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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제자가 사부님 은혜를 회억하다

장춘 대법제자

【정견망】

(1) 두 차례 사부님의 기공강연을 듣고 천목으로 본 장면

1992년 여름, 나는 사부님의 두 차례 기공강연[역주: 원문에는 대공보고(带功报告)로 되어 있음. 기공 열조가 일어날 때 기공사가 자신의 공력을 사용해 청중들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는 의미로 이렇게 불렀다. 우리말로 하자면 기공사가 자신의 공법을 소개하는 강연에 해당]을 듣고 몹시 흥분했다.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강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에는 또 책이 없어서 그냥 좋다고만 여겼다.

어느 날 정오에 일어나자마자 눈을 떴는데, 수정신발 한 켤레가 내 앞을 지나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완전히 투명했는데 마치 수정같이 깨끗했고 아주 아름다웠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이렇게 똑똑하고 진실할까!’

막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앞에 파란색 표지의 책 한 권이 펼쳐졌다. 책은 단번에 중간까지 넘겨진 후 멈췄다(나는 후에야 나중에 출간된 《파룬궁》이란 책임을 알았다.) 이것은 내가 천목(天目)으로 본 최초의 광경이다. 사실 그때 사부님께서는 이미 나를 관할하고 계셨던 것이다. 나더러 밝은 길을 잘 걸어가고 이 책과 이 법을 잘 배우라고 격려하신 것이다.

(2) 사부님의 학습반에 참가한 후 천목으로 본 장면

나는 1992년 9월 8일부터 17일까지 길림성 성위원회 강당에서 사부님께서 주최하신 설법 학습반에 정식으로 참가했다. 학습반에서 나는 사부님의 금빛 찬란한 신체에서 금빛을 발산하는 것을 보았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사부님 사진을 손에 들고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사부님을 보려고 생각했다. 그때 다른 생각은 없었고 그냥 사부님을 보고 싶었다.

갑자기 사진이 변했는데, 마치 내가 어느 공간에 들어간 것 같았다. 사부님은 서양인 형상으로 변하셨는데, 코가 크고, 눈이 깊었으며, 얼굴이 갸름하고 엄숙한 전형적인 서양인의 얼굴이셨다.

장면이 계속 바뀌면서, 나는 또 사부님께서 중국인의 형상인 것을 보았는데 아주 젊었고 중산복(中山服 역주: 흔히 인민복이라고도 하는데 손문 선생이 만들었다.)을 입고 계셨다. 이어서 나는 또 사부님께서 손오공으로 변하신 것을 보았다. 나는 감히 더 이상은 볼 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진이 어떻게 변할 수 있지, 게다가 늘 뒤집히는데, 진짜일까 가짜일까? 그래도 이건 사부님인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나는 여태 이런 걸 본 적이 없는데.’

나는 사부님 사진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내 사진을 손에 들고 다시 시도해보았다. 아무 생각도 없이 가만히 보고 있는데 이때 장면이 또 뒤집어졌다. 나는 남자로 변했는데 민머리에 쌍꺼풀이 있었는데 아주 젊고 잘생겼다. 나는 왠지 역사상의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계속 장면을 따라가 보니 이번에 나는 또 여자로 변했다. 젊고 아주 예뻤는데, 옷차림도 부귀하고 화려했다. 다음에도 또 여자로 변했는데 여전히 꽤 예뻤다.

나는 당시 생각했다.

‘나는 어째서 갈수록 더 못생겨진 걸까, 지금의 내 외모는 예전만큼 예쁘지 않아.’

나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는데 아마 속으로는 이게 진실일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본 것은 모두 눈을 뜨고 보았고 또한 아주 진실하고 또렷했기 때문이다. 보고 난 후 나는 가장 친한 친구한테만 이 말을 했고 다른 사람한테는 감히 꺼내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본 것이 정말 맞는 건지 틀렸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는 아주 수련 초기라서 아는 게 많지 않았다.

(3) 사부님 댁에 가다

사부님의 기공강연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동수가 나와 내 아들을 사부님 댁에 데려갔다. 사부님 댁은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아주 낡은 건물 4층에 있었다.

우리가 사부님 댁에 들어가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복도였다. 오른쪽에 작은 부엌이 있었는데 아주 간단한 몇 가지 주방기구들이 있었는데 아주 깨끗했다. 복도에서 안으로 들어가니 방이 있었는데 바깥방은 거실이고, 안방은 침실이었다. 방은 모두 그리 크지 않았다. 실내에는 몇몇 수련생들이 사부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거실에서 기다렸다.

