되지 않은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바로 전체 육신 중에는 ‘자아’, 관념, 집착이 없어지고, 후천적으로 형성된 이런 영체가 모두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대뇌를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원신과 부원신뿐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평소에 사람들이 무슨 문제를 생각하고, 무슨 일을 함은 主元神(주왠선)이 결정한다. 副元神(푸왠선)은 주로 사람의 主元神(주왠선)을 통제하여 되도록 나쁜 일을 하지 않도록 한다. 그러나 主元神(주왠선)이 아주 집착할 때는 副元神(푸왠선)도 어찌할 능력이 없다. 副元神(푸왠선)은 속인사회에 미혹되지 않지만 主元神(주왠선)은 속인사회에 쉽게 미혹된다.”(《전법륜》)
나의 이해는 부원신은 삼계(三界) 내로 들어오지 않았고 일정하게 미혹을 타파한 상태 하에 있는데 아울러 사부님의 통제 하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진정으로 대뇌를 조종하는 것은 바로 주원신이며 곧 당초 신(神)의 상태로 돌아가 완전히 대법에 동화하고 법에 따라 행하게 된다.
내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닦아버려야 할 것은 바로 이런 후천적으로 형성된 오염물질들인 ‘자아’, 관념, 집착이다. 당신이 이런 것들을 공간장 속에서 모두 제거한다면 그럼 임무를 완성한 것이다.
7.20 이전에 이런 것들은 우리가 모두 수련 중에서 일에 부딪혀서 잘하면, 사부님께서 곧 없애주셨다. 그때 나는 이런 것들을 움직일 능력이 없었다. 그러다 발정념(發正念)으로 자신을 청리할 때부터 시작해서 우리 자신에게 이런 것들을 제거할 능력이 생겼다.
나의 개인적인 감각은 사부님께 의지해 제거하자면 반드시 자신이 일을 잘한 후에야 사부님께서 비로소 제거해주셨다. 하지만 종종 일에 부딪혀 자신마저 무슨 일인지 의식하지 못하고 사람마음의 조종 하에 일을 잘 완수했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일을 잘하지 못했다. 그러면 사부님께서도 제거해주실 수 없고 다음에도 또 이럴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사람마음이 비교적 교만해진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 이런 사람마음을 제거할 능력이 있다. 다시 말해 선수를 칠 수 있는데 비록 이번에 일을 잘하지 못했을지라도 이미 이런 사람마음을 발견했다면 지금 내가 곧바로 그것을 제거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공간장속에서 그것이 사라져 다음에는 그것이 교란할 기회가 없어지고, 다음 한차례는 일을 잘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그것을 제거하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물론 제고된 후 한 층 더 내려가면 또 그것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원래 그 한 층이 아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제거하고 한 층 한 층 반복해서 제거한다면 그럼 끊임없는 제고 속에 있는 것이다.
수련이란 인내심을 지니고 착실하게 한 걸음씩 앞으로 전진해야 하는데 꾸준히 하다보면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무조건 안으로 찾고 그 어떤 일이든, 그것이 좋든 나쁘든 모두 우리더러 안으로 찾아 심성을 제고하라고 제공한 기회이며 모두 좋은 일이다. 반드시 소중히 여기고 이용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공간장 속의 사람마음이 갈수록 줄어들고 갈수록 약해져서 수련 중의 저애력도 갈수록 적어지고 갈수록 작아지며 법을 실증하는 일 역시 갈수록 쉬워질 것이다.
때로 무슨 일을 만나지 않을지라도 자신의 사상염두를 지켜보면서 일사일념(一思一念)에서 안으로 찾는 것도 자신을 닦을 수 있다. 대뇌 속에 나타나는 모든 좋지 않은 염두는 다 사람마음이 반영되어 조성된 것이다. 좋지 않은 염두를 발견하면 곧 안으로 찾고 사람마음을 찾은 후 바로 제거한다. 이렇게 하면 자신의 일언일행(一言一行) 일사일념(一思一念)이 모두 법에 있을 수 있고 정념정행(正念正行)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신이 세상에서 법을 실증하고 있음”(《홍음 2》〈두려울 것 뭐냐〉)이다.
이외에 사부님께서는 늘 우리더러 법 공부를 많이 하라고 요구하셨다. 나는 여기에는 모두 원인이 있음을 깨달았다. 법에 부합하는 일체 사상염두는 모두 정념(正念)이며 정념은 법공부에서 온다. 우리가 법을 공부할 때가 바로 관념이 전변되고 정념이 수립되는 것이다.
원래 우리는 모두 속인의 관념으로 문제를 보았는데 지금은 법 공부를 통해 점차 대법으로 문제를 보기 시작했다. 모든 속인의 관념은 다 인간세상의 이 미혹된 환경 속에서 형성된 가짜이치로 대법만이 비로소 우주 진리이고, 대법에 따라 하는 것만이 비로소 일을 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념으로 일을 해야 하는데, 실제 수련 속에서 구체적으로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할 때, 사람마음의 교란 때문에 우리는 때로 정념으로 일하는 것을 견지하지 못하면 결국 일을 잘하지 못하게 된다.
그럼 왜 사람마음이 우리를 교란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사람마음이 정념보다 강하기 때문에 조성된 것이다. 다시 말해 법공부 수련을 통해 일에 부딪힐 때 모두 종종 다 정념이 있지만, 종종 정념이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 이 일을 할 때 관련된 사람마음이 건드려지면 그럼 사람마음이 곧 대뇌를 통제해 신체를 지휘해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한다.
