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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를 잘해 구세력이 틈을 타지 못하게 하자

미국 대법제자

【정견망】

오늘 “안으로 찾고 수구를 말하는” 심득교류회에서 자신이 수련한 길을 돌아보면 특히 수구 방면에서 인식이 점차적으로 깊어진 것 같다. 어떤 방면에서는 잘했고 어떤 방면에서는 잘하지 못했다. 특히 중국대륙의 그런 사악한 환경 속에서 자료점을 하면서 동수의 안전을 위해 수구를 아주 중시했고 사악한 환경 하에서는 아주 잘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정황에서는 오히려 잘하지 못했다. 주로 직장이나 가정 및 동수들 간의 모순으로 표현된다.

내가 다니는 회사의 총회(總會)에서 중국대륙에서 온 직원을 몇 명 뽑았다. 일부 직원들은 이기적이고 교활했다. 특히 어떤 사람은 대법진상을 아예 들으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 중공사당과 같은 편에 서서 대법을 반대했다. 나도 그들을 개변시킬 힘이 없자 이렇게 서로 반감(反感)을 갖고 서로 배척했다. 동료들이 이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할 때면 나도 덩달아서 냉담하고 신랄하게 한마디 하곤 했다. 이렇게 하면 옳지 않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입을 단속하지 못했고 말을 해야만 속이 시원했다. 지나고 나면 또 후회했다. 왜 이럴 수 있는가?

사부님께선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불가에서 말하는 수구(修口)란, 말하자면, 사람의 말은 모두 사람의 사상의식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사상의식은 바로 유위(有爲)이다. 사람의 사상의식 자체가 생각을 움직이려 하고, 무엇을 좀 말하려 하거나 무엇을 좀 하려면, 사람의 감각기관ㆍ사지를 지배하는데, 속인 중에서는 일종의 집착일 수 있다.”

​이 단락 법을 통해 나는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하려고 하는지 명백해졌다. 바로 자신이 사람마음의 집착에 이끌린 것이다. 동료가 이기적이고 행실이 단정하지 못해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고, 동료들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걸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으며, 동료가 중공과 같은 편에 서자 증오하는 마음이 있었고, 일을 잘하지 못하면서도 나와 같은 월급을 받는 것을 보고는 질투심이 생겼다. 이외에도 과시심, 쟁투심, 자아를 실증하려는 마음 등이 있었다. 동료의 좋지 않은 행동이 나의 이렇게 많은 사람마음을 폭로시켰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여러분 알다시피, 지상의 사람은 대다수 천상에서 왔을 뿐만 아니라 많게는 천상에서 파견해 내려온 대표로서, 그 한 곳(一方)의 천체, 그 한 곳 우주의 중생들을 대표하고 있는데, 목적은 최후에 구도 받기 위해서다.”(《2010년 뉴욕법회설법》)

법(法)에서 나는 세인은 대부분 천상의 왕이나 주가 대법에 대한 견정한 신념을 품고 천담(天膽)을 무릅쓰고 세상에 내려와 법을 얻어 구원받으러 왔음을 안다. 층층 아래로 내려오는 가운데 더는 순결하지 않게 되었고 여기에 중공의 기만과 당문화의 주입이 더해지자, 한 위대한 신이 인간세상에서 이기적으로 변하고 타락한 것이다. 나는 마땅히 법속에서 사람의 본질을 보아야 하며, 주변 세인들을 소중히 여기고 자비로 포용해야지 배척하거나 반감을 갖지 말아야 한다.

가정에서도 때로는 수구하지 못한다. 가족은 내 친인(親人)이라 여기며 자신에 대한 대법의 요구를 느슨히 하면서 자신의 인식과 관념을 견지한다. 그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자아를 실증하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보지 못한다. 이 상태로 시간을 오래 끌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어느 노(老)동수와 함께 법을 공부하다가 비로소 수구의 중요성을 천천히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 법 공부 소조의 노동수가 나 때문에 반응이 느려졌고 법 공부하면서 지속적으로 글자를 틀리거나 빼먹었다. 글자를 틀리게 읽는다고 몇 번 일깨워준 후 나는 좀 귀찮아졌고 말투도 선(善)하지 못했다. 다시 법을 배울 때 그녀와 법을 공부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나는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노동수를 대하는가? 왜 짜증을 내는가? 나는 자신의 사상과 염두를 자세히 조사해보았다. 자신에게 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마음과 동수보다 위에 있다는 마음, 초조하고 선하지 못한 마음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수련해왔고 또 속인에게는 늘 자비로운데 왜 동수에 대해서는 자비롭지 못한가? 단지 그녀가 법을 잘 읽지 못했을 뿐인데 법을 잘 읽지 못한다고 수련한 층차가 낮은가? 법을 잘 읽는다고 수련을 잘한 것인가? 층차가 높은가?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다.

“수련 층차의 높고 낮음은 한 사람의 心性(씬씽)의 높고 낮음을 보아야 하는바 이는 절대적이다.”(《오스트레일리아법회설법》)

노동수는 날마다 법 공부를 견지하고 있고 세 가지 일도 잘한다. 이는 감동적이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정념(正念)이 아닌가? 나는 가족의 작은 결점을 보면 곧 반감을 품는데 흉금이 너무나도 작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慈悲(츠뻬이)는 천지에 봄이 오게 하고
정념은 세상 사람을 구하는도다”

(《홍음 2》〈법정건곤〉)

자신의 사람마음이 정체(整體) 속에 간격을 일으켰는데 이는 자아를 실증하는 것으로 마가 틈을 타서 정체를 교란하기가 더욱 쉽다.

또 한 가지 수구에 관해 비통한 교훈이 하나 있다. 동수 A는 같이 사는 몇몇 동수들과 장기간 모순 속에 있었다. 모두들 표면적인 옳고 그름만 중시하고 무조건 안으로 찾지 않으니 모순이 갈수록 더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동수 A가 더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이사 가려고 나더러 방을 좀 알아봐달라고 했다. 나는 동수 B를 만나 동수 A의 상황을 들려주고 그녀가 이사 갈 집을 좀 알아봐달라고 했다. 그러자 동수 B는 이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다. 나중에 그녀는 또 동수 A의 룸메이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모순이 더 첨예화되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하에서 A는 기간을 앞당겨 이사 가는 수밖에 없었다.

대략 4~5개월 후 B 동수를 만났는데 안색이 초췌했다. 그녀는 내게 자신이 수구를 잘하지 못해서 동수들 사이에 모순이 발생하게 했다고 울면서 호소했다. 나는 그녀와 잠시 교류하고 다음 주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얼마 후 그녀는 병업관이 나타나 병원에 보내져 응급치료를 받았다. 결국 정념으로 넘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동수가 세상을 떠난 데는 수구의 요소가 있는데 최종적으로 사악에게 틈을 탈 구실을 주었다. 이는 한 가지 비통한 교훈이다.

이상은 현 단계에서 수구에 대한 나의 작은 인식과 이해이다.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9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