내가 사부님 댁 거실을 자세히 보니 벽에 걸린 몇 폭의 그림들이 나를 깊이 매료시켰다. 한 폭은 여불(女佛)의 그림인데 여러 층으로 된 연화좌(蓮花座) 위에 단정히 앉아 빛을 방사하고 있었다. 다른 한 폭은 도가(道家)의 그림이었는데 도가의 복식을 입고 있었고 신체 주위에서 불꽃같은 빛이 방사되어 나왔다. 또 한 폭은 손오공 그림이었다.

이때 동수가 내게 말했다.

“이 그림들은 사부님께서 크레용으로 그리신 겁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반문했다.

“아이들이 쓰는 크레용으로 그리셨다고요?”

동수가 그렇다고 했지만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섬세하게 진짜처럼 그릴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 눈빛이며 동작이 아주 생생해서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속으로 사부님을 숙연히 존경하게 되었다.

이때 몇몇 동수들이 방에서 사부님과 함께 나왔다. 우리는 혹시라도 사부님께 영향을 줄까 봐 밖에 나가서 사부님을 기다렸다. 사부님께서 몇몇 동수들을 배웅하신 후, 동수가 나와 내 아들을 사부님께 소개드렸다. 사부님께서는 나와 아들 앞에 서서 나와 아들의 머리 위를 바라보시더니 “아주 좋네요”라고 한마디 하셨다.

당시 파룬궁(法輪功)은 기공의 형식으로 전해지고 있었고, 나는 초기에 사부님에 대한 인식이 얕았다. 나는 사부님을 그저 아주 바르고 아주 바른 기공사로, 다른 기공사들과 다르다고만 여겼다. 나는 비록 당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이 몇 글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사부님께서 나와 아들에게 긍정적인 말을 해주신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4) 불이법문의 엄숙성

사부님께서는 1992년 9월 장춘 길림성 당위원회 강당에서 학습반을 마치신 후 북경으로 전법반(傳法班)을 꾸리러 가셨다. 우리는 사부님을 배웅한 후 각자 자기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정말 난잡하고 엉망진창인 기공반이 아주 많았는데, 이런 것들이 모두 사부님께서 학습반을 꾸리시는 시기에 나타났다. 또 무슨 우주어(宇宙語)를 전하는 것도 있었다. 나는 누가 배우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는데 보고 나서 큰 반감이 생겼다. 그것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고 배우고 싶지 않았으며 이건 부처님과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럼 부처님은 어디에 계실까? 맞아, 사찰에 불상(佛像)이 있지. 나는 이에 사찰에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동수가 나를 절에 데려간 후, 귀의했고 또 무슨 증서도 받았다. 무슨 법호(法號)도 받았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사부님께서 댁에 계시지 않으니 일찌감치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잊어버리고 어떻게 수련해야 할지 더욱 몰랐던 것이다. 당시 나는 오성이 너무 차했다. 사부님께서 내게 이미 많은 진실한 장면들을 보여주시고 격려해 주셨음에도 나도 모두 뒷전이었던 것이다.

사부님께서 북경에서 돌아오시자 우리는 사부님을 마중하러 나갔다. 나는 사부님과 같은 차에 탔는데, 사부님께서는 매우 엄숙하셨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나와 다른 동수는 감히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대체로 나는 속으로 자신이 잘못했고 절에 가서 귀의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중에 명백해졌을 때 생각해보니 사부님께서는 분명 우리가 전일(專一)하게 수련하지 않고 함부로 해서 파룬(法輪)마저 변형시킨 것을 보시고 슬프셨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길림대학 강당(명방궁)에서 또 연속 2회에 걸쳐 설법반을 여셨다. 이번에 나는 정말로 듣고 나서 똑똑히 알았다. 내가 어디서 잘못했는지, 불이법문의 엄숙성과 불이법문에서 나온 문제가 얼마나 위험한가 하는 등 많은 법리를 알게 되었다. 나는 당장 귀의증서를 버렸고 앞으로는 오직 파룬따파(法輪大法)만 수련하기로 결심했다.

두 차례 학습반이 끝난 후, 나는 사부님께 드리는 심득체회에 두 줄로 이렇게 썼다.

