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제자 지명(智明)
【정견망】
불선(不善)과 이기심을 참회
나는 한 가지 현상에 주목했다. 어떤 동수는 비록 여러 해를 수련했지만, 선량(善良)한 정도가 속인에도 미치지 못하며 지극히 이기적인 반면 일부 속인들은 마음이 선량하고 너그러우며 관대하다. 내가 바로 선량한 정도가 부족한 편에 속하는데 수련하지 않는 가족들은 다 아주 선량하다.
사람의 근기와 성장환경이 다르고 어려서부터 형성된 가치관도 다르기 때문에 자아(自我)를 중심으로 하는 가치관이 일단 형성되면 고치기 어렵고, 형성된 이기적인 물질은 마치 빙산처럼 착실히 수련하지 않으면 제거하기가 몹시 어렵다. 생생세세 윤회 속에서 생명은 물결 따라 흘러왔고, 대법(大法)이 홍전(洪傳)됨에 이르렀을 때 매 생명은 서로 다른 정도의 어려움에 직면했다. 어떤 이는 아주 선량하지만 무신론의 영향을 받아 수련에 들어오지 못하고, 어떤 이는 수련하지만 줄곧 변이된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점점 더 이기심(自私)과 불선(不善)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우주 특성과 완전히 위배된 것이다. 미래 신우주는 위타(爲他)하지만 구우주는 위사(爲私)하기에 도태될 운명이다. 사심(私心)이 크면 클수록 생명의 가치는 더욱 떨어진다. 만약 이 방면에 공을 들이지 않는다면 다른 방면에서 아무리 잘해도 심각한 누락이 있는 것이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겉으로 정진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나중에 심각한 마난(魔難)을 겪는 몇몇 동수들이 몹시 이기적이고 선량하지 않았다. 우리는 마땅히 이를 경계로 삼아야 하는데 수련이란 수선(修善 선을 닦음)을 우회할 수 없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주 이기적이고 질투심과 원망이 모두 강했다. 선량하지 않았고 탐욕이 강했으며 좋은 건 다 빼앗으려 했다. 항목을 하면서도 성취를 추구했는데 마치 속인이 자기 가치 실현을 추구한 것과 같았다. 다년간 사람마음을 제거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팽창해서, 수많은 실수들을 저질렀다.
나는 또 깨달았는데 그저 똑똑히 안다고 해서 끝이 아니며 또한 진심으로 참회해야 한다. 사부님과 또 일찍이 나의 사상이나 언행으로 상처를 입혔던 이들에게 참회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마땅히 신에게 진심으로 참회해야 하는바, 자신의 어디가 나쁜지, 잘못을 고칠 기회를 주기를 희망해야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방법이며, 이것이야말로 영단묘약(靈丹妙藥)이다.”(《이성》)
불선한 행위
꿈에 동수 A를 봤는데 나는 몇 년 전 장면이 떠올랐다. A는 성격이 괴팍하고 자신감이 없어보이는데 그래서 나는 그를 무시했다. 한번은 어느 모임에서 내가 A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동수 B 역시 A를 무시했다. 동수 C는 주동적으로 A와 대화를 나눴다. A는 분명히 C가 전하는 따뜻함을 느끼고 좋아했다. 나는 나와 B가 A에게 상처를 줬음을 깨달았는데 사람은 모두 자신에 대한 남들의 마음속 태도를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다. 사실 A는 남의 업신여김을 받을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았고, 선량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남의 약점을 포용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이에 사부님과 동수 A에게 마음속으로 참회했다.
작년에 있었던 한 차례 경험이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동수 D와 어떤 문제에 대한 관점이 달랐다. 나는 자신이 옳다고 여겨 늘 말로 상대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법 공부를 통해 자신이 관념을 너무 고집함을 깨달았다. 나는 마땅히 다른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이에 나는 진심으로 D에게 사과했다.
