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생
【정견망】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우주 중에는 한 가지 이치가 있는바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하고 얻었다면 당신은 곧 잃어야 하며, 잃었다면 당신은 곧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이다.”(《유럽법회설법》)
내가 이해하기에 당신이 남과 교제할 때 당시 발생한 득실(得失)이 어떻든 대법은 늘 계속해서 이 일을 배치해 일의 최종 결과가 대법이 규정한 원칙에 따라 실현되게 한다.
왜냐하면 “잃었다면 당신은 곧 얻을 수 있기”(《유럽법회설법》) 때문이다. 당신이 남을 위하여 대가를 치를 때면 당신이 잃었기 때문에 대법은 곧 반드시 당신이 보답 받도록 배치할 것이며 당신이 좋은 것을 얻도록 배치할 것이다. 그럼 이 일은 남을 이롭게 함(利他)에서 시작해 자신을 이롭게 함(利己)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위타(爲他)와 위아(爲我)는 앞과 뒤가 하나로 연대된 것으로 동일한 일의 앞과 뒤 두 부분으로 같은 한 가지 일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오직 남을 위하기만 하면 곧 무엇이든 다 있을 수 있다. 비록 당신이 남을 위해 대가를 치를 때 보답을 추구하는 생각이 없을지라도 대법은 오히려 당신이 헛되이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으며 반드시 당신이 보답 받도록 배치한다. 왜냐하면 잃었으면 반드시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법이 정한 원칙이다.
잃었다면 얻어야 하기 때문에 당신이 만약 선량하게 남을 도와 대가를 치렀다면 당신은 잃은 일방(一方)에 속한다. 그럼 대법은 곧 당신에게 보답을 배치해 당신이 선보(善報)를 얻게 한다. 왜냐하면 잃었으면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악행(惡行)을 저질러 남을 다치게 했다면 당신은 얻은 일방(一方)에 속한다. 그럼 대법은 곧 당신더러 장차 잃게 하며 당신에게 악보(惡報)를 배치한다. 이렇게 또 한 가지 이치가 형성되는데 바로 선에는 선보(善報)가 있고 악에는 악보(惡報)가 있다. 다시 말해 선악에는 반드시 보응이 따르게 된다.
그럼 여러분 생각해보라, 당신이 선을 행하든 또는 악을 저지르든 대법은 늘 당신에게 보응을 배치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이 무엇을 하든 결과는 모두 자신이 한 일을 스스로 받는 셈이다. 다시 말해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모두 자신에게 한 것과 같다. 당신이 남을 선(善)하게 하면 이는 곳 자신에게 선한 것과 같고 당신이 남을 악(惡)하게 하면 곧 자신에게 악한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일체는 다 당신 자신이 촉성한 것이니 남을 원망해선 안 된다. 대법의 이런 배치는 곧 아주 공평하고 합리적이다. 이는 바로 대법 지혜(智慧)의 한 가지 체현이다.
먼저 잃었으면 반드시 나중에 얻음이 있으니 이때 잃음은 인(因)이 되고 얻음은 과(果)가 된다. 최종적으로 얻으려면 잃음을 인(因)으로 해야 하며 먼저 잃어야 한다. 즉 일에 봉착해 우선 남을 위해 생각해야 하며 선타후아(先他後我)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당신이 주관적으로 먼저 위타(爲他)하면 객관적으로 최종적으로는 대법이 배치한 보응을 얻게 된다. 결국에는 또 위아(爲我)의 결과에 도달하는데 남을 이롭게 하는 데서 출발해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끝나며, 공동으로 이익을 보는 효과에 도달하고 공동의 아름다움을 실현한다.
다시 말해 대법에는 배치가 있어서 당신이 주관적으로 남을 위한 것이 최종에는 객관적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 되며 위타(爲他)와 위아(爲我)가 같은 일이 된다. 이 역시 대법의 제약과 균형 하에 배치된 것으로 우주 생명이 행복하고 아름다워지는 첩경이 바로 선타후아(先他後我)다.
대법의 이런 배치는 우주 생명 사이에 운명 공동체를 이루게 한다. 다시 말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교제하면서 어떤 일이 생길 때, 이 일에서 대법은 당신과 상대방의 운명을 같게 만든다. 당신이 그를 위할 때 대법은 장차 당신에게 좋은 보답을 배치하며, 최종적으로 당신들 둘이 이 일에서 모두 좋게 되고 모두 운이 좋아진다.