“사부님은 오직 리훙쯔 뿐이시고, 마음속에는 오직 파룬궁뿐입니다.(師父只有李洪志,心中只有法輪功)”

사부님께서 길림대학에서 학습반을 개최하신 기간에 1백여 명의 병을 치료해주시자 사람들이 긴 줄을 섰다. 사부님께서는 길림대학 연공장을 직접 선정해 장소를 정화시켜 주셨다. 천목이 열린 수련생이 보니 연공장 위로 온통 붉은 빛으로 덮여 있었고, 또 사부님 법신께서 장을 지켜보셨으며, 수많은 파룬이 상공에서 회전했다. 동수는 이 장소에서 늘 기념사진을 찍곤 했는데 사진에서도 신기한 장면들이 아주 많이 나타났다.

(5) 사부님의 긍정과 점화

초기에 천목으로 본 상황을 나는 감히 사부님께 말씀드리지 못했다. 그러다 친구 동수가 북경에 계신 사부님과 전화 통화를 하다가 내가 본 상황을 말씀드리자, 사부님께서 그 수련생에게 말씀하셨다.

“그녀는 나의 이전 몇 생을 보았고 그녀가 본 것은 진실입니다.”

나는 이때서야 비로소 찜찜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 장춘에 돌아오셨을 때, 나는 또 한 번 다른 수련생 집에서 사부님을 뵈었다. 내 기억에 사부님께서는 침대 위에 앉아 계셨고, 우리는 바닥에 앉아 사부님을 올려다보았다. 수련생이 사부님께 (나를 가리키며) “그녀가 사부님의 상황을 봤습니다.”라고 말하자 사부님께서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한번 말해보세요.”

나는 이에 내가 보았던 사부님의 모습을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하지만 나 자신을 본 일은 말씀드리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본 게 맞습니다.”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나는 좀 이해되지 않았고 또 슬펐다.

“왜 그렇게 많은 고생을 겪으셔야 했을까? 왜일까?”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분명하게 몰랐는데, 단지 인연을 맺기 위한 것 같았지만 더 깊은 것은 여전히 똑똑치 않았다. 그러다가 사부님의 〈진수(真修)〉 경문이 발표된 후에야 나는 비로소 애초 사부님의 점화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사부님께서는 원래 우리를 구도하시기 위해 그렇게 많은 고생을 겪으셨던 것이다. 물론 사부님께서 이곳에 오신 의미는 절대로 단지 이런 것뿐만은 아니다. 나는 매번 이 경문을 볼 때마다, 매번 사부님의 초기 점화를 생각할 때마다, 매번 사부님께서 중생을 위해 겪으신 고통과 정법(正法)을 위해 감당하신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체를 생각할 때마다 늘 눈물이 흘러내리곤 한다.

(6) 공항 대합실에서 사부님의 점오

1994년 장춘에서 학습반을 끝내신 후, 사부님께서는 연길(延吉)로 설법하러 가셨다. 나는 일부 동수들과 사부님을 배웅하러 공항에 나갔다. 공항 대합실에서 사부님께서 의자에 앉아 계셨고 우리는 사부님 주변에 둘러앉아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시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때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오발사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다음은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1976년, 당시 사부님께서는 부대에 근무하셨는데 9월 9일(역주: 이날 모택동이 사망했다), 긴급 임무가 있다면서 야간에 비상소집이 있었다. 모두들 한 줄로 섰고 쥐 죽은 듯이 조용했는데 분위기가 몹시 긴장되었다. 이때 사부님께서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노리쇠를 만졌는데 “펑”하는 소리와 함께 사부님의 총에서 총알이 발사되었다. 이 때문에 사부님은 비판 당하셨다.

여기까지 말씀하신 후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당신을 망신시킨 겁니다.”

나는 당시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들려주시는 이야기는 절대 함부로 말씀하시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설법하고 우리를 점오(點悟)해주신 것이다.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한 한 층의 법은 바로 우연한 일이란 없으며 설사 아주 사소한 일이나 또는 무의식적인 행동 하나조차 모두 우연하게 발생하는 게 아니란 점이다. 나는 마치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앞으로 당신이 망신당하는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물으시는 것 같았다.

과연, 이후 수련 중에 이렇게 남에게 망신을 당하는 일을 정말로 만났고 나는 사부님께서 하신 법을 떠올렸다. 우연한 일이란 없으며 반드시 인연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련인의 표준에 따라 담담히 마주하고 내려놓아야 한다.

