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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색 하늘 사다리

청경(清景)

【정견망】

지난 섣달 27일 새벽, 동료들 중 일부는 이미 설을 쇠러 집에 돌아갔다. 나는 아직 휴가가 아니라 날이 밝으면 출근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중간에 동공(動功)을 연마하고 잠시 누워 잠을 잤는데, 꿈에 한 사람이 나를 눌러 숨이 막혀 깨어났다. 나는 또 정법구결을 외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과거 꿈속에서 구결을 외우면 겁난이 상서롭게 변하진 않아도 적어도 놀람은 있어도 위험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정공(靜功)을 연마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리고 꿈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보았지만, 나는 그들과 소통할 수 없었다. 그저 옆으로 누운 자세를 유지하고 오고 가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어서 날아올랐는데 그들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마치 이백의 《몽유천모음유별(夢遊天姥吟留別)》이란 시에 나오는 “바다 위로 뜨는 해가 보이고 허공에는 천계(天雞 천상의 닭) 소리 들렸네.”와 같았다.

도중에 한 신선을 만났는데, 그의 장(場)에서는 저절로 음악이 들렸다. 옷차림은 예스럽고 소박했는데, 동시에 뭐라고 읊조렸다(인간세상의 언어가 아님). 그 뜻은 마치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들어와 쉬니 임금님의 힘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와 같았다. 하지만 나는 더 중요한 일이 있음을 느꼈기 때문에 그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계속 위로 올라가자 주위는 이미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내가 막 더 이상 올라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몰라 하는데 위에서 금색 사다리가 나타났다. 내가 하나를 올라가면 위에 또 몇 개의 사다리가 더 있었다. 나는 이렇게 계속 올라갔다. 나중에야 나는 이 사다리가 바로 내가 본 대법 경문의 페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한동안 올라가니 나는 또 사다리를 볼 수 없었다. 내가 막 힘이 빠진 것을 느꼈을 때, 한 가닥 강대한 흡입력이 나를 계속해서 위로 이끌었다. 마침내 단테의 《신곡》에 묘사된 ‘행복한 자의 장미’와 같은 곳에 도착했다(이것은 단지 내 느낌과 마음의 경지일 뿐 실제로 단테가 말한 곳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내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아마도 뒷면에 것들은 모두 사부님 은혜로 올라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에 나를 가로 막고 내가 위로 올라가기 몹시 힘들게 했던 그런 물질은 바로 내가 법에서 깨닫지 못하고 잘 닦지 못한 부분들이었다.

다음날 새벽, 나는 꿈에서 내가 전에 깨닫지 못했던 그 부분을 또 보았다. 이번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아니라 약간 밝은 안개였다. 갑자기 밝은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지만, 나는 그것이 법에 부합하지 않음을 분명히 느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은 바로 십여 년 전 게임에 등장했던 노인이었다! 그 게임 제목에서도 그것의 야심을 말했고 줄거리는 더욱 그랬다. 나는 당시 수년간 게임에 집착했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많은 일에 영향을 미쳤고, 내 머릿속에 투쟁과 “법을 이용하고 법에 동화하지 않는” 변이 물질을 형성시켰던 것이다. 이는 교훈이 아닌가.

나는 또 왜 어떤 동수는 동수의 신의 일면과 그렇게 많은 정신(正神)이 악을 청리했음에도 오히려 속인 공간에 뚜렷한 변화가 보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예를 들면 불법으로 감금된 동수들이 아직 대량으로 석방되지 않음). 그가 본 사존 역시 단지 위엄 있게 바라만 보실 뿐 손을 내밀어 도와주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동수는 아직 수련 중이고 세인들 역시 여전히 되는지 안 되는 지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신(神)의 일면이 정념(正念)을 강화시킬 수는 있지만, 잘 수련하지 못한 부분까지 도맡아 처리하기는 어렵다. 심지어 어떤 신(神)은 대법제자가 수련하지 못한 공간을 볼 수 없지만 사악은 오히려 빠짐없이 틈을 탄다.

나는 구우주에서 아직 구도받지 못한 수많은 생명들이 왜 굳이 법리(法理) 자체가 아니라 대법제자의 표현에 근거해 대법을 인정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구우주의 생명은 원래 근본적으로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본성의 일면은 모두 구우주를 따라 쇠락하고 있고, 또 많은 대법제자들처럼 신성한 법연(法緣)이 없으니, 단지 이런 식으로 구도 받을 기회를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련 중에서 나는 수련자가 때때로 현재 그의 층차를 뛰어넘는 상황을 느끼는 것은 그더러 수련하라는 것이지 호기심 같은 집착심을 채우라는 것이 아님을 이해했다. 사존께서는 이미 문(門)이 없을 정도로 열어주셨으니(모두 열림), 우리를 가로막는 것은 우리 자신의 집착과 업력뿐이다!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14/2/13/28762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