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真愚)
【정견망】
(1)
“수련 중에서 어떤 수련자는 단지 높은 데로 공이 자랄 뿐만 아니라 또한 낮은 데로도 공이 자랄 수 있다. 그 층차에 입각해 사람을 보면 더욱 별도로 되는 뜻이 있다.”(《휴스턴법회설법》)
사부님께서는 초기 설법 중에서 또 수미산(須彌山)에 관한 법을 말씀하셨는데 수미산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동시에 수미산은 또 제2층 우주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개인 차원에서 깨달은 것은 이렇다. 수미산은 미시적으로는 원자 층면에 존재하며, 거시적으로는 또 제2층 우주 속에 위치한다. 그는 원자와 제2층 우주 사이의 거대한 범위 안에 있는데, 우리 소우주(小宇宙)는 이 범위 안에서 그저 하나의 먼지만도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소우주에서 볼 수 있는 수미산이란 단지 진실로 존재하는 전체 수미산의 작은 한 점에 불과할 뿐이며, 그가 우리 소우주에 대응하는 작은 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개인적인 인식으로 용량(容量)은 생명이 포용하는 우주 범위로 이는 생명이 포용하고 실을 수 있는 크기이자, 생명의 내함이 있는 것이다.
우리 인류가 존재하는 세계는 바로 우주의 가장 중간, 가장 표층으로 분자(미시)와 별(거시)이라는 극히 협소한 공간 범위 안에 있다.
한 생명의 용량이 얼마나 큰가를 보려면, 단지 그의 높은 곳(미시적)이 얼마나 높은지 볼 뿐만 아니라 그의 낮은 곳(거시적)이 얼마나 낮은지,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가장 낮은 곳까지 포함하는 범위, 즉 미시적인 것에서 거시적인 것까지 포함하는 범위야말로 그의 진실한 용량 크기다. 높은 곳이 아무리 높을지라도 만약 낮은 곳이 매우 천박해서 낮아질 수 없다면 그럼 용량과 범위 역시 매우 제한되어 보다 많고 보다 큰 중생과 내함(內涵)을 포용하고 실을 수 없다.
개인 층차에서 깨달은 것은 우리 대법제자는 전반 방대한 우주 범위와 대응하고 또 대표하므로 대법수련에서 우리는 높은 곳(미시적)으로 공(功)이 자랄 뿐만 아니라 낮은 곳(거시적)으로도 공이 자라는 것으로, 수련 원만한 후에야 우리 대법제자 정체가 비로소 전반 우주를 포괄할 수 있다.
수련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높은 곳’만 바라보고 오히려 낮은 곳으로 수련하는 것은 소홀히 한다. 특히 속인 중에서 능력이 좀 있는 수련인이 더욱 그렇다.
(2)
개인 층차에서 본 것은 수련인들이 낮은 곳으로 수련하는 것을 가로막는 근본 원인은 역시 ‘사(私)’라는 한 글자다. 높은 곳으로 수련하는 것과 낮은 곳으로 수련하는 것은 동시에 진행되는 것으로, 서로 대응하며, 최후에 하나로 합쳐진다. 단지 과정 중에 두 방면으로 표현될 뿐이다. ‘사(私)’는 수련인이 높은 곳으로 수련하는 것을 저지하는 동시에 수련인이 낮은 곳으로 수련하는 것도 저애하는데 단지 표현만 다를 뿐이다.
생명이 더 낮아질 수 없는 이유는 아래에 받쳐주는 물건이 있어서 자신을 높이 받쳐줘 내려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밑에 받친 것을 빼낸다면, 조금 빼내면 곧 그만큼 내려가고 전부 빼면 곧 끝까지 내려가서 “바닥이 없게(無底)” 된다.