끊임없이 수련해나감에 따라 나는 점차 우리의 정법수련이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고 정법하며 중생을 구도하시는 것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그저 조사정법(助師正法)하는 정법시기 대법제자일 뿐이며, 수련 중에는 여전히 제거해야 할 집착이 있다. 하지만 각종 구실로 사부님께 안배한 번거로운 일들은 모두 구세력이 한 짓으로 이는 사부님의 정법에 대한 교란과 파괴이다.

사부님께서 비행기에 탑승하실 시간이 다가왔고 나는 문득 사부님께 여쭤볼 한 가지 일이 있다는 생각이 났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사부님을 보기만 하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전히 머리가 텅 비었다. 나는 곧바로 늘 나와 함께 다니던 동수에게 물었다.

“내가 무엇을 여쭤봐야 할지 생각나도록 도와줘요.”

내가 동수에게 생각났는지 묻자 그녀가 곧바로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나를 가리키며) 그녀가 연공할 때 왜 두 발에서 서늘한 기운이 나오는 걸까요?”

사부님께서 나를 보시더니 잠시 후 천천히 말씀하셨다.

“그녀는 늘 항상 부모와 형제자매를 생각하니, 그들의 병기(病氣)가 모두 그녀 이곳을 통해 나가는 겁니다.”

나는 사부님의 원 말씀을 더 이상 기억할 수 없지만 대략적으로 당신 자신이 수련 성취하지 못하면 누구도 책임질 수 없다고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내 문제에 대해 대답하신 후 탑승하러 가셨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부님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속으로 생각했다.

‘사부님 당신 말씀이 정말 맞습니다. 제 문제는 여기에 있는데 연공 중에 체현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정(情)이 너무 무거운데 특히 친정(親情)은 정말 내려놓기 힘듭니다.’

사부님께서 나의 치명적인 문제를 지적하신 후, 나는 마치 무거운 망치로 맞은 것 같았다. 나는 마땅히 내려놓고 빨리 잘 닦아야 한다. 당신이 수련을 잘 해야만 보다 많은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 이후 수련 중에서 나는 이 정을 중점적으로 닦아 버렸고, 담담히 보는 것에서 시작해 점차 내려놓게 되었다.

(7) 사부님 설법 테이프에서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설법을 정리하다

1994년 여름, 사부님께서 장춘에서 몇 차례 학습반을 하신 후, 일부 제자들에게 사부님 설법을 녹음한 테이프에서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베껴 쓰게 하셨다. 나와 다른 한 동수, 두 사람은 사부님의 설법 녹음 중 제3장을 정리했다. 우리는 꼬박 3일의 시간이 걸려 비로소 베껴 쓸 수 있었다. 녹음에서 정말로 조금이라도 틀려서는 안 되었고,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매 한마디 말과 매 한 글자도 빠뜨릴 수 없었으며, 자신의 이해에 근거해 함부로 단 하나의 글자라도 더할 수 없었다. 설사 지방 방언으로 하신 설법이라도 녹음 원본에서 조금도 바꾸지 않고 써야 했다.

우리는 정신을 집중해서 거의 녹음기 앞에 엎드리다시피 자세히 듣고, 자세히 기록했다.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었고, 한 글자도 빠뜨려선 안 되며, 한 글자도 틀릴 수 없었다. 우리는 당시 이 일이 아주 중대하며 우리가 이 항목을 할 수 있는 기연(機緣)을 가진 게 대단한 영광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당시 우리는 아직 《전법륜》이라는 책을 내는 줄 몰랐고, 그저 사부님께서 하라고 하셨으니 잘해야 하며 조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만 알았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모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사부님께서 내신 책은 모두 사부님께서 쓰시고 당신께서 직접 수개(修改)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저 사부님을 도와 녹음에서 한 글자 한 글자 기록했을 뿐이며 모두 사부님의 것이다. 우리 또는 다른 사람의 것은 그 어느 것도 섞이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 이 항목에 참여했던 우리 제자들이 가장 똑똑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8) 사부님의 장춘보도원 회의 설법에 참가하다

1994년 9월 18일, 사부님께서 길림대학 이화루(理化樓) 7층 회의실에서 처음으로 장춘보도원들에게 설법하셨다. 회의 전 총보도소에서 수련생들이 제출한 문제들을 선별했다. 당시 나는 법 공부가 깊지 않았기 때문에 수련생들이 제출한 문제에 대해 제대로 답변할 수 없었고 나 역시 곤혹스런 문제들이 있었다.

