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真愚)
【정견망】
필자는 어릴 때 자폐증을 앓아 정상적으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었고 아주 심각한 심리장애가 있었다. 이 결함 때문에 나는 어릴 때 무시당했고, 어려서부터 큰 열등감을 가졌으며 자신을 완전히 봉폐시켜 사회와 접촉하길 싫어했고,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 두려웠다. 이렇게 나의 괴팍한 인생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 열등감 배후에 강렬한 자존심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자존심의 심층에는 또 강렬한 오만이 숨겨져 있었다. 이 오만은 내 생명 아주 깊은 층까지 관통했는데 단지 어려서부터 결함과 열등감이 표면적으로 그것을 억눌러 더욱 은폐시키고 더 깊이 감춰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이후 인생에서, 특히 일단 어떤 능력이 생긴 후, 내심 깊은 층의 이런 오만함이 분수에 만족할 줄 모르고 시시각각 암암리에 내 인생을 교활하고 은밀하게 좌우지하고자 했다.
나는 설령 내게 장점이 있을지라도 오직 심층(深層)에서 들여다보기만 하면 그것에는 오염되고 변이된 것이 섞여 있으며 늘 그것의 그림자가 숨어 있어서, 종종 좋은 일을 나쁜 일로 만들고, ‘좋은 마음’이 ‘나쁜 일’로 변하게 하는 것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이것이 내 생명 깊이 뿌리를 내렸고, 관통한 생명의 층면이 너무 깊어서, 뼈를 깎듯이 도려내고 능지(凌遲)하듯이 안으로 찾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그것의 뿌리를 뽑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표면 가지와 잎만 잘라내면 적당한 시기가 되면 그것이 다시 생겨날 수 있다.
[역주: 능지(凌遲)란 죄인의 뼈와 살을 발라내어 죽이는 형벌이다. 그야말로 사람을 산 채로 회 뜨며 서서히 죽이는 잔인한 형벌이다. 저자는 능지란 단어를 사용해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아주 고통스럽고 완만한 과정임을 표현한다.]
나는 내 일생의 장점을 한 조목씩 분석해보았다.
나는 종종 자신이 적막을 견뎌낼 수 있다고 느끼며, 장기간 다른 사람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자신을 좁은 공간에 가두고, 외부와 접촉하지 않으면서 외부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하는데 전념했다. 내가 발견한 것은 이런 적막을 견뎌낼 수 있는 배후에는 잠복한 것이 숨어서 세력이 쌓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때가 되면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때가 되면 단번에 하늘로 날아올라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고 뭇사람들이 우러러보게 만들어 자아를 실증하려는 것이다.
나는 종종 자신이 일하는데 아주 집중해서 마음을 쓰며 장기간 한 가지 일에 전념할 수 있다고 느끼는데, 요구가 아주 까다롭고 그 어떤 세부 사항이든 완벽할 것을 요구하며, 다른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효과를 내야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가장 잘해서 속인들이 경탄하게 해야 했다. 깊이 파헤쳐 보면 이 배후에는 자신이 ‘천하무적(天下無敵)’이란 오만함이 드러났다. 그 누구도 안중에 두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자신만 못하다고 여겼으며, 자신은 무슨 일을 하든지 다 되며 내가 관여한 영역에선 남이 나를 초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승복하지 않았다.
지금껏 늘 남이 걸어온 길을 하찮게 여겼고 늘 다른 길을 찾으려 했으며 지금껏 남을 따라가고 대중에 부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늘 자신만의 독특하고 깊은 견해를 얻으려 했다. 이런 표면을 벗겨내면 배후에 감춰진 것은 자신을 여러 사람 위에 올려놓고 내게는 만인(萬人)이 미치지 못하는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오만함이 숨어 있었다.
