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법제자
【정견망】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당신들의 매 순간은 모두 수련의 길 위에 있으며, 매 순간 모두 내가 당신들을 관리하고 있다.”(《다시 방할하노라》)
매번 이 단락의 법을 볼 때마다 나는 늘 사존의 홍대한 자비에 감싸인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 수련의 길에 사존의 보호가 없다면 우리는 아예 단 한 걸음도 걷기 힘들다.
사부님의 설법과 대조해 마음을 조용히 하고 자신의 수련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매 순간을 수련의 길 위에 있으면서 그 순간을 잘 파악했는가? 혼자 있을 때, 모순에 봉착했을 때, 개인 이익이 피해를 입을 때, 집착 속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힘들 때, 소업 상태에 처해 있을 때, 속인 일속에 있으면서, 법을 실증하는 일에 참여하면서 나는 정말로 매 한 순간을 수련으로 여겼는가?
나는 왜 고험을 만났을 때, 관을 넘길 때 넘어가지 못했는가? 왜 해내지 못했는가? 매번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일종의 고집스러운 관념이 생겨서 그는 눈을 통해 본 것만이 확실하고 확실한 것이라 여기며,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는다. 과거에는 줄곧 이런 사람을 오성(悟性)이 좋지 않다고 여겼는데, 일부 사람은 역시 왜 오성이 좋지 않다고 하는지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전법륜》)는 사부님의 이 단락 말씀을 볼 때마다 나는 비자각적으로 자신의 오성이 그래도 괜찮아서 비록 다른 공간의 장면을 보지 못하지만 대법 속에 들어와 줄곧 현재까지 수련하고 있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가? 늘 “눈으로 본 것만이 확실하다”는 인식과 현실 속에서 형성된 관념에 의해 장애받는다. 관념 속에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이 있는데, 얻으면 좋은 것이고 자아의 명리정(名利情)을 만족시키면 곧 좋은 것이라고 여긴다. 그렇지 않으면 곤란이고 마난이라 여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우리가 실질적으로 잃어버리는 것은 좋지 못한 것인데 무엇인가? 바로 업력으로서, 그것과 사람의 각종 마음은 상보상성(相輔相成)하는 것이다.”(《전법륜》)
하지만 눈으로 보지 못하면서 사부님께서 설법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법리를 믿었는가? 적어도 관을 넘지 못한 그 순간에는 믿지 못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분분히 불평하고, 소극적으로 어쩔 수 없어 하면서, 정념이 없어서 마치 속인처럼 되어 심성을 지키지 못하며 제멋대로 할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수련이란 곧 사람의 사상을 수련하는 것이라 사상에서부터 변해야 한다. 당신의 사상이 어느 정도로 순정하다면 그것이 곧 과위다.”(《전법륜법해》)
얼마 전에 한 가지 일에 봉착했는데 속인이 보자면 이는 곤란에 직면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나는 그것을 번거로움으로 여기지 않았고 구체적인 사건 속에 빠지지 않았다. 비록 표현되어 나오는 것은 아주 곤란하고 해결이 어려운 일이었지만 내가 매 순간 수련 속에 있으며 늘 사부님께서 관리하신다고 생각하자 모든 압력이 흔적도 없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나는 안으로 자신의 어디에 누락이 있고 또 어디를 바로잡아야 하는지 찾았다.
동시에 사부님의 점화 하에 “어디에 문제가 있다면 그곳이 바로 내가 진상을 알릴 필요가 있는 곳이다. 개인의 목적달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상대방을 위한 것으로 그가 진상을 똑똑히 알고 겁난(劫難)을 편안히 지나가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로 그런 일념(一念)을 움직일 때 사부님께서 곧 나를 가지(加持)해주셨다.
나는 상대방에게 진상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나는 그에게 파룬궁(法輪功) 수련생들이 왜 생명의 위험과 잔혹한 박해를 무릅쓰면서 여전히 민중들에게 진상 알리기를 견지하는지 설명해주었다. 편지를 다 쓰고 나서 나는 문득 대법제자의 책임이 무엇인지 아주 똑똑히 감수할 수 있었다.
나는 이 편지를 내가 아는 한 서양인 변호사에게 주면서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는 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알고 또 대법제자가 박해받는 상황을 안다고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편지를 보고 나서 내게 말했다.
“편지를 아주 잘 썼네요! 정말입니다. 나는 정말 당신에게 감사하는데 당신은 정말로 우리를 위하고 있어요. 나는 상대방이 당신의 편지를 보면 명백해질 거라고 믿습니다.”
여기서 나는 한 생명이 진상을 명백히 알고 난 후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평소 우리가 박해받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의 사명과 책임에 대해서는 똑똑히 몰랐다. 다시 말해 우리가 박해 속에서 신앙을 견지하고 진상 알리기를 견지하는 것이 단지 우리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중생이 구도 받을 수 있게 하려는 것임을 몰랐다.