내 기억에 당시 우리와 함께 교류했던 한 수련생이 “이 법은 너무 좋아요, 나는 영원히 수련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당시 이 발언이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

나는 “당신은 결과를 원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똑똑히 설명할 수 없었다. 사부님께서는 회의에서 이 문제에 대해 해답해주셨다.

나도 내가 똑똑히 모르는 문제 하나를 사부님께 질문했다.

“우주 중에는 완전히 같은 것이 있습니까?”

이에 대해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마 두 가지 같은 것이 존재할 수는 있겠지만, 극히 적고 적다.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파룬따파의해》〈창춘(長春) 法輪大法(파룬따파) 보도원을 위한 설법〉)

내가 이해하기에 사부님께서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면 그럼 없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종래로 절대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고 또 아주 겸손하시다. 사실 내가 이 문제를 제기한 것에는 지식을 탐구하는 뜻이 담겨 있었고 수련과는 큰 관련이 없었지만 사부님께서 여전히 자비롭게 해답해주셨다.

이것은 내가 이후 법을 공부하는 가운데 때로 사부님 설법의 표면 한 층의 이치에 대한 인식을 보다 빨리 이해할 수 있도록 큰 계발을 주었다. 나는 매 생명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오늘날 대법제자 수련의 길도 다르게 체현되는데 매 사람마다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 이는 매 생명이 선천적 및 후천적 각종 요소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주 중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있으면 얼마나 많은 길이 있다. 사부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셨고, 나로 하여금 우주가 얼마나 풍부하고, 얼마나 장관이며, 얼마나 다채로운지 생각하게 해주셨는데, 그 다채로운 장관은 사람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

사부님의 이 해법은 보도원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고, 법리(法理)에서부터 아주 많은 것들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이후 전국적으로 일어난 법 공부, 책 베껴 쓰기, 책을 외우고 법을 공부하는 열풍과 제자들이 견정하고 착실히 수련하는 데 헤아릴 수 없이 큰 추동 작용을 일으켰다.

(9) 기차를 쫓아가 사부님께 동생의 병을 봐달라고 청하다

정이란 내려놓는다고 말한다고 내려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마난(魔難) 속에서, 고통스러운 취사선택을 거치면서 담담히 보고, 그것을 제거해 표준에 도달해 마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1994년, 대학교수로 있던 나의 유일한 남동생이 막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왔는데 머리가 아팠다. 병원에 가서 검사한 결과, 뇌종양 말기 진단을 받았다. 가족들은 동생을 북경에 데려가 수술 받도록 준비했다. 내 의견을 물었을 때 나는 수술에 동의하지 않았고, 당장 사부님께 보여드리기로 결정했다.

이때 사부님께서는 마침 고향에 계시지 않고 북경에 계셨는데 언제 돌아오시는지, 또 지금 어디 계시는지 몰랐다. 나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고 마침내 사부님 소식을 알아냈다. 사부님께서 곧 기차를 타고 돌아오실 예정인 것을 알고 나는 곧장 북경으로 가는 기차표를 사서 동생과 함께 사부님을 찾으러 갔다.

사부님께서 승차하신 기차를 알았기에 같은 기차표를 끊었다. 정말 공교롭게도 나와 동생이 막 역에 들어서자마자 사부님께서 객차 문 앞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 나는 재빨리 사부님께 달려가 상황을 말씀드리고 사부님께 동생의 병을 봐달라고 청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기차가 출발하면 당신이 동생을 데리고 중간 칸으로 와서 내게 보여 주세요.”

우리 객차는 사부님 객차와 인접해 있었다. 기차가 출발한 후 나는 동생을 데리고 중간으로 갔다. 사부님께서 동생의 몸을 조정해주셨는데, 나는 다만 사부님께서 동생의 몸에서 한 가지 물건을 꺼내 손안에 움켜쥐신 것을 보았을 뿐이다.

사부님께서 내게 몸을 돌리시고는 창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봤습니까? 그것이 아직도 내 손에서 소리를 지르며 아직도 세차게 움직이는 걸.”

나는 급히 말씀드렸다.

“사부님, 이건 제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사부님께서 손안에 들고 있던 물건을 창밖으로 내던지셨다.