그때 내 몸에 단단한 혹이 생겼었는데 몇 달 동안 점점 커졌다. 그런데 사과하고 나서 며칠 만에 혹이 쪼그라들더니 사라졌다. 나는 신기함과 동시에 선(善)의 중요성을 느꼈다. 고인(古人)은 사람에 대해서나 만물(萬物)에 대해 마땅히 경건해야 한다고 했는데 나를 높은 곳에 놓고 남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태도는 이미 사람에 대한 존경을 상실한 것이자 또한 선(善)을 잃은 것이다. 나는 이렇게 작은 일이 결코 작지 않음을 생각지도 못했다. 돌아보니 내게 단단한 혹이 생겨난 원인은 바로 남에 대한 나의 불선(不善)과 관련이 있었음에도 몇 달 동안 찾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미혹 속에 있고 더욱이 멸(滅)의 말후(末後) 시기에 세상 풍속은 이미 상당히 패괴(敗壞)되었다. 자신 역시 물결 따라 흘러왔는데 스스로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신(神)이 보기에는 아마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과거 나는 법 공부 팀에서 동수의 아이가 떠드는 것을 참지 못했고, 동수가 집에서 아이를 보는 게 정체(整體)에 더 큰 공헌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얼마나 불선(不善)한가? 사실 아이가 울고불고 할 때 부모는 정말 조급하고 난감한데 누군가 불평할 때면 더욱 압력을 받게 된다. 마땅히 선의(善意)로 이해해야 한다.
또 일부 노동수의 말이 길어져도 나는 참지 못했다. 나중에 나는 어떤 동수는 거칠게 말을 끊고, 어떤 동수는 인내심 있게 포용하는 것이 바로 선심(善心)의 차이임을 발견했다. 전통문화에서는 노인을 존중하고 아이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예절이 아닌가.
중년 동수 E는 아이가 소란을 피우는 것에 대해 불만이 컸는데 이는 그가 그것을 환경에 대한 교란으로 여겼음을 의미한다. 그는 또 성질이 급하고 사상 중에 정당하지 못한 남녀 정의 문제로 고통을 겪다 세상을 떠났다.
노년 동수 F는 전에 눈살을 찌푸리며 떠드는 아이에 대한 불만을 표현했다. F는 겉으로 보면 아주 정진했지만 갑자기 불의의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여기서 나는 아이에게 화를 내고 참지 못하는 자체가 얼마나 심각한 후과를 초래했는지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수련인의 선심(善心)과 포용이 크게 부족해서 서방사회 표면 문명의 기본적인 요구 사항조차 충족하지 못한 것을 반영한다고 본다. 불선(不善)한 마음은 또한 여러 방면에서 체현될 수 있는데 이 또한 구세력의 박해를 받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수구(修口)하지 못함
동수는 한 교류문장에서 “내가 자신이 수구에서 집착을 하나하나 찾아낼 때마다 천목으로 보니 내 치아 속에서 하나하나의 괴물을 청리했다. 때로는 한 무리 한 무리 붉은 개미가 있었고 때로는 또 독사가 있었다.”라고 썼다.
나는 ‘독사’는 바로 ‘독설(毒舌)’이라 생각하는데, 자신이 수구하지 못함과 ‘독설’을 깨달았다. 가령 말꼬리를 잡거나 빈정대거나, 늘 통쾌하게 말하려 하는데, 때로는 또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핵심을 찔렀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깨달은 것은 말을 함에 구덕(口德)을 중시해야 한다. 고인(古人)은 말을 할 때 늘 3할의 여지를 남기라고 했다. ‘독설’의 배후는 아마 ‘독사’일지 모른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가 이쪽에서 그를 욕하면 그가 욕함에 따라 곧 자신의 공간장(空間場) 범위 내에서 한 덩이 德(더)가 날아가 남의 몸에 떨어진다. 그가 심하게 욕할수록 남에게 주는 德(더)는 더욱 많아진다. 남을 때리고 다른 사람을 괴롭혀도 마찬가지다. 그가 그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찰 때, 이 사람이 얼마나 세게 때리느냐에 따라 그만큼의 德(더)가 넘어간다.”(《전법륜》)
이 단락에서 내가 이해하기에 남을 때리고 욕하는 정도가 심할수록 덕(德)을 더 많이 준다. 그러면 내가 남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때 장소가 크고, 한 말이 심할수록, 또 그 말이 교묘해서 듣는 사람이 더욱 찬동할수록 상대방에게 더욱 큰 덕을 주게 된다. 왜냐하면 상대방에게 주는 상처 역시 더욱 크기 때문이다.