오직 자신이 인정하는 일이기만 하면, 늘 모든 압력을 무릅쓰고 끝까지 하길 좋아했고, 압력이 더욱 클수록 더욱 힘이 나서 더욱 발광했다. 심지어 자신을 극히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하는 것도 돌아보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한 것도 내버려두었으며, 세인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행동까지 했다. 이렇게 하는 배후는 극단적인 자아와 오만함인데 기어코 자신의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특수하며 남과 다름을 표현하려 했다. 심지어 저항력이 너무 커서 버티지 못할 때에는 “신(神)이 가로막으면 신을 죽이고 마(魔)가 가로막으면 마를 베어버린다”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사부님을 제외하면 누구도 안중에 두지 않았고 헛소리를 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고하셨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말을 함부로 하면 부처마저도 놀라게 되는데, 자신의 수련에 장애를 조성하지 말고 이 방면에서도 수구해야 한다.”(《정진요지》〈광언을 하지 말라〉)
생명 심층의 변이와 오만은 나를 여러 차례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했고, 자신의 수련에 극히 거대한 저애력과 마난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일률적으로 전진하면서 진정한 원인을 볼 수 없었다. 내 수련은 왜 이렇게 힘든가? 가는 길에 늘 큰 바람과 파도가 몰아치고, 시시각각 풍랑이 너무 강했는데 마난이 너무 커서 지나갈 수 없을 때는 심지어 원한(怨恨)도 생겨났고 또 실망해서 의기소침해졌다.
나는 늘 겉으로는 겸허하고 부드러우며 자신을 자랑하길 싫어하고 과시하는 걸 싫어하며 세상과 다툼이 없었다. 하지만 깊이 파보고 나서 발견한 것은 겸허는 내가 겸허하다는 좋은 명성을 좋아했기 때문이고, 과시하길 싫어한 것은 과시한다는 나쁜 명성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자신이 속인 표면의 도덕과 명성에 연연했던 것이다. 때문에 겉으로는 감추고 있었지만 내심 깊은 곳에서는 오히려 남들이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성취를 발견해주길 원했다. 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길 싫어하고 세상과 다툼이 없는 것 역시 타고난 결함 때문에 제한되어 조성된 것으로 내가 정말로 그렇게 부드럽고 묵묵히 했던 게 아니었다.
이런 변이된 오만함은 극히 음험(陰險)하고 악랄하며 교활한 것이다. 당신이 사람 속에서 아무리 총명해도 그것은 늘 당신보다 한 수 위이고, 당신이 속으로 좋든 싫든 그것은 모두 다 꿰뚫어 당신보다 똑똑하다. 그것은 늘 당신이 가장 바르고 가장 좋다고 인정하는 일을 빙자해 암암리에 일을 뒤엎고 서서히 일을 변이시켜 좋은 일을 나쁜 일로 만들고 바른 일을 삿된 것으로 왜곡한다!
이런 표면적인 가상이 줄곧 내 두 눈을 가려, 심층의 변이를 볼 수 없었다. 늘 표면적인 ‘장점’에 가로막히거나, 심지어 스스로 즐겼고, 보다 심층에서 안으로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완벽한’ 작품을 마주한 것처럼, 도저히 손을 댈 수 없었는데, 직접 그것을 파괴하고 다시 만들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 마치 자신을 부정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즉 이면의 변이를 볼 수 없었다. 심층의 변이를 볼 수 없을수록 자신이 더욱 정확하다고 느끼며 앞으로 밀고 나아갈수록 안으로 깊이 찾기란 더욱 불가능했다.
자만이란 사실 과도한 자아(自我)이며 자신이 자만하면 할수록 자만은 더욱 자아가 된다. 그것은 늘 의식하든 하지 않든 자신을 아주 돋보이고 특별하게 만들어 오직 자신만이 정확하다고 느끼게 한다.
나는 평생 도덕을 아주 중시했고, 자신의 도덕이 일반인에 비해 높다고 여겼으며 심지어 수련 중에서도 매사를 다 도덕으로 가늠했다.
나는 속인의 도덕 역시 표면적인 규범과 구속에 불과할 뿐, 생명의 보다 심층의 불순과 변이는 개변할 수 없음을 발견했다. 속인에 대해 말하자면 도덕이란 아주 소중한 것이지만 수련인에 대해 말하자면 오히려 심층의 변이를 덮어 감추고 보호하는 작용을 하는데, 그것이 더욱 은폐되고 더욱 교활하게 만들어 더욱 알아차리기 어렵게 만들며 안으로 생명의 보다 심층의 면을 찾아내 돌파하지 못하게 한다.