반대로 , 당신이 그에게 나쁘게 대할 때면 대법은 장차 당신에게 나쁜 보답을 배치하는데 최종적으로 당신들 둘이 이 일에서 모두 나쁜 것을 얻고 모두 운이 나빠진다.
그러므로 당신이 남과 교제하는 가운데 혼자만 좋은 것을 얻으려 한다면 근본적으로 실현불가능하다. 좋아지면 다 좋아지고 나빠지면 다 나빠진다. 자신이 좋은 것을 얻으려면 먼저 반드시 남에게 잘해야 한다. 먼저 남이 좋아지게 하면 나중에는 자신이 좋아진다. 다시 말해 선타후아(先他後我)를 해내야 하는데 이렇게 해야만 실현할 수 있다.
반대로 당신이 사심(私心)을 움직이고 선아후타(先我後他)하면 그럼 당신이 상대를 해쳐 장차 악보를 받게 되는데 이렇게 하면 당신이 행복과 아름다움을 얻을 수 없다.
당신과 남의 운명이 일체를 이루기 때문에 같은 한 가지 일에서 운명이 서로 같아진다. 만약 당신이 자신이 좋아지려면 그럼 우선 남을 좋아지게 해야 한다. 반드시 선타후아(先他後我)의 방식으로 실현해야만 하는데 바로 선(善)의 방식으로 실현해야 한다. 대법의 이런 배치는 한 생명의 아름다움과 선량을 하나로 연결시킨다. 다시 말해 당신이 행복과 아름다움을 얻고자 한다면 당신은 우선 선량하고 위타(爲他)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한 생명이 설사 자신의 행복과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도 일에 부딪혀 우선적으로 선량하고 위타하게 만드는데 시종 위타를 위아의 앞에 놓도록 만든다.
대법이 이렇게 배치한 결과, 한 신(神)이 시종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 할 수 있다면 영원히 떨어져 내려가지 않을 것이며 영원불멸(永遠不滅)에 도달할 것이다. 다시 말해 오직 대법이 원용불멸하기만 하면 우주는 불멸하고 신(神)도 불멸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속인은 일부 마찰이나 조그마한 일도 아주 큰 것으로 여기고, 산다는 것이 바로 체면을 위한 것이라 여기는데, 참지 못해 극도에 이르면 아무 짓이나 저지른다. 그러나 연공인으로서, 남이 아주 대단하게 여기는 것이 당신에게는 아주 작게, 아주 작게, 아주아주 작게 보인다. 왜냐하면 당신의 그 목표는 참으로 장원(長遠)하고 원대(遠大)한 것으로서, 당신은 우주와 같은 나이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다시금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며, 당신이 크게 생각하면 그런 것들은 다 지나칠 수 있다.”(《파룬궁》)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심(私心) 문제에 관하여 내가 방금 전에 당신에게 이 이치를 말했을 때 당신들은 모두 박수를 치면서 마음속으로 아주 기뻐했다. 미래의 우주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문제를 내가 말했을 때 당신들은 모두 기뻐했다. 왜 이럴 수 있는지 여러분은 아는가? 어떤 사람은, 사람이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좌우명으로 삼는다. 사실 당신들은 아직 모르는데, 이 사(私)는 아주 높은 층차에까지 관통되어 있다. 과거, 수련하는 사람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다’, ‘나는 무엇을 하겠다.’, ‘나는 무엇을 얻겠다.’, ‘나는 수련하고 있다’, ‘나는 성불하겠다.’, ‘나는 무엇에 도달해야 하겠다.’고 말하는데 사실 모두 그 사(私)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들이 진정으로 순정(純正)하고, 무사(無私)하여, 진정한 정법정각(正法正覺)으로 원만(圓滿)을 이루는 것인데, 그래야만이 비로소 영원한 불멸(圓容不滅)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 준다.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당신들은 우선 다른 사람들을 고려해야 한다.”(《스위스법회설법》)
구우주의 근본 속성은 위사위아(爲私爲我)하기에 성주괴멸(成住壞滅)할 수 있지만, 신우주의 근본속성은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하기 때문에 원용불멸(圓容不滅)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우주의 생명이 되려면 반드시 무사무아 선타후아의 정각(正覺)을 닦아내야 한다.
한 사람의 진정한 생명은 주원신(主元神)으로 선량(善良)은 당신 생명에 대해 오직 좋은 점만 있고 나쁜 점이란 없다. 반대로 자사(自私)는 당신 생명에 대해 좋은 점은 없고 오직 나쁜 점만 있다.