나는 비록 보진 못했지만, 그것이 분명 어떤 영체(靈體)인 걸 알았는데 아주 대단했다. 아마도 빚을 받으러 왔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또 동생의 머리를 조정해주셨고 좋아졌다고 말씀하셨다.

잠시 후 사부님께서 내게 배(梨) 두 개를 주셨는데 한 손에 하나씩 드시고는 내게 말씀하셨다.

“이건 당신이 먹고 이건 당신 동생에게 먹이세요.”

나는 얼른 배를 받아서 “그럼 안 씻어도 되겠네요.”라고 했다.

사부님께서 “그래도 씻으세요.”라고 하셨다.

나는 배를 씻은 후 동생과 둘이 다 먹었다. 잠시 후 사부님께서 또 오셔서는 동생을 보셨는데 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몹시 조급해졌다.

‘너는 어째서 사부님께 감사드릴 줄 모르니, 사부님께서 네 병을 진찰해 주시잖아. 너는 평소 아주 예의가 바르지 않았니? 그런데 오늘은 왜 이러니?’

나는 동생의 무례함을 보고 몹시 괴로웠다. 이날 밤, 동생은 최근 여러 날에 걸친 병마의 고통 속에서 처음으로 아주 잘 잤다. 나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생각해보았다.

‘사부님께서는 얼마나 피곤하실까? 내가 사부님께 얼마나 많은 번거로움을 끼쳤을까! 사부님께선 왜 우리에게 배를 먹으라고 주셨을까? 여기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때 나는 머리가 복잡했고 또 친정이 모든 것을 차지했기 때문에 똑똑히 생각할 수 없었다. 이날 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사부님께서는 아침에 아주 일찍 일어나셨다. 나는 사부님과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곧 역에 도착하는데 사부님께서 밤새 고생하신 것과 또 내가 사부님께 끼친 번거로움을 생각했다. 또 철없는 동생이 사부님께 감사드릴 줄도 모르는 것(나중에야 뇌종양이 신경을 압박하면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을 생각하며 사부님을 바라보니 나는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고 그저 그곳에 서서 눈물만 흘렸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왜 우는지 아시기에 내 옆에 서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기차가 역에 도착하자 사부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나는 먼저 내려야 하니 미가(美歌 역주: 사부님 따님 이름)를 학교에 데려다 주세요.”

나는 눈으로 사부님을 배웅했는데 사부님께서 지하도로 들어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이때 두 동수가 사부님을 마중하러 나와서는 내게 물었다.

“사부님은요?”

내가 말했다.

“방금 기차에서 내려서 지하도로 들어가셨으니, 빨리 쫓아가 보세요.”

나중에 동수가 내게 말했다.

“우리가 줄곧 사부님 댁까지 쫓아갔는데 사모님께서 ‘사부님은 한밤중에 돌아오셔서 지금 집에서 주무시고 계세요.’라고 하시던데요.”

어라! 어찌된 일이지? 분명히 사부님께서 기차에서 내리셨고 지하도로 들어가시는 것을 똑똑히 봤는데. 어떻게 한밤중에 댁에 도착하실 수 있단 말이지? 법신(法身)이셨나 아니면 분신(分身)이셨나? 우리는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신통인 것을 알았다.

또 한 가지 일을 말하자면, 이번에 장춘행 기차에서 내 친구 중 한 명이 기차에서 인연이 있어 사부님을 뵈었다. 하지만, 그는 지식을 극히 중시하는 미혹에 빠진 사람이라, 사부님 앞에 가서는 사부님께 물었다.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당신이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어떤 과학 수단을 써서 당신이 옳은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나는 너무 화가 났고 또 조급해져서 속으로 생각했다.

‘너는 배웅하러 기차역에 나온 게 아닌가? 빨리 내려가라.’

나는 그가 사부님께 무례한 것을 원치 않았고 그가 그런 말투로 사부님께 질문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보니 사부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그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자 그는 흥미를 잃고는 가버렸다. 사부님의 거동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 모두 제자에게 일부 법리를 알려주셨고, 우리더러 도를 깨닫게 해주셨다.

(10) 사부님의 점화를 똑똑히 알다

동생이 집에 돌아오자 신체를 청리하는 상태가 일부 나타났다. 하지만 그는 속인이라 그것을 늘 병으로 여겼고 내려놓지 못했다. 가족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동수가 다시 사부님께 여쭤보니 사부님께서는 “그들 가족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주세요”라고 하셨다. 하지만 가족들은 이 말씀을 믿지 않았고 수술하기로 결정했다.