“누구누구는 너무 게을러요.”
“누구누구는 말뿐이지 실제로는 할 줄 몰라요.”
“모 부부는 늘 말다툼을 해요” 등등 동수들이 남을 평가하는 말을 듣곤 한다.
나 역시 전에 이렇게 말했는데 또 아주 객관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전통문화에서는 남의 단점은 드러내지 말라고 했는데 다시 말해 남의 악(惡)은 숨기고 선(善)을 드러내라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들이 알고 있듯이 국제사회의 사람들은 뒤에서 남을 헐뜯는 일이 매우 드문데, 많은 사람, 그는 보편적이고 순박한 사상개념과 행위방식이 있고, 어쨌든 마땅히 선량한 사람, 남에게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일반적인 정황에서 남을 해치고 자기 이익을 챙기는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2019년 뉴욕법회설법》)
2004년 《아태지역 수련생회 설법》에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들이 누가 좋고 누가 나쁘다고 의논할 때 신마저도 옳게 보지 않는다.”
몹시 부끄럽지만 사부님께서 이 단락 법을 말씀하신 지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나는 여전히 누가 좋고 누가 나쁘다고 의논했다. 과거에 나는 종종 일부 동수를 부정적으로 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또 일부 동수를 찬양했는데, 사실 역시 사람마음이었다. 또 아주 교활하게 일부 동수를 찬양하면서 일부 동수들에게 반대했는데 상대방더러 문제를 보게 하려는 의도였지만, 출발점이 불선(不善)하기에 정면(正面)작용을 일으키긴 몹시 어려웠다.
가족이 한 친구의 아이가 너무 작다고 하자 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개의 난쟁이 유전자가 너무 강해서 그래.”하고 한마디 했다. 곧바로 이가 아파왔고 나는 무심코 던진 이 한 마디 말에서 자신도 모르게 후덕한 도를 잃었음을 깨달았다. 속담에 “이가 빠지도록 웃는다”는 말이 있는데 아마 남을 비웃어서 이가 아팠을 것이다.
불선한 염두
동수의 문장에서 “한 동수가 길을 가다가 화장이 진한 여인을 봤는데 눈 주변을 진하게 그렸다. 동수가 속으로 ‘마치 판다 같아’라고 생각하자 곧 한 덩이 덕(德)이 날아갔다.”고 했다.
옛말에 “푸른 하늘은 속일 수 없으니 생각이 떠오르기도 전에 미리 안다”고 했다. 전통문화에서는 신은 사람마음 속에 있는 사소한 염두까지 다 알며 불선(不善)의 정도에 따른 징벌이 크다고 했다.
법(法)에서 나는 신(神)이 사람의 사상을 보면 한눈에 다 들어오며 또한 장차 어떻게 표현될 지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안으로 자세히 찾아야 하며 숨길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마땅히 수시로 마음을 닦아야 한다. 과거에 나는 일상적인 염두 속에서 찾는 것에 주의하지 못해 모순이 나타나도 지나갈 수 없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사람의 집착심이란 마치 일사일념(一思一念)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모순이 나타날 때에야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표현된다. 자세히 살펴보니 나는 많은 때에 일단 염두를 움직이기만 하면 곧 집착심의 표현임을 발견했다. 때문에 수시로 찾아야 하고 찾는 즉시 강력한 일념(一念)을 내보내 없애야 한다.