이 한 생(生)에 나는 속인의 도덕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속인의 도덕에 집착해서, 늘 속인의 도덕으로 주변사람들을 가늠했다. 심지어 주변의 동수들을 가늠했다. 자신의 도덕표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은 마땅치 않게 여기고 멀리했다. 이런 청고(淸高)속에 자만심을 덮어 감췄는데 그것은 ‘나’를 중심으로 삼았다. 비록 이 ‘나’가 도덕을 표준으로 삼아서 마치 도덕을 대표하는 것 같지만, 사람이 어찌 도덕을 대표할 수 있겠는가? 도리어 도덕의 기치를 빌미로 삼아 안으로 찾는다는 것이 도덕의 표면에 그치게 했고 생명의 보다 심층면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는 마치 품질이 떨어지는 탁자를 반들반들하게 닦고 그 위에 화려한 탁자 보를 깔아놓은 것 같다. 주변에는 오히려 잔이나 그릇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남은 국과 요리가 쌓여 있어 눈에 띄지 않는 탁자가 있다. 사실 그 탁자는 아마 옥이나 황금으로 만들어졌을지 모르는데 단지 표면만 깨끗이 치우지 않았을 뿐이다.
사람의 도덕에 집착했기 때문에 이렇게 오랜 기간 내가 안으로 찾은 것은 종종 도덕이란 층면에 가로막혀 생명의 보다 심층까지 들어가지 못했다. 이는 마치 끊임없이 탁자의 표면을 닦았지만 탁자의 재질은 바꿀 수 없는 것과 같다.
위와 같은 이유 외에도, 나는 동시에 내가 안으로 깊이 찾는 것을 저지하는 또 다른 요인을 발견했다.
내 기억에 한 차례 박해를 당할 때 간수소 안에서 무서운 꿈을 하나 꿨다. 어떤 사람이 날카로운 두 자루 칼을 들고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 피부와 살을 한 겹씩 벗겨낸 후 또 뒤집었다. 칼로 구석구석 다 잘라냈는데 줄곧 뼈에 이르기까지 각 부위를 다 벗겨냈다. 내 신체에서 ‘병인(病因)’을 뒤집어내도록 도와준다고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싸늘하고 날카로운 칼이 핏물을 머금은 장면을 기억하는데 그런 고압적인 환경에서 이런 끔찍한 장면이 줄곧 머릿속에 각인되어 이렇게 많은 해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기억이 새롭다.
지금 나는 이렇게 뼈에 사무치는 방식으로 나더러 뼈를 깎아내는 것처럼 심층으로 안으로 찾아야 한다고 점화하신 것임을 안다. 그러나 당시에는 어떻게 안으로 찾아야 하는 지 전혀 몰랐고, 그저 오만한 격동으로 밖으로 밀어냈으며 움직인 것은 다 사람의 생각이었음에도 그것을 정념이라 여겼다. 이런 상황에서 심지어 사부님께 서원을 발해 자신에게 37일의 기간을 정하고 반드시 밖으로 나가겠다는 광념(狂念)을 내보냈다. 세로로 나가든 가로로 나가든 어쨌든 나가려고만 했다.
최후에 자신이 뚫고 나갈 능력이 전혀 없음을 알고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시도해 자신의 생명과 미래를 경시하며 도박을 걸었다. 사부님께서는 내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감당해 주셨으며, 최후 관건적인 시각에 나를 구해주셨다. 사부님께서 이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감당을 하셨는지 모르면서, 나는 여전히 오만방자하게 자신이 ‘정념’으로 뛰쳐나왔다고 생각했다.
나는 생사를 꿰뚫었고 귀문관(鬼門關 생사의 관)을 몇 차례나 넘겼다고 더욱 자만했다. 죽음이란 단지 칼로 머리를 한번 치는 것으로 머리가 땅에 떨어지면 아주 통쾌하게 여기면서 객기를 부렸다. 하지만 스스로 능지(凌遲)를 마주했을 때 특히 3,600번 한 칼 한 칼 자를 때 스스로에게 물어보니 나는 오히려 두려워서 움츠러들었고 감히 마주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나약하게 변했다. 원래 내가 두려웠던 것은 ‘죽음’이라는 이런 개념이 아니라, 죽음은 오히려 고통에 대한 해탈이라 여겼다.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죽음’ 이전의 이런 극히 고통스럽고 긴 과정이었다. 나는 사실 아예 생사를 똑똑히 보지 못했던 것이다.