곧 북경 천단(天壇) 병원에서 종양제거 수술을 받았고 또 산동 치박(淄博)에서 감마나이프 수술을 받았다. 집에 돌아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다시 재발했다. 이번에는 재수술을 할 수 없어서 입원 치료를 받았는데 나는 두 차례 병원에 가서 동생을 간병했다.

처음 병원에 갔을 때, 나는 가방에 《파룬궁》 책 한 권을 넣고 가서 동생에게 법을 읽어주었다. 동생은 또 혼자 한번 읽었다. 책을 보고 나서 그는 왼손으로 내게 한 줄의 글을 썼다.

“왜 우리 가족에게 암이 생겼을까? 왜 내 몸에 생겼을까?”

나는 구체적인 이유를 말할 수는 없었지만 여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음을 안다고 썼다. 동생은 또 억지로 일어나 가부좌를 배우려 했지만, 실제로는 할 수 없었다. 수술 때문에 오른쪽 몸이 마비되어 말도 할 수 없었고 호르몬 주사를 맞은 후 몸이 불어서 할 수 없었다. 한 번은 의자에서 앉았다가 단번에 넘어졌는데, 내가 부축했지만 일으킬 수 없었다. 원래 아주 멋지고 뛰어난 인재였던 동생이 이렇게 질병에 시달리면서, 내가 부축해도 일어설 수도 없는 것을 보고, 나는 너무 슬퍼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번에 동생 간병을 마치고 돌아온 후, 나는 자신의 문제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 보았다. 여전히 정(情)인데 동생에 대한 친정을 내려놓지 못했고 동생이 줄곧 내 마음에 걸려 있었다.

나는 사부님께서 주신 배가 떠올랐다.

‘이건 나를 점화해주신 것이 아닌가? 한 사람당 하나씩 먹으라고 하신 건 분리[역주: 중국어에서 배를 가리키는 梨와 이별을 가리키는 離의 발음이 같다. 즉 이 동수는 사부님께서 배를 나눠 주신 것이 동생과의 이별을 점화해주신 것임을 깨달았다]가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이미 결과를 아셨던 것이다. 동생은 속인이라 병을 내려놓을 수 없었고 병원에 입원할 운명인데 병원에서 사람을 죽지 않게 할 수 있는가?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나 여기에서는 병 치료를 말하지 않으며, 우리는 병을 치료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진정하게 수련하려는 사람으로서 당신이 병 있는 몸을 가지고서는 당신은 수련할 수 없다. 나는 당신의 신체를 정화(淨化)해 주려고 한다.”(《전법륜》)

또 위중한 환자는 학습반에 들어올 수 없다고도 하셨다. 수련인으로서 내가 한 것은 모두 옳지 않았다. 정에 이끌려 스스로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이 이치를 명백히 안 후 나는 두 번째 병원에 동생을 간병하러 갔을 때 법의 요구에 따라 담담하게 대할 수 있었고 또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동생은 복이 있었는데 사부님을 뵐 수 있었고 또 사부님께서 신체를 조절해주셨으며 법도 두 번이나 배웠다. 내 생각에 동생은 죽음을 마주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1995년, 동생은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한번은 사부님께서 꿈속에 나를 점화해주셨다. 두 절벽 사이에 한 가닥 천으로 된 띠가 있었고, 나는 이 띠를 통과해 절벽을 넘어가려 했다. 내가 막 벼랑 위를 걷고 있는데, 뒤를 돌아보니 동생이 내 뒤를 따라 걷는 것이 보였다. 그가 갑자기 머리를 아래로 하고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본 나는 급히 손을 내밀어 그의 다리를 붙잡아 그를 끌어올렸다.

사부님께서는 이런 비유를 통해 동생이 대법(大法)을 배워 구도되었음을 내게 알려주신 것이다. 아들이 내게 꿈에 본 장면을 들려줬는데 외삼촌이 어느 곳에서 가부좌하고 있었는데 아주 아름다웠고 살아 있을 때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고 했다.

사존과 함께한 날들을 회상해보니 내가 사부님께 얼마나 많은 번거로움을 끼쳐드리고 얼마나 많은 걱정을 끼쳐드렸는지 모른다. 못난 제자는 허스(合十)하며 무릎을 꿇고 사부님께 절을 올립니다.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13/12/25/28364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