자사(自私)한 사람은 인간세상에서 뭔가 대가를 치르지 않고 좋은 점을 얻으려 하거나 또는 이익을 차지하려 하는데 대가를 적게 치르고 많이 얻으려 한다. 사실 모두 다른 공간의 덕(德)으로 교환하는 것으로 실질적으로 공짜로 얻는 것이란 없고 진정으로 이익을 차지하지도 못한다. 아울러 자사한 행동은 또 스스로 남을 해치게 만들어 장차 대법이 배치한 악보를 받을 수 있다.
선량한 사람은 주동적으로 대가를 치러 장래 대법이 배치한 보응을 받는데 덕을 잃지 않는 정황에서 좋은 보답을 얻는데 이렇게 해야만 진정으로 좋은 점을 얻을 수 있다.
이점을 명확히 한 후 오직 진정으로 이성적이고 청성(淸醒)한 생명이라면 반드시 선량을 선택하고 자사(自私)를 버릴 것이다. 하지만 실제 일에 봉착할 때면 당신은 그래도 선량을 해내지 못하고 여전히 자사를 표현할 수 있다. 원인은 당신 공간장 속의 닦아버리지 못한 자사자리(自私自利)의 관념과 후천적으로 형성된 자아(自我)가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일에 봉착했을 때 그것들이 당신이 선량해지는 것을 가로막고 당신을 통제해 자사한 행위를 하게 만든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무사무아 선타후아에 따라 닦아야 한다.
내가 이해하기에 무사무아(無私無我)란 사상염두를 가리키는데 다시 말해 자사자리(自私自利)의 관념과 후천적으로 형성된 자아를 모두 공간장 속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은 사상 속에서 오직 그것들이 발견되기만 하면 곧바로 깨끗이 제거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층을 나눠 존재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제거해야 한다. 각종 관념과 집착은 모두 자아를 둘러싸고 형성된 것이다. 자아가 근본 뿌리고 그것들은 가지와 말단이다. 그것들은 자아와 연대된 일체로 모두 자아와 마찬가지로 대해야 한다. 일단 발견되면 곧장 제거해야 한다.
또 선타후아(先他後我)란 행위를 가리키는데 다시 말해 실제로 일에 봉착했을 때 단호하게 우선 남을 위해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장기간 견지해나가면 당신은 곧 갈수록 더 무사(無私)해지고 갈수록 더 선량해질 것이며 직접 무사무아 선타후아의 표준에 도달해 신우주의 신(神)이 되고 “영원히 불멸”(《스위스법회설법》)할 것이다.
군체(群體)사회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교제할 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선량(善良)과 자사(自私)의 문제다. 다시 말해 실제 일에 봉착했을 때 당신은 종종 한 가지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위타(爲他)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위아(爲我)를 선택할 것인가?
우리 수련인에 대해 말하자면 이 역시 가장 근본적인 심성문제로 그 어떤 사람을 만나든 우리는 늘 위아와 위타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설사 박해받는 환경 속에 처해서 경찰을 마주할 때라도 우리는 마찬가지로 이런 선택을 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위아(爲我)를 선택한다면 어떻게든 박해를 끝낼 방법을 생각하고 자신이 벗어나고자 할 텐데 다시 말해 자사를 선택한 것이고 악념악행(惡念惡行)을 선택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대법의 요구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구세력은 곧 이를 구실로 박해를 지속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위타(爲他)를 선택하고 경찰이 구도 받을 수 있기를 생각하며 발정념으로 경찰을 박해하는 사악을 제거하고 진상을 알려 경찰을 구도한다면 그럼 곧 선량을 선택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대법의 요구에 부합하기에 박해는 반드시 중단될 것이다.
선량을 선택함은 법에 서 있는 것과 같아서 사부님께서 당신을 위해 주관하실 것이고 대법이 당신을 위해 길을 열어줄 것이다. 그 누구도 당신을 움직일 수 없고 그 누구도 당신을 가로막을 수 없다. 선량을 지키고 끝까지 선할 수 있다면 법을 실증하는 일체 일을 잘해 대법제자의 역사사명을 완성하고 최종적으로 신우주의 각자(覺者)가 되어 “영원히 불멸”(《스위스법회설법》)할 것이다.
이상은 현 단계에서 작은 깨달음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8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