과거에 나는 질투심이 강해서 남이 뭔가 얻는 것을 보면 마치 자신이 무엇을 잃는 것 같았고, 남이 뭔가 잃는 것을 보면 마치 자신이 얻은 것 같아서, 종종 남을 비웃고 남의 불행을 기뻐하며 재앙을 즐거워했다. 심지어 남을 도울 때조차 늘 겉과 속이 다르고 위선적이었다.
가령 속인 친구의 아이가 사고를 당했을 때 나는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지만 상대방을 위해 슬퍼하는 대신 우월감을 갖고 ‘속인 아이의 품행이 별수 있겠어?’ 라고 생각했다.
또 병업(病業)중인 동수를 도와 발정념을 했지만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고 심지어 상대방에게 각종 문제가 있어서 호전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여겼다. 그의 병이 심해졌다는 말을 들으면 자신의 견해가 실증되었다고 여겼다. 또 병업중인 동수를 방문하는 것은 (동수의) 마음이 제 위치에 도달하지 않으면 시간만 낭비한다며 싫어했다. 또 동수가 사망한 후 처음 생각은 뜻밖에도 일을 덜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을 도울 때의 기점이 위사(爲私)한 것으로 좋은 일을 해서 자신의 공로(功勞)를 쌓는 게 목적이었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선념(善念)이 나오지 못했다. 그저 공로부(功勞簿)에 한 획만 보태려 했을 뿐이다. 항목에 참여하는 것 역시 공로만 탐내고 더 많은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으며 조금만 귀찮아도 내키지 않았다.
지금 나는 한 가지 이치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즉, 내가 남을 어떻게 생각했느냐에 따라 신(神)은 똑같이 나를 배치하신다. 자신이 잘되고 싶다면 그럼 진심으로 남이 잘되기를 바라야 하고, 자신의 아이가 잘되고 싶다면 그럼 진심으로 남의 아이가 잘되기를 축복해야 한다.
나는 또 줄곧 사람마음이 무거운 동수에게 반감이 있었는데, 사실 상대방은 바로 나의 거울이었다. 반감은 바로 자신의 사람마음이 깊다는 것을 설명한다. 반대로 착실하게 잘 닦은 동수는 더욱 포용적이다. 사실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하며 사람마음이 무거운 동수를 마땅히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나 역시 그 중 하나가 아닌가? 사람마음이 무겁다는 것은 사람 중에서 형성된 아귀다툼의 관념이 더욱 무겁고 바로잡기가 더욱 어려운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 마땅히 선의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전통문화의 계발
《어리석은 사람의 어리석은 복도 닦아서 온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한 부옹(富翁)은 우둔하지만 복이 많았다. 사실 그는 전생에 순박하고 돈후한 시골 사람으로 남의 괴롭힘과 비방에도 신경 쓰지 않고 평생을 평범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바로 이 마음이 신명(神明)의 칭찬을 받아 복을 받은 것이다. 법 공부를 통해 나는 신(神)은 바보야말로 가장 총명하다고 여김을 알았는데, 이 이야기가 바로 이 법리를 실증한 것이 아닌가?
동수와의 교류를 통해 나는 자신의 많은 문제들이 모두 가치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유물주의’와 ‘무신론’에 기초한 가치관에서 인생의 의미란 바로 사람 중에서 좋은 점을 얻는 것이다. 소위 ‘인생의 승자’가 되면, 이익을 얻기 유리하며 소위 ‘우위’를 차지했다며 부러워한다. 똑똑하고, 능력 있고, 권력이 있는 것 등을 부러워한다.
반대로 좋은 점을 얻는 데 불리한 ‘약점’은 무시하는데, 가령 말을 잘 하지 못하거나 정직하고 무던한 등이다.
그러나 만약 신(神)을 믿는 기초 위에 인생관이 세워졌다면, 그럼 인생의 의미는 바로 회천(回天 하늘로 돌아감)에 있다. 뜻밖에도 신(神)이 바보를 칭찬하는 이유는 왜냐하면 그것이 회천에 유리한 최대의 장점이자 사람이 업을 지어 훼멸되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
속인일 때 나의 가치관은 “사람이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는 것으로 비록 아주 명확하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바로 이런 동기였다. 남이 모르는 악(惡)을 많이 은폐했고, 말을 거창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을 속이고 남도 속일 수 있었기에, 어떤 이는 나더러 선량하다고 했고 나도 자신이 아주 괜찮다고 여겼다. 하지만 하늘을 속일 수는 없다. 자신이 지은 거대한 업력(業力)이 나를 우주 특성과 격리시켰고 때문에 다년간 착실히 수련할 수 없게 했던 것이다.
