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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을 바꿔 바른 이치로 문제를 보자 (1)

수련생

【정견망】

속인으로 말하면 일에 부딪히면 좋은 것 있고 나쁜 것도 있어서, 좋은 일을 만나면 기뻐하고, 나쁜 일을 만나면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당신이 수련에 입문한 후로 예전에 나쁜 일로 여겼던 것에 지금은 또 변화가 생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수련하기에 어떤 일도 모두 좋은 일이다.”(《각지설법 12》〈세계파룬따파의 날 설법〉)

기왕에 부딪힌 모든 일이 좋은 일이라면 이미 나쁜 일은 없는 것으로 마땅히 더는 두려운 마음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어떤 동수들은 왜 아직도 두려운 마음이 있는가? 왜냐하면 동수는 부딪힌 일을 모두 좋은 일로 간주하지 않았고, 또 어떤 일은 여전히 나쁜 일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로 인해 두려움이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면 두려움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속인중에 형성된 나쁜 일이란 관념을 다 바꿔, 진정으로 법(法)에 입각해 바른 이치[正理]로 문제를 보고, 예전에 나쁜 일로 여겼던 것들을 모두 좋은 일로 간주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나쁜 일은 모두 사라지고 두려운 마음이 더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현재 관건적인 문제는 바로 예전에 뼛속까지 형성된 나쁜 일이란 관념을 바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런 변화를 실현할 수 있는가? 바로 자신을 한 진정한 수련인(修煉人)으로 생각하고 수련인의 각도에서 문제를 바라본다면, 당신은 과거 속인의 각도에서 생각했던 나쁜 일들이 지금은 수련하기 때문에 이미 더는 나쁜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수련인에 대해 말하자면 무엇이 좋은 일인가? 바로 제고(提高)가 좋은 일이다. 당신이 수련에 입문했다면 좋은 일을 만났든 나쁜 일을 만났든, 모두 당신이 안으로 찾아 자신을 제고할 기회를 줄 수 있다.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좋은 일이 된다. 다시 말해,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모두 좋은 일로 된다. 아울러 나쁜 일은 또 당신의 업력을 없애고, 신체를 정화하며, 업의 빚을 갚도록 도와주고, 당신의 수련제고에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더는 나쁜 일란 없으니 더는 무엇이든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속인의 나쁜 일이란 관념이 두려움을 낳는 근원이니 당신이 두려움이 없다고 생각하려면 반드시 나쁜 일이란 관념을 바꾸고, 진정으로 법에 입각해 바른 이치로 문제를 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수련 중에 부딪힌 모든 일을 다 좋은 일로 간주해야 한다. 가령 사악에게 납치를 당하거나, 각종 병업(病業) 현상 등 당신이 전에 나쁜 일로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좋은 일로 간주해야 하는데 이렇게 해야만 더는 두려운 마음이 생기지 않아 문제를 철저히 해결할 수 있다.

특히 구세력(舊勢力)의 배치를 마주할 때 가장 쉽사리 두려움 마음이 생기는데, 그 이유는 마음속에 나쁜 일이란 관념이 이미 구세력이 배치한 일을 나쁜 일로 규정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곧 마음속에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데, 이 두려운 마음은 바로 구세력에게 박해를 가중시킬 구실을 제공한다. 만약 나쁜 일이란 관념을 바꾸지 않으면 두려운 마음이 그대로 남아, 곧 구세력의 배치 속에서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거나 심지어 더욱 깊이 빠질 수 있다.