‘사(私)’를 완전히 제거해서 위로 ‘경계가 없고(無界)’ 아래로 ‘바닥이 없을’ 때 곧 하나가 되는데,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며 누락 없는 지원(至圓)이 되어, 안이 곧 밖이 되고 밖이 곧 안이 되어 모든 것을 포용하며 누락이 없고 불파(不破)하다. 개인 층차에서 이해하기에 이것이 바로 ‘원용불파(圓容不破)’다
앞서 예로 든 어항의 사례를 다시 한 번 보자. 만약 한쪽 면에서만 보자면 어항은 용량이 제한되어 있고 약간의 물만 부어도 가득 찬다. 만약 그것의 테두리를 타파해 바닥을 뚫어버리면 그럼 그것은 영원히 가득 찰 수 없고 용량이 무한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한 방울의 물도 담지 못하고 다 새버리는데 결국은 모두 헛수고가 된다. 왜냐하면 전반 과정에서 그것은 바닥이 없어서 실을 수 없으며 헛걸음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다른 방면에서 보완하고 그것이 실제적이 되게 하는 것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그것에게 바닥이 있어 실을 수 있게 해야 하는데 그 후 과정 중에서 또 한 층 한 층 끊임없이 ‘사(私)’를 제거하고, 끊임없이 심층(深層)으로 그것의 ‘바닥’을 내려놓아, 그것의 용량을 확대하고 실어야 하는데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를 제거해 ‘바닥이 없고’ ‘경계가 없는’ 데 도달해 안이 곧 밖이 되고 밖이 곧 안이 되는 혼연일체에 도달하면 그럼 하나의 원용하고 누락이 없는 지원(至圓)을 형성하게 된다. ‘안쪽 면’이 그것의 용량이면 ‘바깥 면’ 역시 그것의 용량이 된다. 그럼 영원히 가득 채울 수 없고 모든 것을 채워도 누락이 없을 것이다.
개인 층차의 소견은 이렇다. 진정한 대법제자는 원만해서 신우주(新宇宙)에 진입한 후 장차 전체 신우주와 대응할 것이다. 나아가면(進), 대법제자가 전체 우주와 대응하니 우주는 바로 대법제자의 신체가 된다. 물러나면(退) 대법제자는 대법의 한 입자가 되어 대법 속에 물러나 형체도 없고 흔적도 없게 될 것이며, 미래에 우주와 대법을 소통하는 다리가 될 것이며, 미래 신우주의 장주[長住 장기간 성주(成住) 상태에 머무는 것]를 수호해 영원히 괴멸(壞滅)되지 않게 할 것이다.
(3)
개인적으로 보기에 “버림(舍掉)”은 “낮춤(放低)”과 같지 않다. 낮추는 것이 더 무겁고, 그것의 내함에는 실음(承載)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A가 맡은 항목에서 A는 B에게 여러 차례 상처를 주고 밀어냈다. 하지만 B는 A와 따지지 않았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동시에 A와 그의 항목에서 멀리 떨어졌다. 어떤 방면에서 보면 이는 “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B가 A와 따지지 않는 동시에 여전히 A와 그 항목을 떠나지 않고, A가 준 여러 차례 상처와 배척에 대해서도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고 서서히 A와 그 항목을 포용한다면 결국에는 자신을 끝까지 낮출 수 있게 되며 묵묵히 소리 없는 디딤돌이 되어 모든 모순을 해결하고, 항목에 그 어떤 손실도 끼치지 않을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낮춤’이다.
다른 방면에서 보자면 이 과정에서 표면으로 보자면 A가 항목의 책임자이고 그가 항목을 이끌며 B는 그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디딤돌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보다 심층(深層)에서 보자면, B야말로 진정으로 최종적인 주관자다. 왜냐하면 그가 전반 항목을 실었으니 전반 항목이 모두 그의 범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수년 전, 나는 일찍이 “생명의 밑바닥, 만물의 꼭대기(生命之底,萬物之巔)”라는 구절을 본 적이 있는데 양자는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일체(一體)다.