수련하지 않는 가족들이 나의 근본문제는 바로 이기심과 불선(不善)임을 일찍이 지적해 주었지만 나는 오히려 감사할 줄 몰랐다. 그저 얻으려고만 했으며 감당하려 하지 않았다. 과거에 우리는 끊임없이 말다툼을 했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심지어 이혼이란 말까지 나왔다. 내가 마음을 닦기 시작한 후부터 가정도 화목해졌다. 나에 대한 가족들의 인상도 변했다. 사실 상대방도 아주 선량한 사람이었는데, 전에는 내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심을 수련에 끌어들인 표현
나는 일찍이 이기심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라서 아주 높은 층차에서만 무사(無私 사심이 없음)할 수 있다고 착각했었다. 때문에 사심을 닦아 버리는 것은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나는 주로 내가 보기에 실제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겨냥해서 닦는다. 가령 성질을 내거나 화내는 것을 고치려고 한 이유는 이것이 나를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또 안일심을 고치려 한 것은 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것은 공리심(功利心)을 수련에 끌어들인 것으로, 위사(爲私)한 것으로 위타(爲他)한 부분을 우회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이치를 망각했는데 이기적인가 위타한가, 이것은 신구(新舊) 우주의 근본적인 구별이며, 심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과거에 우회로를 걸어간 것이나 다름없다. 속인도 감정과 심리적 자질 향상을 말하지만 도덕과 선악을 논하지 않기에 이는 수련이 아니다.
나는 전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법 공부를 많이 하고, 연공도 많이 하며 가치가 큰 일에 참여하는 것이 정진이라고 계획했다. 그러나 이 계획 속에는 수심향선(修心向善)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니 “비학비수(比學比修)”의 함의를 오해해 늘 형식과 결과를 남과 비교하면서 오히려 심성은 대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이 법공부와 연공을 더 많이 한다는 말을 들으면 조바심이 나서 압력을 받았고, 남이 삼퇴(三退)를 많이 시켰다는 말을 들으면 긴장하고 질투하면서, 자신이 뒤쳐질까 두려워했다.
마치 다른 사람과 일종 경쟁관계인 것 같았다. 남의 어디가 좋지 않다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나는 그에 비하면 그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수련을 사람 중의 일로 생각해 노력한 것으로 오히려 선념(善念)을 내지 않았다. 사실 수련이란 사람 중의 일이 아니라 포기하고, 내려놓고, 물러나며, 구함이 없고, 남을 위하고, 남을 성취시켜 자신을 해탈하는 것이다.
나는 각종 방면에서 정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부 동수들이, 수선(修善) 방면에서는 오히려 부족한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어떤 동수들은 때때로 오만한 마음을 드러낸다. 어떤 동수들은 중요한 일을 해야만 가치가 있다고 여겨 남이 자기 시간을 뺏으면 손해를 본다고 느끼며 조급해 하며 원망한다. 어떤 동수들은 남의 감정이나 어려움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갖는다.
여기서 말하는 이익은 꼭 돈이 아니라 수련인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시간, 항목의 자원 등이다. 어떤 동수들은 관건적인 이익에 직면해 다른 사람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심태를 보인다. 개인적으로 보기에 동수가 다른 방면에서 정진(精進)하는 것은 다 칭찬할 가치가 있지만, 만약 수선(修善)을 중시하지 않는다면 몹시 애석하고 심지어 위험한 것이다. 이 방면의 교훈은 아주 많다. 수련에 소양이 있는 동수들은 늘 자상자비하고 걷는 것도 아주 평온하다.
