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선(美善)
【정견망】
어느 날 갑자기 벌 한 마리가 창문 처마에 둥지를 튼 것을 발견했다. 나는 단순히 꿀벌이라고만 생각했다, 와! 꿀벌이 오다니 기분이 좋구나. 꿀벌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항상 긍정적인 작은 곤충으로 평판이 좋고 근면함의 화신이며 양조된 꿀은 맛있고 달콤하며 사람들이 좋아하며 인류에게 복을 준다고 칭찬한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이 벌은 꿀벌이 아니라 말벌이었다. 말벌은 사람들의 인상 속에서 난폭하고 난폭하다. 조급하고 사람을 공격하기 쉽고 평판이 좋지 않기 때문에 ‘벌집 쑤시기’는 종종 ‘끔찍함’의 대명사가 되며 꿀을 만들 줄도 모르고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멀리 숨는 경우가 많다.
이에 나는 원래 형성되었던 관념과 인상에 따라 움직였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도 좀 다르게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에게 일정한 공간을 남겨주었다. 다른 창문을 작게 열어서 둥지를 짓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했다.
말벌은 번식이 매우 빨라, 지금은 대략 십여 마리의 말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많은 말벌들이 또 늘어나고 벌집도 점점 커지는데 어떻게 하지?
아들이 왔기에 내 걱정을 말해주자, 아들이 말했다.
“사람이 그것을 해치지 않으면 그것도 사람을 공격하지 않아요. 그것도 익충이고 농작물에 도움이 됩니다. 둥지를 틀 위치를 선택하는 것도 안전하고 조용한 환경을 선택하는 거예요.”
이렇게 말하니 그것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기로 했다는 것은 아마도 이곳이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나의 이런 사람마음과 관념을 내려놓아야 한다. 흉금이 그렇게 넓지 못해서 작은 생령(生靈)에게 마음이 움직인단 말인가? 그리고 또 차별하는 마음이 있었다. 누가 평판이 좋으면 나도 좋아하고, 누가 평판이 나쁘면 싫어한다. 이건 명예를 생각하는 마음이고, 차별하는 마음이 아닌가? 꿀을 만들 수 있으면 좋아하고, 꿀을 만들 수 없으면 좋아하지 않으니 이건 또 이익심이 아닌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또 정(情)이 아닌가?
자신을 대조해 보면, 현실 생활 속에서 우리는 또 이런 마음이 있는 게 아닌가? 어떤 사람이 사회적 지위가 높고 명성이 크면 중시하고 우러러 보지만, 어떤 사람이 저층에 살거나, 이름 없는 사람이면 무시한다. 어떤 사람이 기술이나 기예 수준이 높으면 감탄하고, 어떤 사람이 기술과 솜씨가 없으면 무시한다.
진상을 말할 때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진상을 말하길 원하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진상을 말하고 싶지 않다. 또한, 어떤 사람이 말하기 좋다고 생각되면 그에게 말하고 싶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 어려우면 말하기 싫어한다. 자신이 어떤 곳이 진상자료를 보내기에 좋다고 생각되면 가고, 어떤 곳이 보내기가 어려우면 가기가 꺼려진다.
이런 상황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이렇게 좋거나 싫어함, 말하기 좋아하거나 말하기 싫어함, 배포하기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 역시 자신의 선택하는 마음, 차별하는 마음이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정말 안으로 마음을 잘 파봐야 한다. 매사에 수련의 상태로 일체를 대하는 것이 가장 좋다.
자연계의 생명과 서로 평안하고 무사하게 지내며, 사람이 대자연과 조화롭게 지내는 것 역시 일종의 즐거움이다. 만물은 모두 영(靈)이 있다. 보아하니. 이 작은 생령 역시 사람에게 일종의 깨달음을 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7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