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征好)
【정견망】
한동안 진상을 알리는 과정 중에 내 사상 속에 줄곧 “내가 자네에게 청소하라는 것은 목욕통이네”[1]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의 수련상태 중에서 이해하기에 이는 사부님께서 내게 배치하신 수련 제목으로 내게 자신의 수련상태와 진상을 알리는 상태에 제고할 필요가 있다고 알려주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내게 수련중의 일부 이치를 알려주신 것이다.
1. “우리 사부님께서 당신을 구하러 오셨어요”
나는 한 노년 동수가 생각났다. 그녀는 가끔 우리 진상장소에 나타나곤 한다. 나는 그녀가 아주 짧은 시간에 여러 장(보통 한 장에 60명을 적을 수 있음)의 서명을 받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교류하면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서명을 받을 때 나는 속으로 ‘우리 사부님께서 당신을 구하러 오셨으니 빨리 서명하세요.’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때가 약 반년 전이었는데, 당시에는 이 말을 듣고도 그리 큰 감동이 없었다.
그런데 사부님께서는 왜 이 일을 다시 생각나게 하신 걸까? 이 일과 목욕통 청소 이야기가 또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사부님께서는 끊임없이 나를 점화해주시자 끊임없이 사고하는 과정에서 나는 서서히 명백해졌다. 부처님의 세계는 바로 부처님의 일념(一念)으로 이뤄진 것이라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그 한 층차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순정(純淨)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또 매 한 층차에서 부처님의 말씀은 바로 그 한 층차에서 가장 높은 천법(天法)이다.
석가모니가 목욕통을 청소하려 했을 때 그럼 목욕통을 청소하는 것이 바로 이때의 천상(天象)인 것이다. 이 천상 아래에서 생명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은 바로 부처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용(圓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욕통을 청소하려면 벌레를 죽여야 한다”[1]는 인식은 바로 하늘의 뜻을 가로 막는 부면(負面) 작용을 한다.
“우리 사부님께서 당신을 구하러 오셨다”는 이 일념 속에는 자신의 목적이나 인식이 없으며 이 일념은 중생들에게 “대궁(大穹)을 구하는 것은 창세주의 홍대한 소원이다. 내가 당신을 구하는 것은 창세주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창세주께서는 나를 통해 당신에게 구원의 은혜를 전하려 하신다”고 선고한 것이다. 창세주의 홍대한 소원은 바로 지금 시기 가장 큰 천상(天象)이다. 중생을 구도하는 과정에 ‘나(我)’의 요소가 차지하는 비율이 작을수록, 대법이 펼쳐내는 위력은 더욱 강대해진다!
이어서 사부님께서는 또 고사성어를 통해 나로 하여금 생명이 위에서 아래로 대응하는 것과 연관을 이해시켜 주셨다.
“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
전에 나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책을 읽어서 이해가 안 되면 안 되는 것인데 왜 백 번을 읽으면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자비하신 사부님께서는 내게 이 성어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셨다. 책속의 매 한 글자는 저자 본인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 저자는 이 우주에서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매 생명은 다 그의 내원이 있는 것으로 매 생명마다 그의 왕(王)이 있다. 그가 가장 낮은 곳에 왔지만 그러나 그와 그의 체계에서 가장 높은 층차의 생명은 여전히 관련이 있다.
누군가 정말로 책을 백 번 읽을 때면, 바로 이 책에 대한 정성을 드러낸 것이니 진실로 하늘을 감동시키며 그 체계 속 고층차의 생명이 그를 도와주기 때문에 단번에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야 나는 알았다. 왜 가끔 나는 마음먹은 대로 하지 못하고 힘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왜 나는 가끔 첩첩의 마난(魔難)을 겪는가? 나는 ‘나’의 수련, ‘나’의 제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함을 너무 중시했고, 무엇이 ‘무아(無我)’인지 몰랐으며, 심지어 내가 가장 어려울 때 내 생명을 만들어준 왕께, 위대한 창세주께 구원을 청하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한 생명이 어찌하여 ‘멸(滅)’이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마치 한 방울의 물이 바다를 떠나면 금방 증발하지만 법속에 녹아들면 마치 물방울이 큰 바다로 되돌아가 더는 물방울이란 이런 형태가 존재하지 않지만 그 생명은 소멸되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 이 물이 바로 바다가 되고 바다가 바로 물이 되어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니[不生不滅] 이것이 바로 생명의 진정한 대자재(大自在)다.
생명의 패괴(敗壞)는 자신을 만드신 신(神)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며 수련이란 바로 신을 향해 되돌아가는 과정이다.
나의 수련상태가 전변(轉變)되면서 ‘나’란 요소가 점차 옅어졌고 나는 처음으로 사부님께서 내게 배치해주신 수련의 길에서 매 한 걸음을 진지하게 사고하기 시작했다. 사부님께서는 내게 무엇을 완벽하게 하라고 하시는가? 무엇을 제거하라고 하시는가?