여기서 한 가지 일화를 들어보자. 도교 전진교(全眞敎) 창시자 왕중양(王重陽)의 제자 학대통(郝大通)은 사존의 명을 받아 화산(華山)에 가서 굴을 파고 수도하려 했다. 3년 만에 굴 하나를 겨우 팠는데 다른 도우(道友)가 차지해버렸다. 이런 식으로 그는 40여 년 간 70개의 굴을 팠지만 모두 다른 도우들에게 양보했다. 하지만 최후에 그는 도를 얻어 신선이 되었다. 학대통이 산굴을 도우에게 양보할 때 분명 손해를 본다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수행이 남에게 떨어질까 걱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또한 도우는 산굴에서 수련하지만 자신은 굴이 없다고 초조해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왕중양은 아마 제자에게 한 갈래 지름길을 제시해주었을 텐데 그것은 바로 무사(無私)를 닦아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神)은 사람마음을 중시하기 때문에 꼭 산굴에서 가부좌해야만 수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굴을 파는 것 역시 수련이기 때문이다. 산굴은 어떤 의미에서 수도인에게 가장 큰 이익을 나타내지만, 이렇게 힘들게 얻은 소중한 이익을 남에게 양보할 수 있는 이런 무사(無私)한 마음이야말로 신(神)이 중시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보기에 심성(心性)에는 하나의 주선(主線 줄거리)이 있으니 바로 사심(私心)과 선심(善心)의 크기다. 이기적이면 곧 자기만 생각하고 불선(不善)한 것이다. 그러면 탐욕이 강해지고 탐나는 것을 얻지 못하거나 잃을까 두려워한다. 이럴 때면 곧 질투하고, 원망하며, 쟁투하고, 걱정하며,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초조해 한다. 반대로 탐나는 것을 얻을 때면 기뻐하고, 과시하며, 오만해진다.
이기적이지 않고 남을 위해 생각하고 동정하며 이해할 수 있다면, 그럼 자신이 얻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얻었을 때 질투하거나 원망하지 않을 것이며, 반대로 자신이 얻었을 때도 오만함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심(私心)이 적은 사람은 자신을 고려하는 동시에 남을 고려하고 마음이 더욱 관대해서 남과 대립해서 뭔가를 빼앗고 다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심이란 주선을 붙잡고 닦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렵지만 또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선(善)의 실질과 표현에 대한 깨달음
동수 D는 선량하고 착실하며 늘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양심을 지켜야 한다고 제기했다. 나는 아주 도리가 있다고 여기는데 중국 전통문화 중에서 선량(善良)한 것의 하나는 남의 고락(苦樂)을 마치 자신이 겪는 것처럼 공감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전통 속의 선량은 바로 남을 자신처럼 보고, 남과 한마음이 되어, 기쁨도 함께 하고 슬픔도 함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善)이란 바로 남과 같은 방향이며, 남의 성공과 행복을 바로 자신의 성공과 행복이라 여기는 것이다. 반면 악(惡)이란 남과 반대 방향으로, 남이 실패할수록 자신이 더 성공하는 것 같다. 마치 구세력이 대법제자가 좋은 것을 얻는 걸 보고 필사적으로 누락을 찾아내 박해를 가하며 대법제자의 수련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보지 않는 것과 같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말은 입장을 바꿔 생각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약점이 남에게 찔리길 원치 않는다면, 자신 역시 남의 단점을 거론하지 말아야 한다. 또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 남의 포용을 받고자 한다면 자신 역시 마땅히 용서해야 한다. 나는 과거에 늘 남의 잘못을 붙잡고 내려놓지 못하면서 자신의 입장에서 비판했는데 이는 너무나 불선한 것이다.
자신이 좋은 일이 있거나 진보하면 아주 기뻐하는 것처럼 마땅히 남의 좋은 일도 기뻐해야 한다. 자신이 불행한 일을 당하면 고통스러운 것처럼 마땅히 남의 불행을 슬퍼해야 한다.
