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최근 며칠 머리가 늘 맑지 않고 의식이 몽롱했다. 안으로 자신을 찾아보았지만 어떤 원인 때문에 조성된 것인지 찾지 못했다. 동시에 몸이 아주 힘들었고 속으로 심하게 열이 나면서 좀 초조했다. 나는 비록 이런 가상(假象)을 승인하지 않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그대로 했다. 그러나 마음은 늘 착실하지 못했고 마치 공중에 절반쯤 떠있는 것 같았다. 이것이 수련상태의 반응인지 아니면 다른 공간의 교란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막 글을 쓰려고 할 때 갑자기 자신이 밖으로 찾는 상태가 조성한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자신이 이 방면에서 문제가 여전히 아주 큰 것을 발견했는데 늘 남을 좌우지 하려 한다. 특히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다. 아들이 매일 법 공부, 연공을 견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속이 편치 않았고 또 몹시 화가 났다. 남편의 수련상태가 때로 아주 속인화되는 것을 보면 곧 속으로 원망했다. 남편이 나를 실망시켰고 시간을 잘 이용해 수련하지 못하고 늘 속인의 마음이 그렇게 많다면서 원망했을 뿐만 아니라 또 그를 상대하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그는 나와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고 여겼다.
이런 생각이 나올 때 나는 제때 발견하지 못했고 또한 자신이 아주 자비롭다고 여겼다. 나는 이런 상태가 그래도 그를 돕고 그를 참아내는 것으로 여겼는데 하루가 1년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가상에 빠져 진정으로 안으로 찾지 못하니 가정환경은 개변되지 않았고 일체는 여전히 기존처럼 연출되었다. 가정 모순에 아무런 변화도 없거나 때로 더 격렬해지는 것을 보고 나는 내심으로 아주 괴롭고 피곤했다. 내가 어떻게 수련했기에 주변 가족들이 정진하지 못하는 걸까?
그러다가 내가 밖으로 보면서 마도(魔道)로 걸어가는 것을 인식했을 때 이 일체 표현은 바로 나의 사람마음을 겨냥해 온 것임을 알았다. 내 머릿속에 가득 찬 것은 밖으로 찾으며 밖으로 원망하는 것으로 구하려는 마음을 품고 자신의 사욕(私慾)을 만족시키려 했으니 이 역시 바른 장(場)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어찌 천지에 봄이 오게 할 수 있겠는가?
내가 고통과 번뇌로 느꼈던 모든 것은 다 나 자신 때문에 조성된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수련인이 안에서 찾는 이것은 법보(法寶)이다.”(《각지설법 9》〈2009년 워싱턴DC국제법회설법〉)
그러나 나는 모순 앞에서 안으로 찾지 않고 오히려 밖을 향해 원망했으며 법에서 수련하지 않았다. 즉 수련의 길을 바르게 걸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 환경도 개변될 수 없었고 소위 모순과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바르지 못한 상태를 인식했을 때 자신의 관념이 개변되기 시작했고 가급적 자신의 마성을 통제해 밖으로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긴장되었던 신경도 좀 편해졌고 모순이 마치 조금씩 녹아내린 것 같았다. 나는 자신이 제대로 찾았음을 알았고 환경도 마음에 따라 변화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대법제자의 같지 않은 심태(心態)는 환경에 대한 감수(感受)에서도 같지 않으며, 그렇다면 매 사람이 표현해 내는 상태도 곧 같지 않게 된다.”(《각지설법 2》〈2002년 워싱턴DC법회설법〉)
이번에 안으로 찾는 경험을 통해 나는 수련의 엄숙성을 깨달았다. 당신의 일사일념이 모두 법에 있어야 하는데 표면형식을 중시하지 않고 마음의 전변이 중요하다. 또 대법의 순정(純淨)함이 있어야 하며 그 어떤 불순물과 깨끗하지 않은 요소도 대법 앞에서 모두 바로 잡아야 한다. 당신이 엄숙하게 수련을 대하지 못하고 법의 기점에 서서 마주하지 못할 때면, 이때 체현되어 나오는 표현은 바로 당신의 속인마음이 하수도가 막힌 것처럼 순조롭게 흐르지 못하고 끊임없이 위로 오수(汚水)를 뒤집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되올라온 오수가 바로 우리가 장기간 형성한 사람의 관념이다.
법은 일체를 가늠하는 표준이다. 이런 바르지 못한 물질이 폭로되어 나올 때면 대법 앞에서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법 중에 동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법에 의해 해체되고 도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순과 번뇌에 부딪힐 때도 마찬가지로 이런 두 가지 선택에 직면한다.
유일한 해결법은 바로 법의 기점 위에 서서 소위 모순과 문제를 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생명의 선택은 자신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법의 기점에 서 있을 때면 이 생명은 대법이 관할하지만, 법과 대립된 일체는 다 법에 의해 청리된다. 왜냐하면 불법(佛法)은 자비의 일면이 있는 동시에 또 위엄(威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76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