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수련 노트 3 (하) : 낮은 곳으로 가서 수련

진우(真愚)

【정견망】

(5)

속인들은 흔히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매사에 비교적 진실한 것을 좋아하고 아울러 ‘진(真)’으로 덮으며 자신이 높이 수련했다고 생각하는데 겉으로 표현되는 것은 “눈 속에 단 한 알의 모래조차 용납하지 않으며” 시시각각 날카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에는 자신의 환경이 모순이 중첩 되게 만들어 해결하지 못하는데 결국에는 그 누구와도 협력하지 못하고, 그 어떤 항목에도 참여하기를 꺼리게 되며, 서서히 자신을 고립시킨다. 다른 사람을 안중에 두지 못하고, 모든 것에 대해 소극적이 되고 실망하는데 그러면서 자신이 청고(淸高)하다고 느낀다.

이것은 사실 생명의 천박함인데, 왜냐하면 자신을 낮출 수 없고, 낮은 곳에 머물며 닦을 수 없기 때문에 생명에 두터움이 없고, 용량이 없어서 감당하고 포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범위가 텅텅(空空) 빈 것과 같은데 그 어떤 중생도 싣지 못해 정말로 텅 빌 수 있다.

사람 이곳에서는 종종 진정한 옳고 그름이란 없는데, 때로 ‘흐릿한 것‘이 오히려 지혜가 된다. 설령 속으로 훤히 알더라도 마음속 깊이 지혜를 감추고 예봉을 드러내지 말아야 하며, 설사 속으로는 다 알지라도 표면적으로는 ‘흐리멍덩’할 때는 ‘흐리멍덩’하고 어리석어 바보처럼 보이는 이것이 포용(包容)의 경지다. 마치 대지(大地)와 같은데 낮기에 두터울 수 있으며, 그보다 더 낮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만물을 가리지 않고 실을 수 있으며,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더러운 것이든 깨끗한 것이든 다 포용할 수 있다.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용량을 갖췄으며 동시에 모든 것을 녹일 수 있는 에너지를 갖췄기에, 모든 나쁜 것들마저도 그 자신의 홍대(洪大)한 에너지장 속에서 용해시키고 녹여낼 수 있다.

때로는 마음이 밝은 거울처럼 맑지만, 겉으로는 오히려 좀 흐린 물처럼 보이는데 가슴속에는 이미 만물을 품고 있기에 생기가 넘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큰 지혜인데 “큰 지혜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大智若愚)”고 한다.

(6)

“당신이 아무리 좋지 않고, 아무리 나쁘더라도 마치 강철과 같은 것이라도 불법의 慈悲(츠뻬이)한 위력 앞에서는 모두 녹아버린다.”(《미국서부법회설법》)

그런데 ‘용(容)’, ‘용(溶 물에 녹다)’, ‘용(熔 불에 녹다)’은 모두 발음이 같다. ‘용(溶)’과 ‘용(熔)’은 모두 ‘용(容 포용)’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개인적인 인식은 포용(容)이 바로 기초가 되며 오직 포용한 이후라야만 녹여낼 에너지가 있을 수 있다. 모든 것을 포용한 후에야 좋지 않은 모든 것들을 녹일 수 있고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포용하지 못하면, 녹이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는데 왜냐하면 상대방이 자신의 에너지장 속에 있지 않기에 건드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 표면적인 수단과 강요가 되어 결국에는 아무것도 개변할 수 없다.

오직 자아(自我)를 내려놓고, 자신을 높이 받쳐주는 모든 것을 버리고, 끝까지 겸손하게 내려놓고, 묵묵히 중생을 실어야만, 중생을 자신의 범위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이를 통해 좋지 않은 모든 것들을 자신의 홍대(洪大)한 자비의 장(場) 속에서 녹여낼 수 있는데, 모든 것을 소리 없이 녹여내 개변시킬 수 있다.

오직 진정으로 ‘포용’(容)해야만 녹여낼 수 있다.

(7)

예전에 어떤 동수가 나와 마(魔)와 도(道)의 문제를 교류한 적이 있는데 그는 전에 줄곧 왜 마(魔)는 영원히 도를 넘어설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야 명백해졌다. 만약 마가 도보다 높아지면 그것은 도(道)를 용납하지 못하기에, 그것과 인식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그것이 모두 없애버릴 것이다. 그러면 우주 중에는 곧 도(道)는 사라지고 오직 마만 남게 되어 우주는 곧 훼멸될 것이다. 만약 도가 마보다 높으면 도는 마의 존재를 포용할 수 있으며, 심지어 그것을 호법(護法)으로 만들 수 있기에 우주는 더욱 다채로워진다.

(8)

개인적으로 인식하기에 진정한 포용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며, 만물을 아래로 내려다본 후 만물을 포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거짓이다. 왜냐하면 만물보다 더 낮은 곳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럼 만물이 곧 당신의 범위 바깥에 있기에 진정으로 싣고 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포용은 ‘겸손(謙卑)’이고 ‘진정(真誠)’이며 아래로부터 위로 가는 것이다. 자신을 낮춰서 자신의 낮은 곳이 만물보다 낮게 하고 자신의 높은 곳이 만물보다 높게 해야 만물을 실을 수 있고 만물을 자신의 범위 안에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포용이고 만물을 녹이는 것이다.

오직 이런 각도에 서야만 만물을 소중히 여길 수 있고, 만물을 마치 자기 아이처럼 보고, 그들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고, 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을 남겨주려 할 것이다. 이는 표면적으로 해내거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며 심층의 순정(純淨)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홍대(洪大)한 자비이자 진정한 포용이다.

(9)

사부님의 경문 《원용》, 《무루》를 공부할 때 개인적으로 깨달은 것은 먼저 자신을 그 층 법속에서 뛰쳐나와야 하는데 뛰쳐나온 후 또 다시 자신을 돌려놓을 수 있으면 곧 원용으로 그 한 층의 법(法)이 바로 잡힌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그 층의 법속의 원용무루(圓容無漏)에 도달할 수 있다.

만약 아예 뛰쳐나가지도 못하면서 이 층 법의 원용을 말하는 것은 단지 사람의 망상과 집착일 뿐이며, 심지어 이 때문에 마도(魔道)로 들어갈 수 있다. 만약 뛰쳐나올 수 있지만 자신을 내려놓고 이 층의 법을 원용하지 못한다면 그럼 이 층의 법은 장차 존재하지 않게 되며 마찬가지로 단편적이고 극단적이 될 것이다.

법리(法理)는 원용(圓容)한 것으로 현묘하고 끝이 없는 것이다. 그 어떤 단편적인 이해와 방법도 모두 극단으로 걸어갈 수 있고 심지어 마도로 들어가게 할 수 있다.

상생상극(相生相剋) 속에는 거대한 구멍이 존재하는데, 극단으로 갈수록 이 구멍은 더욱 커진다. 이는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사람은 모두 상생상극 속에서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오직 법속에서 중용을 행하며 극단으로 나가지 말아야만 비로소 상생상극에서 뛰쳐나와 누락이 없는 원용불파(圓容不破)를 닦아 낼 수 있다.

개인의 층차에 몹시 한계가 있어서 이해 역시 한계가 있다. 단지 수련과정 중에서 대법에서 얻은 아주 작은 심득을 적어내 여러분들과 교류하고 함께 제고하고자 할 뿐이다. 여러분들이 모두 법을 스승으로 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528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