스스로 ‘깡그리 버림(舍盡)’의 고심한 법리를 깨달았다고 여기고, 자신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긴 관문을 뛰어넘는 ‘법보(法寶)’이자 비장의 카드라고 여긴 것이 사실은 자신을 사지와 험지에 몰아넣고 퇴로를 남기지 않았거나 또는 동귀어진(同歸於盡)의 방식으로 누가 거침없이 생명과 미래를 걸고 도박할 수 있는가 본 것이다. 만약 한쪽 다리가 나를 붙잡아 벗어날 수 없게 한다면, 나는 단칼에 이 다리를 잘라내, 짧은 고통으로 긴 고통을 다스리고, 자신을 해탈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과감히 버릴 수 있고 크고 작은 관과 난을 모두 한정된 기간 안에 뛰쳐나왔으니 정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자신의 다리에 칼을 대서 한 칼 한 칼 능지(凌遲)식으로 ‘병인(病因 병의 원인)’을 끄집어내어 병인을 전부 들춰내고 벗겨낸 후 다리를 남기는 치유하진 못했다. 왜냐하면 이 과정이 더욱 길고 고통스러우며 자비와 지혜가 더욱 필요해서 나를 두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벗기고 보니 이는 심층에서 안으로 찾는 ‘깡그리 버림’을 포함하지 않은 것으로 사실 생명과 중생을 가볍게 보면서 소중히 여기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최후까지 간다면 또 무엇이 남을지 알 수 있겠는가? 마땅히 닦아야 할 것을 닦지 않고 오히려 ‘버림’으로써 흠결이 있고 불완전하게 했다.
사실은 나약한 것으로 기나긴 고통이 두려워서, 자아의 해탈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일시적인 결심과 후과(後果)를 고려하지 않는 자아 해탈을 정념으로 간주했고, 후과를 고려하지 않고 버리는 것으로 고통스럽게 안으로 찾음을 대신했다. 이는 사실 구우주의 도태와 훼멸의 기전이지 원용(圓容)과 수복(修復)이 아니다.
수련이 거의 최후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이렇게 고통스런 깨달음을 얻었다. 다시 한번 금생을 돌아보니, 나는 뒤틀리고 변이된 추악한 생명을 보았는데 그것의 귀신그림자가 내 평생의 전체 과정에 은연중에 나타나 시시각각 어두운 곳에서 준동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나는 칼로 껍질을 벗기고 그것을 신체 심층(深層)에서 하나씩 꺼내 빛을 보게 했는데, 이 과정은 그야말로 가슴을 파내고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지금에야 비로소 진정한 심층의 안으로 찾음이 얼마나 심각하고 뼈에 사무치는지 알게 되었다. 자신이 스스로 걸어온 길을 부정하고, 자신의 생명 속에서 가장 자부했던 것을 직접 부수고, 밀어내며, 자신의 가장 사적(私的)인 비밀과 치욕 및 남들의 눈에 가장 띄지 않는 일면을, 껍질을 벗기고 여러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가장 아픈 곳과 남들이 가장 건드리지 못하게 했던 상처를 스스로 갈라 피고름을 짜내야 한다. 나는 나약했기 때문에 이렇게 오랫동안 늘 진실하게 건드리지 못했고, 진정으로 심층에서 안으로 찾을 수 없었으며 거듭해서 표면에서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여 왔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러 층의 껍질이 벗겨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비록 상처는 여전히 아팠지만 마음은 마침내 편안함을 얻었다. 물론 아직 남아있는 것도 있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모든 것이 법속에서 바로잡힐 것이다.
시시각각 가호해주고 점오해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린다. 최후 시각에 나를 청성하게 깨워주셨고 나로 하여금 생명의 뿌리에 있는 변이를 볼 수 있게 해주셨다. 내게 회개하고 보완할 시간과 기회를 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천천히 바로잡고 있으니 여러분들이 부디 나를 거울로 삼기 바란다.
(끝)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02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