이때 어느 것이 강한지 봐야 하는데 어느 것이 충분히 강하면 그가 대뇌를 통제해 뜻대로 할 수 있다. 만약 정념이 강하면 대뇌를 주재해 대법에 따라 일을 할 수 있고 일을 잘할 수 있다. 만약 사람마음이 강하다면 대뇌를 주재해 사람마음에 따라 하는데 그럼 일을 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념이 강할수록 일을 더 잘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만 정념을 강화할 수 있는가? 바로 끊임없이 법을 공부하는 것으로, 매일 한 차례 법을 배우면 정념에 한 차례 에너지를 강화해주는 것으로 정념이 강해지게 한다. 끊임없이 배우면 곧 끊임없이 정념에 에너지를 강화시켜주는 것으로 정념이 끊임없이 강화된다. 정념이 강할수록 사람마음을 더 억제할 수 있고 대뇌를 더 주재할 수 있으며 대법의 요구에 따라 일을 하게 되어 일을 더 잘할 수 있다.
법을 배울 때는 반드시 진선인(真善忍)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내가 이해하기에 진(真)이란 진지하게 법을 공부하는 것으로 아주 진지한 심태로 법을 배워야 한다. 선(善)이란 바로 완전히 남을 위하는 심태를 출발점으로 삼아 법을 공부해야 하며 내가 법을 잘 배워야 자신의 정념이 더 강해져서 조사정법과 중생구도를 더 잘할 수 있다. 인(忍)이란 바로 법 공부 과정 중에 나타나는 각종 어려움을 견뎌낼 수 있고 주의식을 강화해 졸림, 피로, 한랭(寒冷), 조열(燥熱), 소음, 신체적인 어려움, 사심(私心)과 잡념의 교란 등을 극복하고 단호하게 일체 곤란을 극복해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법을 공부할 수 있어야 한다.
온 마음을 법공부에 집중해야 하며 마음이 법(法)과 서로 통해 하나로 용합되어 진정으로 사부님께서 요구하시는 “법중에 용해”되어야 한다.
법 공부는 정념이 갈수록 더 강해지게 할 수 있고, 안으로 찾아 사람마음을 닦으면 사람마음이 갈수록 더 약해지는데, 이렇게 하면 갈수록 정념이 더 대뇌를 주재할 수 있게 되고 대법에 따라 일을 할 때면 법을 실증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다.
잃음이 있으면 반드시 얻음이 있다. 먼저 잃었다면 반드시 나중에 얻음이 있다. 잃음이 원인이라면 얻음은 결과다. 최종적으로 얻으려면 그럼 잃음이 원인이 되어야 하며 우선 먼저 잃어야 한다. 즉 일에 부딪혀 우선 남을 위해 생각하고 선타후아(先他後我)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주관적으로는 먼저 위타(爲他)하지만 객관적으로 최종에 위아(爲我)의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 남을 이롭게 하는 데서 시작한 일이 결국에는 나를 이롭게 하고 공동으로 이익을 얻는 효과에 도달해 공동의 아름다움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대법의 배치가 있기 때문에 당신이 주관적으로 남을 위하면 최종적으로는 객관적으로 자신을 위하게 되고 위타와 위아가 같은 일이 되는 것이다. 이 역시 대법의 제약과 균형 하에 배치된 것으로 우주생명이 행복과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다. 그러므로 일에 부딪혀 우선 남을 위해 생각하고 선타후아(先他後我)하는 것은 우주 생명의 가장 아름다운 선택이다.
기왕에 선악(善惡)에 반드시 보응이 따른다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모두 자신에게 해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남을 해친다면 이는 곧 자신을 해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자신이 상처받지 않으려 생각한다면 그럼 남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자면 사심(私心)을 포기하고 선심(善心)으로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하는데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자신이 상처를 입지 않도록 보장할 수 있다. 아울러 당신이 남을 잘 대할 때 또 선보(善報)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최종결과는 남도 이롭게 하고 자신도 이롭게 하는 것으로 공동의 아름다움을 실현할 수 있는데 왜 즐겨 하지 않는단 말인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심(私心) 문제에 관하여 내가 방금 전에 당신에게 이 이치를 말했을 때 당신들은 모두 박수를 치면서 마음속으로 아주 기뻐했다. 미래의 우주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문제를 내가 말했을 때 당신들은 모두 기뻐했다. 왜 이럴 수 있는지 여러분은 아는가? 어떤 사람은, 사람이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좌우명으로 삼는다. 사실 당신들은 아직 모르는데, 이 사(私)는 아주 높은 층차에까지 관통되어 있다. 과거, 수련하는 사람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다’, ‘나는 무엇을 하겠다.’, ‘나는 무엇을 얻겠다.’, ‘나는 수련하고 있다’, ‘나는 성불하겠다.’, ‘나는 무엇에 도달해야 하겠다.’고 말하는데 사실 모두 그 사(私)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들이 진정으로 순정(純正)하고, 무사(無私)하여, 진정한 정법정각(正法正覺)으로 원만(圓滿)을 이루는 것인데, 그래야만이 비로소 영원한 불멸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 준다.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당신들은 우선 다른 사람들을 고려해야 한다.”(《스위스법회설법》)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나는 또 당신들에게 알려주겠다. 사실 당신들 이전의 본성(本性)은 위아위사(爲我爲私)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신들이 앞으로 일을 함에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든지, 어떤 말을 하든지, 역시 남을 위하고 후세 사람을 위하는 데 이르기까지 고려해야 한다! 대법(大法)의 영세불변(永世不變)을 위해 고려해야 한다!”(《정진요지》〈불성무루〉)
이상은 현 단계에서 개인의 얕은 인식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7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