어느 날, 갑작스레 한바탕 마난이 닥쳐왔다. 상대방이 내게 상처를 입힌 후 나는 원한을 풀지 못했다. 한바탕 크게 해보려고 생각했는데 한 차례 혼란 속에서 내 마음이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평온해졌다. 나는 생각해보았다. ‘나는 수련하는 사람이 아닌가! 내 생명의 매 분 매 초는 다 수련 속에 있고 사부님께서 늘 나를 관할하신다. 사부님께서 기왕에 이 일이 내 수련 중에 나타나도록 허락하셨다면 그럼 이 일을 통해 내게 한 가지 법리(法理)를 가르치시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대체 내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신 걸까?’
나는 이에 귀를 쫑긋 세우고 나의 온 몸과 마음을 바쳐 공경하게 들어보았다. 이때 나는 ‘인(忍)’에 담긴 거대한 함의를 깨달았다. 원래 ‘인’이란 표면으로 드러나는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을 먹어도 대꾸하지 않는”[1] 것에 그치는 게 아니고, 또 자신이 할 수 있는 “화를 내거나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으며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2]에 그치지 않는다.
‘인’은 보다 깊고 보다 넓은 함의를 지니고 있다. 우선 ‘인(忍)’은 자비이고, ‘인(忍)’이란 생명을 구하는 것이며, ‘인’이란 대법에 대한 금강불파(金剛不破)한 정념이며, ‘인’이란 외계와는 무관하며, ‘인’이란 심지어 자신의 수련과 제고를 위한 것도 아니며, ‘인’이란 생명의 영원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진선인(真善忍)’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으로 그럼 나는 그 어떤 상황 하에서도, 설사 생명을 잃을지라도 단단히 지켜야 할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는 현 단계에서 사부님을 공경하는 ‘경사(敬師)’에 대한 나의 이해이다.
2. 현 단계에서 세 가지 일에 대한 이해
여기까지 쓰고 나니 사실 모든 것이 다 아주 어려워졌다. 깨닫기도 어렵고 표현하기도 어려워서 나는 여러 차례 포기하려고 생각했고 이 글을 컴퓨터에 방치한 것도 오래 되었다. “목욕통 청소” 이야기가 비록 나의 사로(思路)를 아주 멀리까지 가게 했지만, 나는 이 이야기와 내가 깨달은 법리 사이의 필연적인 연계를 분명하게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마치 나를 예측할 수 없는 피안(彼岸)으로 데려가는 다리와도 같았다.
내가 고심하며 깊이 생각한 후의 어느 날 새벽 활연히 깨달았다. 나는 우리 수련이란 바로 부동한 층차의 우주 천체와 연관이 생겨나고 또한 이런 연관을 끊는 과정임을 깨달았다. 결국 우리는 구우주와 모든 연관을 끊어야 하며 수련 중에서 표준에 부합하는 각종 결실을 지니고 사부님을 따라 신우주로 진입해야 한다. 밖에 나가서 세 가지 일을 하면 이런 연관이 생겨나고, 또 세 가지 일을 잘하면 이런 연관을 끊는다.
나는 마치 진선인(真善忍)이란 세 글자 속에 각각 진선인(真善忍)이 포함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 일도 매 하나의 일마다 세 가지 일을 포함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세 가지 일이 완성된 정도를 가지고 수련중의 관(關)과 난(難)을 살펴보면 잘 지내는 것과 잘 지내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볼 수 있다.
가령 ‘병(病)’을 예로 들자면, 왜 어떤 속인은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성심성의껏 외우면 병을 치료할 수 있는가? 그런데 다년간 수련한 대법제자가 오히려 왜 갑자기 병마에 시달리게 되는가? 사부님께서 설마 중생에 대해 차별하신단 말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속인은, 그의 현재 층차에서, 대법에 대한 그런 바른 믿음이란 일념만으로도 이 층차에서 모든 사악을 깡그리 소탕하기에 충분한데, 대법은 이 때문에 그가 이 층차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복분(福份)을 부여한다.
같은 ‘병업’이지만 대법제자가 감당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주불(主佛)께서 직접 가르친 제자이자 미래 우주의 보위자로서, 우리의 수련 과정에서 수련이 어느 한 층차에 도달했다면 이 한 층차 속 구세력과 부면적인 생명이 곧 우리와 대등을 형성한다. 그러면 우리의 정념이 곧 그 정도로 강력해져야만 이 한 층차의 사악을 제거할 수 있다.
동시에 나는 병업 상태란 이 한 층차에서 바로잡히지 않은 생명들의 바르지 못한 상태가 우리 신체 표면에 반응된 것이며 우리 이 주체(主體)에게 구해달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면 착실한 수련 중에서 우리에 대한 이 층차의 법의 요구에 엄격히 도달해서 이 층차의 법리를 증오(證悟)해야만 비로소 이 층차 신체 체계 내의 중생이 대법의 구도를 받게 할 수 있다. 동시에 밖에 나가서 진상을 알리고 우리와 인연이 있는 중생들을 찾아내 사전(史前)에 맺은 약속을 실현해야 한다.
