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제자
【정견망】
수련이 제고됨에 따라, 자신이 이전에 했던 일부 말 속에 아주 강한 자아(自我)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당시에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일부 동수들에게도 이런 현상이 발견된다. 두드러진 공통점은 입만 열면 함부로 말하는 것으로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남을 부정하고, 잠재의식 속에서 자신이 대단하다고 느낀다. 사실 이는 이지적이지 못하고 또 불선(不善)한 것이자 아울러 극단적인 당문화(黨文化)에 속한다.
아래에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분석해보겠다.
마음을 조용히 하고 귀를 기울이며 자신을 표현하는데 조급하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한다.
수련 초기, 동수 A가 내게 말했다.
“사람의 모든 집착은 다 명(名), 이(利), 정(情)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나는 2초도 안 돼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 어떤 집착이든 다 정(情)입니다.”라고 대답했는데 말속에는 동수를 부정하고 또 억누르는 뜻이 담겨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동수의 말은 틀리지 않고, 내 말도 틀리지 않다. 높고 낮음은 말하지 않더라도 그저 보는 각도가 다를 뿐이다. 동수가 기왕에 자신의 심득체험(心得體會)을 이야기했다면 나는 마땅히 우선 동수가 말한 것에서 깨달아야지 멋대로 말을 가로 막고 남의 생각을 끊어선 안 되며 더욱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동수의 심득을 부정하지 말았어야 한다.
한번은 동수 B에게 “박해가 꽤 오래갈 것” 같다고 느낌을 말하자, B가 곧장 말했다.
“박해가 꽤 오래가는 게 아니라 많은 수련생들이 잘 닦지 못한 겁니다.”
사실, 많은 수련생들이 제대로 수련하지 못했고, 박해가 20년 넘게 지속되었으니 확실히 오래되었다.
동수의 층차가 다르고 박해 중에 겪은 구체적인 경험과 감수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모두 정상적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감수를 가지고 동수의 감수를 부정하는 것은 ‘나’를 너무 높게 놓아 남을 이해할 수 없는 게 아닌가? 더욱이 겨우 한 마디만 듣고 어떻게 다른 사람이 진정으로 표현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확정할 수 있는가?
“~일뿐(只是)”과 “~이다(是)”는 전혀 다른 경계
나는 전에 동수 C와 이성적인 사고를 거친 후 얻은 인식에 대해 교류하면서 말했다.
“내 생각에 사부님께서 가장 걱정하시는 것은 바로 수련 성취하지 못하는 이 부분 대법제자들입니다.”
내 의도는 교류에 있었지 내 말이 꼭 옳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C는 내 말을 듣자마자 바로 반박했다.
“그것은 당신 생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당시 나는 아주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어찌 이리 조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걸까?’
내가 볼 때 그녀가 나를 부정할 때 아무런 이성적인 사고를 거치지 않았다. 사실 이 문제에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지만, 무의식중에 자신을 높이 놓고 마치 진리를 장악한 듯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마 수련을 아주 오래했기 때문에 잠재의식 속에 남보다 낫다는 마음을 아직 깨끗이 제거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동수를 비난할 뜻은 없고, 단지 예로 들어 이치를 설명하려는 것으로 나 역시 이런 하나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즉, 만약 어떤 분야에서 정확하지 않거나 깨닫지 못했다면 그럼 마땅히 솔직하고 겸허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만이 수련자가 마땅히 지닐 모습이다.
다른 한편, 설사 동수가 옳지 않을지라도, 나 역시 마땅히 자신을 먼저 찾아봐야 한다. 이는 나에게 남이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 나의 이런 마음이 다른 사람이 내게 이렇게 하도록 초래한 것은 아닌가? 이 역시 아주 중요하다.
나는 여기서 사부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수련생이 쓴 문장에서 삼원색과 真(쩐)ㆍ善(싼)ㆍ忍(런)은 관계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수련 중에서 자신의 감수이고, 真(쩐)ㆍ善(싼)ㆍ忍(런)의 근본적인 실질이 아니다.”(《음악과 미술창작회 설법》〈미술창작연구회설법〉)
이 수련생이 깨달은 것은 근본적인 실질이 아니었지만 사부님께서는 제자를 부정하는 대신 “그것은 수련중에서 자신의 감수”라며 긍정하셨다. 책을 읽다가 이 짧은 말씀이 내 귀에 울려 펴졌고 나는 사부님께서 경지(境界)가 다른 생명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고 관용하시는 것을 느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현재 명혜망에 교류문장을 발표하면서 대부분 마지막에 “본문은 글쓴이의 현재 수련상태에서 개인 인식을 대표한다”고 주를 달았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대표한다”이지 “대표할 뿐이다”가 아니다. 이는 대법 사이트의 일종 엄격한 태도인데 여기에는 또 동수에 대한 긍정을 포함한다.
결론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수련 중의 감수와 심득(心得)을 서로 담론함은 아주 필요한 것이다. 오로지 의식적으로 자신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촉진하고 공동 제고함은 문제가 없다.”(《정진요지》〈법회〉)
제자들이 사부님의 이 법을 같이 수련하면서 함께 할 수 있음은 마땅히 소중히 여겨야 할 연분(緣份)으로 수련 심득을 교류하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당문화를 끌어들인다면 이 신성하고 조화로운 장을 파괴할 수 있고 교류를 진행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속인 중에서도 예의가 없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남의 의견을 부정하는 것은 대부분 잠재의식 속에 일종의 자만심이 있거나 또는 어디서 주워들은 말로 남에게 선입견이 있거나 또는 정(情)에 이끌려 비이성적이거나 또는 질투심이 일어나는 등이다.
“함부로 말함”은 원용(圓容)・겸손・이성이 부족한 것으로, 기점이 위사(爲私)한 것으로 여기에는 아마 다양한 사람마음이 있을 것이다. 이런 당 문화 습성은 수많은 대륙 속인들에게서 더욱 강하게 나타나며 이미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때문에 대륙에서 생활하는 제자들은 이 방면에서 자신을 닦는데 더욱 주의해야 한다.
과거 구우주(舊宇宙)의 일체 생명은 모두 법(法)을 몰라 생명의 과정을 위사위아(爲私爲我)한 기초위에 세웠다. 때문에 자아에 대한 집착은 점차 가장 제거하기 어렵고 가장 은폐된 하나의 마음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대법을 알고 또 법 공부를 통해 자신에 대한 집착을 발견해서 제거할 수 있으니, 정각(正覺)의 위타(爲他)한 신우주 생명으로 성취되어야만 광활한 새로운 천지를 볼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