지난 몇 년간 대법제자들이 구세력의 배치를 마주했을 때 가장 크게 손실을 본 부분이 바로 나쁜 일이란 관념과 두려운 마음이었다. 어떤 동수는 일단 사당(邪黨) 당원을 보기만하면 마음이 긴장되어 나쁜 일이 임박했다고 생각한다. 그럼 뒤따라서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데 이렇게 하면 단번에 구세력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아울러 동수의 마음속에 두려운 마음이 있기 때문에, 신통(神通) 역시 두려운 마음에 의해 억제 당한다. 이때는 발정념을 해도 소용이 없다. 이는 마치 한 속인이 구세력과 중공사당 당원을 직면했을 때 그것들이 멋대로 좌우지하고 박해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당신이 구세력의 배치를 나쁜 일로 간주했을 때, 당신은 일의 부면(負面)적인 결과를 선택한 것과 같다. 일의 부면 결과는 바로 구세력이 원하는 결과이니, 당신이 변칙적으로 구세력의 배치를 인정한 것과 같다. 당신이 인정한 것은 스스로 원한 것과 같으니 다시 말해 당신이 구세력의 배치를 원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리 이 우주 중에는 또 이런 이치가 있다. ‘당신 자신이 구하는 것, 당신이 가지려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간섭하려고 하지 않는다.’”(《전법륜》)

내가 이해하기에, 이렇게 되면 구세력은 곧 당신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박해할 수 있게 된다. 어떤 동수는 경찰에게 죽도록 박해를 당하지만 사부님과 호법신은 옆에서 조급하게 지켜보기만 할 뿐 당신을 돕지 못한다. 이는 모두 자신의 관념이 바르지 못해 초래한 악과(惡果)다.

반대로 말해서, 당신이 만약 구세력이 배치한 일을 좋은 일로 여기고 대할 때면, 한편으로는 당신이 일의 정면(正面) 결과를 원한 것과 같은데 즉 사부님의 생각과 같다. 이는 당신이 사부님의 배치를 원하고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걷는 것과 같다. 다른 한편, 당신이 일의 부면적인 결과를 원하지 않음을 표현한 것으로, 즉 구세력의 생각과 반대가 되니, 당신은 구세력의 배치를 원하지 않고 구세력의 배치를 승인하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말해서 구세력의 배치가 발생한 후, 당신이 만약 그것을 좋은 일로 간주한다면 곧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걷는 것이고, 만약 당신이 그것을 나쁜 일로 간주한다면 곧 구세력이 배치한 길을 걷는 것이다.

“제자: 저는 사부님께서는 일체보다 높으신 분이시며, 이미 저희들의 길을 배치해 놓으셨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사부님께서는 구세력의 배치를 이용하여 저희들을 제고시키고 계신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는 마치 구세력의 배치가 그리 진실하지 않는 것 같은데,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까?

사부: 절반은 맞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들을 승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또 그것들이 배치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장계취계(將計就計)로 그것들이 하는 것을 역이용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것이다.”(《2003년 정월대보름설법》)

내가 이해하기에 사부님께서 구세력의 배치가 발생하도록 허락하신 것은 바로 구세력의 배치 역시 정반(正反)이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이며 사부님께서는 곧 “장계취계(將計就計)”로 구세력이 배치한 정면(正面)작용을 이용해 대법제자를 성취시키신다.