나는 과거에 많은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마치 좋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반면 동수 D는 누구를 봐도 좋은 사람으로 보았다. 설령 남의 문제를 봐도 그저 상대방이 완벽하진 않아도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나는 전에 D의 안목이 정확하지 않다고 느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는 선량(善良)한 정도의 차이였다.
지금 나는 사람을 보는 것이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사실 남이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마도 선량한 정도를 체현한 것일지 모른다. 선량할수록 남을 더 잘 포용할 수 있다. 늘 남이 못마땅하다면 그럼 자신이 제고해야 함을 설명한다.
나는 우리가 평소 일념을 움직이기만 해도 곧 자신을 배치하는 것으로 선악(善惡)이란 저울에서 무게를 더하거나 줄이는 것임을 깨달았다. 마음속으로 남을 찬양하고 축복하며 이해하는 것 등이 바로 선념(善念)인데 선념이 나올 때면 자신도 편안함을 느낀다. 반면, 남을 깔보고 사이가 틀어지는 것 등이 바로 악념(惡念)인데 악념이 나올 때면 스스로도 불편할 것이다.
나에 대해 말하자면 선(善)한 사고를 연습해야 한다. 예를 들어, 동수의 부족함을 봤을 때, 마땅히 상대방의 장점을 먼저 생각하고, 오만해지지 말아야 한다. 선념과 공경한 마음을 지키면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어려움을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너무 피곤해서 법공부가 부족하거나, 어릴 때 환경 때문에 형성된 문제라서 바로잡기가 너무 어렵다는 등등. 또 상대방이 점점 더 좋아질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굳게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로 사부님께서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늘 매 한 동수를 돌보시는데 수련을 잘했든 사람마음이 깊든, 대열에서 낙오된 이거나 심지어 사오(邪悟)한 이라도, 사부님께서는 모두 똑같이 대하신다. 동수들이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잘 원용하기 바라는데 그것이 바로 선념(善念)이다. 사나운 눈초리로 동수의 문제를 바라보는 이것은 바로 구세력의 사유다.
사부님께서는 모든 중생을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시며 그 어떤 생명도 포기하지 않으려 하신다. 반면 구세력은 오히려 고르고 골라서 수많은 생명이 표준에 부합하지 않으니 마땅히 도태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동수를 업신여기는 사유는 바로 구세력에게서 온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 고심스레 구도한 제자를 깔보고 부면(負面)적으로 보는데, 이런 마음으로 어떻게 사부님께 떳떳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모든 동수들을 사부님께서는 다 보배처럼 여기시니, 나는 (동수에 대해) 부면(負面)적인 견해를 가져선 안 된다.”
선량으로 돌아가는 것이 내게는 그리 쉽지 않았다. 불선한 사유가 이미 뿌리 깊이 박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선량한 사람의 표현을 유심히 관찰하며 대조해보았다. 내가 발견한 것은 많은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현이 있었다. 즉 정직하고, 남의 장점을 보며, 사람을 잘 믿고(심지어 생각이 없거나 보는 눈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솔직하고, 겸손하며, 사상이 단순하다.
이런 사람들은 지금은 보기가 드물고 또 쉽사리 남에게 무시당한다. 나도 과거에 이런 사람들이 너무 어리석고, 무능하며, 남의 괴롭힘을 당하기 쉽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옛말에 “사람이 선하면 사람은 속여도 하늘은 속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진정한 주재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이다.
동수 D는 자신은 남이 무슨 말을 해도 그대로 믿고, 마음속으로 생각나는 게 있으면 그대로 말하는데, 궁리하지 않는다. 나는 전에 이렇게 하는 것이 너무 어리석다고 비웃었는데, 어떻게 남의 말을 다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과거에 늘 사람을 믿지 않았고, 누구누구가 거짓말을 하며 누구누구는 진심을 말하지 않고 누구누구는 말속에 뼈가 있다고 했다. 이런 복잡한 사유는 사실 내가 정직에서 이미 멀어졌음을 말해준다.