그 순간 나는 또 중생이 속인 사회 속에서 각종 형식으로 대법제자와 접촉하는 과정 속에서 진상을 알고 이를 통해 구도 받을 수 있음을 알았다. 나는 그 며칠간 정말로 일종 자비의 에너지에 휩싸인 느낌을 받았다. 마침 그 시간에 또 전화 진상 활동이 전개되었다. 우리가 상대하는 이들은 중국의 공안, 검찰, 법원 중생들로 그들은 모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박해에 가담한 사람들이다. 이는 우리가 보다 큰 자비심을 닦아낼 필요가 있는데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그들을 마주하고 내심에서 우러나와 그들이 진상을 똑바로 알고 대법의 구도를 받을 수 있도록 희망할 수 있다.
기존의 대다수 시간에 나는 그들을 특수한 진상대상이라고 여겼다. 필경 그들이 박해에 참여했으니 전화를 걸 때도 주로 그들의 박해를 저지하고 더는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고 알려주었다. 무형 중에 그들을 대립면으로 몰아넣었다.
이번에 나는 관념을 전변했다. 모든 생명에 대해 그들이 모두 진정으로 구도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하는 일념을 품었다. 이렇게 전화하자 다시 전화하자 통화 확률이 높아졌고 상대방의 태도도 아주 좋았으며 통화시간도 아주 길었다. 어떤 경우는 20~30분 정도 되었다. 이런 일은 내가 비록 오랫동안 전화 진상을 해왔지만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나는 이것이 사부님께서 나를 격려해주시는 것임을 알았다.
아울러 전화구원 소조의 진상은 직접적인 결과를 보는 경우가 드물고 대개는 전화를 거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전에 나는 줄곧 생각했는데 시간이 오래되었지만 나는 어떤 심태로 전화를 걸었는가? 지금까지 버틴 동력은 무엇인가? 마치 답이 아주 모호한 것 같은데 나 자신도 똑똑히 생각해보지 못했다.
나는 평소 그저 정해진 순서대로 일 하듯이 전화를 걸었다. 말로는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한다고 하지만 중생에 대한 사부님의 자비와 소중히 여김을 나는 또 얼마나 느낄 수 있었는가? 때로 수련상태가 좋지 않으면 나는 또 나태해졌는데 무슨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내가 전화를 거는 과정 중에 이렇게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한다는 사명감을 가진 적이 있는가? 생명에 대해 책임지는 대법제자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책임감을 지닌 적이 있는가? 나는 마치 아주 적게 체험한 것 같았다.
그러므로 이번에 중생을 상대해 진상을 알릴 필요가 있을 때 완전히 상대방을 위한 생각에서 나왔을 때 나는 정말로 수련인으로서 책임을 느꼈고 한마음으로 그들 생명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단지 이 한 사람만이 아니다. 당신이 진실하게 생명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을 때, 당신이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 대해 그들이 진상을 명백히 알고 구도받기를 생각한다면 그럼 긴박감이 저절로 생겨날 것이다. 이는 일종 위타(爲他)한 것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올해 7.20 워싱턴DC 촛불추도회에서 “오직 당신에게 한 가닥 희망의 길을 주기 위해”라는 노래를 들었다. 그렇다, 바로 이런 느낌이다. 우리는 장기간 전화진상 플랫폼에서 전화를 걸어 진상을 알려왔는데 이는 바로 중생에게 한 가닥 희망의 길을 주는 것이다.
최근에 발생한 일을 표면적으로 보면 번거로움에 봉착했지만 실질은 수련에서 제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의 오성(悟性)이 차하기에 사부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나를 일깨워주신 것이다. 매 한 차례 곤란에 직면하면, 언제나 속인의 현실 생활 속에서 발생한 곤란과 번거로움이다. 하지만 수련인으로서 진정으로 우리의 매 한 순간이 수련의 길 위에 있고 매 한 순간 늘 사부님께서 우리를 관리하고 계시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럼 진지하게 자신의 일사일념(一思一念) 일언일행(一言一行)을 반성해야 하며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일이라도 안으로 찾는 과정 속에서 문제를 찾고 언행을 바로잡는다면 각 방면에서 정체적으로 제고될 수 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바로 법을 실증하고 주위의 일체를 개변하는 것이다. 당신 자신을 바로잡으면 주위 사람과 환경 역시 변화한다. 우리가 직면한 일체는 다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봉착한 일 역시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각 환경과 사건 속에서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는, 관찰할 수 있거나 또는 할 수 없는 각종 사람마음과 집착을 폭로한다. 진정으로 법에서 법을 인식할 수 있고 법에서 제고할 수 있다면 그럼 “시시각각 心性(씬씽) 수련하나니”(《홍음》〈진수〉)의 결과가 있을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정법수련 과정 속에서 나는 제한된 소중한 시간을 더욱 다그쳐 법을 잘 배우고 자신을 잘 수련하며 많은 사람을 구해야 한다.
사존의 자비하신 고도(苦度)에 감사드리며 진상전화 소조 동수들의 사심 없는 도움에 감사드린다. 허스!
층차에 한계가 있으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797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