그러므로 구세력의 배치에 직면했을 때 절대 그것을 나쁜 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것을 나쁜 일로 간주하기만 하면 이미 구세력의 배치를 인정한 것이 되고 아울러 당신이 그것을 나쁜 일로 간주한 후, 나쁜 일에 직면해 두려운 마음이 생기지 않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일단 두려운 마음이 생기면 곧 구세력에게 박해를 가중시킬 구실을 제공하는데 이렇게 하면 구세력의 배치 속에서 갈수록 더 깊이 빠져들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많은 동수들이 박해당한 후, 모두 구세력의 배치를 철저히 부정할 수 없었다. 예를 들면, 납치되어 박해받은 어떤 동수들은 비록 사악에 단호히 협조하진 않았지만 결국에는 감옥에 보내졌고, “형기를 마친 후에야” 석방되어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역시 구세력이 박해의 전 과정을 밟게 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문제는 아마 나쁜 일이란 관념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즉, 동수는 구세력의 배치를 나쁜 일로 간주한 것인데 이렇게 하면 일의 처음부터 구세력의 배치를 승인한 것과 같다. 일단 이렇게 되면 동수가 이후 행동에서 제아무리 사악의 요구에 협조하지 않더라도 모두 구세력의 배치를 인정한 기초 위에서 협조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에는 모두 구세력의 배치를 철저히 부정할 수 없었다. 이는 구세력의 배치 속에 빠져 들어가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하는 것이라 결국에는 실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어떤 동수는 목숨을 걸고 사악의 요구에 협조하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여전히 사악의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했다. 그렇다면 동수는 생사를 내려놓았음에도 왜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하지 못한 것일까? 내가 보기에 동수는 아마 구세력의 배치를 나쁜 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는 본의 아니게 스스로 구세력의 배치를 승인한 것과 같다. 만약 승인했다면 이는 당신 자신이 원한 것과 같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 자신이 가지려고 하는 것은 누구도 상관할 수 없으며, 또 당신을 좋다고 할 수도 없다.”(《전법륜》)

구세력은 곧 구실을 잡고 동수가 박해로 죽을 때가지 계속 ‘고험’한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동수가 구세력의 배치를 나쁜 일로 간주했을 때, 동수는 구세력의 배치를 박해로 간주한 것과 같다. 이는 또 구세력을 박해자(迫害者)로 간주하고, 자신을 피(被)박해자로 간주한 것과 같다. 이렇게 하면 완전히 구세력의 배치에 따라가게 되는데 이미 자신을 박해받는 위치에 놓은 것이다. 이는 구세력이 자신을 박해하도록 자발적으로 협조한 것과 같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어떤 동수는 경찰에게 구타당할 때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오늘은 네가 멋대로 때려봐라, 네가 설령 나를 때려죽인다 해도, 나는 절대 전화(轉化)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겉으로 보기에 아주 견정한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구세력에게 박해할 구실을 잡힌 것이다. “당신이 우리 맘대로 때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때려 죽여도 전화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럼 우리는 죽을 때까지 때려 당신이 전화하는지 하지 않는지 보겠다.”

결국 동수는 정말로 맞아 죽었는데 그렇다면 이는 스스로 초래한 것이 아닌가?

대법제자로서 개인수련이란 작은 틀에 빠져 자신이 고험 속에서 관(關)을 넘기면 된다며 만족해선 안 된다. 마땅히 우선적으로 법(法)을 위해 책임지고 중생을 위해 책임져야 한다. 당신이 생각해 보라! 당신은 대법속의 한 입자다. 그렇다면 당신이 박해받는 것은 바로 대법이 박해를 받는 것과 같고, 당신이 경찰더러 마음대로 당신을 박해하라고 한 것은 당신이 그 경찰에게 대법을 박해하라고 한 것과 같다.

당신이 남더러 대법을 함부로 박해하게 했다면, 대법제자로서 법(法)을 위해 책임지는 정념(正念)은 어디로 갔는가? 당신이 세인더러 함부로 대법에 죄를 짓게 해서 나중에 도태되게 한다면, 대법제자로서 중생을 위해 책임지는 당신의 정념은 어디로 갔는가? 그러므로 법에 입각해 바른 이치로 문제를 보아야 한다.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하는 것은 우주에서 가장 올바른 일을 하는 것으로 그 누구도 교란하거나 파괴해선 안 된다. 누가 만약 교란하거나 파괴했다면 죄를 짓는 것으로 이런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마땅히 단호히 제지해야 하며 경찰이 멋대로 때리도록 방임하지 말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하려면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걸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우선적으로 바른 이치에 따라 구세력의 배치를 대하고 그것을 좋은 일로 여겨야 한다. 그런 후에 낙관적인 심태로 세 가지 일을 전면적으로 하면서, 어디를 가든 전력을 다해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면 그럼 당신은 구세력의 배치를 철저히 부정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0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