진상을 알리는 과정에서 나는 또 사실 사람을 구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구하는 것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우리가 구해야 할 중생은 원래 우리 천체 체계의 일부분으로, 우리는 마치 하늘을 보충한 여와(女媧)처럼 우리의 천체 체계를 보완해 완벽하게 만드는 동시에 우리의 지혜 역시 조금씩 완전해져서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신 이 한 부의 법을 더 잘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용기 역시 조금씩 자라나서 이 한 층차 속에서 대법을 파괴하는 사악을 직접 타파하고 이 한 층차 속의 소중한 운운중생(芸芸眾生)을 구도할 수 있다.
동시에, 진상을 분명히 알리는 과정에서 나는 또 사부님의 홍대한 은혜를 느꼈다. 진상을 알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아주 오랫동안 나를 곤란하게 했던 수련 중의 어려운 문제들이 단번에 해결된 것이 몇 차례인지 모른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세 가지 일을 잘하라고 하셨는데, 어느 한 가지 일을 잘하지 못해도 모두 우리 수련중의 단점이 되고, 이 단점이 우리 수련의 높이를 결정한다. 부동한 수련 층차 중에서 어느 한 가지 일을 잘 하지 못하면 그럼 이 층차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럼 이 층차 요소의 제약을 받게 되며 이 층차에서 우리에게 무한한 희망을 건 중생을 해탈시킬 수 없다.
예전에 나는 사부님께서 매 한 제자를 구도하는 과정에 왜 한 사발의 독약을 마셔야 했는지 몰랐다. 사부님께서는 이 우주중의 그 어떤 생명에게도 빚을 지지 않으셨고 우리 이 우주의 모든 생명이 다 사부님께 빚을 졌다. 그런데 왜 이 우주 중 생명의 변이된 관념을 바꾸기 위해 그들이 사부님의 신체를 해치도록 허락하셨을까?
내가 이 문장을 쓰는 과정 중에 자비하신 사부님께서는 지금 현재 내가 알 수 있는 함의를 개시해주셨다. 나는 놀랐고 또 눈물이 났다. 원래 이 우주 중에서 그 어떤 생명도 사부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일을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사부님께서 기꺼이 이 한 사발의 독약을 마시게 된 이유는 바로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관을 넘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 최대한 많은 중생을 남기려 하셨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진(進)과 퇴(退)는 두 하늘이라”[3]고 하셨다. 한 층 하늘 또 한 층 하늘로 된 천체(天體)를 바로잡으려면 한 층 하늘 또 한 층 하늘의 은원(恩怨 은혜와 원한)을 해결해야 하며, 한 층 하늘 또 한 층 하늘의 중생을 구도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천지는 정법(正法)의 길을 막지 못하는데 다만 제자들의 사람 마음이 가로막고 있네”[4]
바로 우리의 사람마음이 사부님의 정법 노정을 가로막는 것이고 바로 우리가 사람마음을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 우리에게 두터운 기대를 걸었던 중생들을 소훼될 운명에 처하게 한 것이다.
나는 지금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나를 대신해 감당해 주셨다”라는 구절을 보면 마음속으로 너무나 고통스럽다. 만약 우리가 세 가지 일에서 끊임없이 정진할 수 있었다면, 사부님께서는 원래 우리를 돕기 위해 추가로 감당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사부님께서 아프지 않으실 수 있겠는가? 전 세계에 이렇게 많은 대법제자들이 있는데 날마다 단지 5%의 제자들이 제5장 공법을 연마하지 못한다고 해도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을 도와 소업의 고통을 감당하셔야 하는데 사부님께서 어떤 고통을 감당하시는가?
설령 단지 5%의 제자가 수련 중에서 관(關)을 넘지 못해 이 관에서 그가 구도하도록 배치된 중생들이 소훼될 운명에 처한다 해도, 사부님께서 제자를 도와 관을 넘게 하기 위해 고통을 감당하셔야 하는데, 사부님께서 감당하시는 것은 또 어떤 고통이겠는가?
우리의 매 하루, 매 한 관(關), 매 일념, 심지어 우리의 연공 동작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많은 중생의 명(命)을 싣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로 이렇게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고, 이렇게 신성한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 세 가지 일을 잘하는 외에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란 없다.
이 글은 현재 수련상태중의 인식으로 동수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1] 리훙쯔 사부님 저작:《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 저작:《정진요지》<무엇이 참음인가>
[3] 리훙쯔 사부님 저작:《홍음 3》<일념>
[4] 리훙쯔 사부님 저작:《홍음 3》<번거로움麻煩>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1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