동수 G는 어릴 때 남들이 솔직하다고 칭찬하면 오히려 기분이 언짢았다고 하면서 이 말은 자신에게 다른 장점이 없음을 설명한다고 여겼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똑똑하고 영리한 것을 좋게 여기고 착하다고 하면 좋지 않게 생각하는데 사실 도덕이 아래로 떨어졌음을 설명한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는 보편적으로 착한 것을 좋게 여겼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心性(씬씽)이 얼마나 높은가를 가늠하는 데는 또 척도가 있다. 척도와 공기둥은 동일한 공간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것은 도리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당신의 心性(씬씽)이 수련되어 올라오면, 예컨대 속인 중에서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욕을 한 마디 해도 당신이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당신의 마음이 아주 태연하며, 당신을 주먹으로 한 대 쳐도 역시 당신이 아무 말 하지 않고 한번 웃고 지나간다면 이 사람의 心性(씬씽)은 이미 아주 높다.”(《전법륜》)
개인적으로 이해하기에 수련의 방향은 심성제고이고, 제자들이 수련하는 길은 달라도 마음을 닦는 방향만은 일치한다. 위 단락의 법을 복습하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이렇게 다년간 수련했는데, 나는 이 방향으로 얼마나 전진했는가? 이 목표를 향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가?”
사실 나는 과거에 사람마음이 팽배해서 여러 해 동안 정반대로 행동했다. 나는 진솔한 사람이 되는 것부터 배워야한다. 왜냐하면 진솔한 사람이 이 목표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생각이 복잡해서, 조금이라도 귀에 거슬리는 말은 듣기 싫어하는데, 어떻게 욕을 참을 수 있겠는가? 자신은 예전에 남들이 나에 대한 칭찬이 부족하다고 속으로 불만을 품었다.
법에서 깨달은 수선(修善)의 중요성
《홍음 5》과 《홍음 6》을 공부하면서 나는 ‘선량’과 ‘전통’이 아주 여러 차례 언급되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선량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여기서는 그 중 몇 구절을 인용해 동수들과 함께 격려하고자 한다.
《홍음 5》<무엇이 신앙인가>
“사람 마음과 악한 생각을 내려놓으라, 천국은 선량(善良)함만 받아들이나니”
《홍음 5》<착한 백성을 선택하네>
“뭇 신은 이미 착한 백성 선택하고 있다네”
《홍음 6》<무엇이 행복인가>
“전통은 사람을 순박하게 한다네 선량함은 뭇 신들이 다 볼 수 있나니”
《홍음 6》<싫증나지 않는 이유>
“악(惡)을 품은 자 자신을 망치고 신의 길은 선념 품은 자 위해 펼쳐지나니”
사존의 신경문 《왜 인류가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받들어 읽으면서 나는 또 “선량함을 유지(保持善良)”한다는 말씀이 여러 번 언급되었음을 알았다.
결론
이 교류문장을 쓰고 나서 나는 자신이 뿌리를 캐야 할 부분이 아주 많음을 알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반성했고 불선(不善)이야말로 정말로 수련의 근본문제 중 하나임을 점점 더 느낄 수 있었다. 나는 20여 년을 수련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지난 몇 년간 가족들의 지적 외에도, 나는 주변 동수 내지는 속인들을 통해 선량에 관한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 아마 사부님께서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나를 계속 점화해주셨을 텐데 나는 진작 깨달았어야 했다.
나는 그동안 나의 불선한 염두, 불선한 언행, 이기심 등으로 남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 거듭 참회하고, 상처받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또 진심으로 사존께 참회한다.
제자의 죄업이 심각해서 법을 얻고 다년간 법을 배웠음에도 오히려 닦지 못해서 사존의 자비로운 고도를 저버렸습니다. 제가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나쁜 생명에서 점차 청성해져서 조금씩 바로잡을 수 있게 해주신 사존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저는 반드시 진심으로 법을 배우고 법에 동화하려고 노력해 선념과 자비를 닦아내겠습니다.
이상은 개인의 작은 체득이다.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롭게 지적해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1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