상고(上古)시기 왕을 후[后. 后는 後와 발음이 같고 고대에는 서로 통용되었다.]라고도 불렀다. 즉 한 국가 또는 민족의 주재자다. 가장 앞에서 이끄는 사람이 꼭 진정한 왕이 아니며 아마 ‘선두 새(出頭鳥)’일 수 있다. 그러나 맨 뒤에서 전체를 싣고 전반 국면을 통제하는 사람이 진정한 왕자(王者)다.
《노자》는 표면적으로 보면 왕이 되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만, 동시에 또 도(道)를 닦아 신선이 되는 것을 가르치는데 이는 동보(同步)적이다. 진정으로 합격한 왕이 될 수 있는 동시에 또 도를 얻는 신선이 될 수 있다면 이를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 할 수 있다.
《노자》는 말한다.
“강과 바다가 천하의 하천의 왕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잘 낮추기 때문에 많은 하천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수련 중에서 단지 ‘선두 새’와 ‘우두머리 양’이 되어 ‘군계일학’이 되기 위해 경쟁해서는 안 되며, 동시에 낮추는 것을 배워 착실하고 묵묵하게 소리 내지 않는 ‘디딤돌’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자아(自我)를 돋보일 필요가 없는데 자아를 돋보이게 하면 걸림돌이 되어 동수를 넘어뜨리거나 심지어 항목을 넘어뜨릴 수 있다. 자신을 가장 낮은 곳에 내려놓고, 동수와 항목이 자신의 몸을 밟고 가게 만들어 항목을 높이 받쳐주어야 한다.
(4)
우주가 멸(滅)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변이되고 패괴(敗壞)되어 극단으로 나아간다. 도가(道家)는 진(真) 닦지만, 우주 멸의 과정에 이르면 이 ‘진’ 역시 상생상극 속에서 극단으로 나아간다. 도가는 청정무위(清淨無爲)를 중시하고 단독 수련과 혼자 하는 것을 좋아하며, 속세를 벗어나는 것을 중시한다. 이것이 극단에 이르면 곧 점차적으로 고아(高雅)하고, 청고(淸高)하며, 도도해지거나 심지어 최후에는 오만해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까지 발전된다.
예부터 속인 중의 문인아사(文人雅士)들도 대부분 이런 결점이 있었는데, 사람을 삼육구(三六九) 등급으로 나누길 좋아하고,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온갖 방법을 써서 밀어내거나 무시하는데 이 역시 질투심의 한 가지 근원이다. 개인적으로 도가(道家) 특성을 지닌 수련인들은 거의 다 이런 것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사실 진정한 대도에서 ‘진(真)’은 근본상에서 발전한 것으로 ‘성(誠)’을 낳고, ‘지성지심(至誠之心 지극히 성실한 마음)’을 낳는다. 즉 겉과 속이 한결같고, 처음과 끝이 한결 같으며, 영원히 배반하지 않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이에 또 ‘신(信)’을 낳는데,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으며, ‘충(忠)’, ‘정(貞)’ 등을 낳는다. 동시에 또 ‘경건(敬虔)’을 낳고, ‘경(敬)’을 낳으니 사부님을 공경하고 법을 공경하며 ‘겸손(謙卑)’ 등을 낳는다. 이런 것들은 모두 정말로 심층(深層)의 내함이다.
유가의 《중용》에서 강조하는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지성지심’인데, 이는 ‘진(真)’이 중용에 처해 있을 때, 극단으로 나가지 않을 때 근본 상에서 생겨난 내함이다. 진정한 대도는 겸손한 것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낮추지 못하면 수련이 곧 표면에 뜨게 되는데 발이 땅을 디디지 못하면 이로 인해 허황하게 변하고 결국에는 수포로 돌아간다.
대법제자의 수련은 단순히 “공(空)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이어야 한다. 실을 수도 있어야 하고 내려놓을 수도 있어야 한다. 반드시 ‘아는 것’과 ‘도를 얻은 것(得道)’의 거리를 뛰어넘어 법을 바르게 깨닫는 동시에 법을 실증해야 한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528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