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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집착심을 제거할 것인가 작은 깨달음

경심농부(耕心農夫 마음을 가는 농부)

【정견망】

일을 하다가 쉬면서 동수가 나와 교류했다.

“집착심을 어떻게 없애죠?”

그렇다, 이것은 모든 수련자들이 늘 직면하는 문제다. 동수는 20년을 수련하면서 수많은 고민을 했지만 아직도 많은 집착심을 제거하지 못했고 때로는 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집착(執著)이란 글자 표면에서 보자면 바로 뭔가를 붙잡고 내려놓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 내려놓지 못하는가? 왜냐하면 당신의 잠재의식 속에서 그것이 좋다고 여기고, 그것을 떠날 수 없다고 여기며, 그것이 있어야만 편안하고 또 즐길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자신이 집착하는 물건을 마치 신체 조직처럼 자신의 내재적인 일부로 여긴다. 일단 집착을 잃을 때면 마치 심장을 도려내고 살을 파내는 것 같다. 그래서 집착심 제거가 아주 어려운 것이다.

우선 집착심을 끊는 과정이 고통스럽다(업력이 전화하는 과정은 당연히 고통스럽다).

다른 한편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종종 자신이 집착하는 것과 집착하는 염두(念頭)를 자신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종종 무엇이 자신의 선천적이고 순진한 본성이고 무엇이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업력 및 외부 교란인지 똑똑히 구별하지 못한다.

내가 이해하기에 자신의 선천적이고 순진한 본성은 그 어떤 잡념도 없기에, 어떤 외부 요소도 그를 교란할 수 없다. 그러나 수련하는 사람은 다른데, 특히 오늘날 대법제자들은 모두 아주 고층차에서 한 걸음씩 인간세상으로 내려왔고, 매 한 층마다 한 층의 신체(身體)를 묻었기 때문에, 우리의 선천적인 본성은 저층 물질에 너무 깊이 묻혀버렸다. 게다가 우주 성주괴멸(成住壞滅) 과정의 변이와 패괴(敗壞)가 더해져 상하내외(上下內外)로 결합해 오늘날 극히 복잡한 국면을 초래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저층 패물(敗物)에서 기어 나와 자신을 씻을 수 있느냐 하는 가장 관건적인 것은 대법으로 진짜와 가짜, 선(善)과 악(惡), 옳고 그름을 가늠하고 똑똑히 구별하는 것이다. 무엇이 수련인가? 극히 높은 층차에서 보자면 바로 선택이다!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은 사부에게 달려 있다. 미혹과 혼란 속에서 누가 정(正)과 사(邪)를 똑똑히 구별하고, 대법을 선택해 대법에 동화하면 사부님께서는 곧 당신을 선택하고 당신을 깨끗이 씻고 성취시켜 주신다!

법리는 여러분이 다 잘 알지만 관건은 구체적인 문제에 직면했을 때 쉽게 헷갈린다는 것이다. 가령 맛있는 음식에 대한 집착이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집착임을 알기에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됨을 알지만, 다년간 여전히 몹시 집착하고 맛있는 것을 보고 먹지 않으면 괴로워한다. 또 어떤 사람은 늘 각종 구실을 찾아 스스로 이런 집착을 직면하지 않으려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렇다면 법리적으로 이 문제는 마땅히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삼계와 인류를 개창한 것은 정법(正法)을 위한 것으로, 고층 생명이 추락한 후 수련을 통해 다시 돌아가고 이를 통해 미래 우주의 원용불멸(圓容不滅)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때문에 근본적으로 말해서 인생의 목적은 반본귀진(返本歸真)이며,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에는 다 벗어나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 세상에서 맛있고 재미있는 것들은 바로 사람이 수련하는 길에 걸림돌(일종의 고험)이 되는 동시에 또 이 한 층 생명의 생존 상태이다.

당신은 조건이 허락하는 상황에서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는데, 이는 사람에 대한 창세주의 자비다. 하지만 당신은 여기에 깊이 빠져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곳에서 훼멸될 것이다. 이는 주원신(主元神)이 반드시 알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속 각종 유혹은 늘 사람을 미망(迷茫)에 빠지게 하고 거부하기 어렵게 한다.

이런 각종 유혹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 자신이 정말로 세간에서 먹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가? 대답은 그렇지 않다. 고층 공간에서 보자면,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더러운 것으로, 도처에 검은 업(業)이 굴러다닌다. 그렇다면 집착을 좋아하는 이 염두는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법 학습을 통해 우리는 사람 사유(思惟)의 내원이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체는 소우주(小宇宙)로 주원신(主元神) 외에도 부원신(副元神), 삼혼칠백, 오장육부 등이 있다. 매 하나의 세포는 다 생명으로 거시적인 것에서 미시적인 매 한 층차마다 모두 무수한 생명이 있다. 그것들이 모두 우리 대뇌에 영향을 끼칠 수 있고 또한 신체 감각에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특히 사람이 후천적으로 형성한 관념・사상업 등은 모두 뇌를 직접적으로 교란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의 희로애락(喜怒哀樂), 사랑과 미움, 슬픔과 공포 등은 아마 이런 관념과 업력 및 소우주의 각기 다른 생명체들이 만들어낸 것일 수 있다. 그것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감수(感受)를 주원신에게 강요하고 주원신을 미혹한다.

그것도 꼭 주원신을 해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바로 그 층차의 생명인바 바로 그런 특성을 지닌 생명이다(가령, 그것이 미움이고 게으름이며 악하고 두려워하는 등등). 매번 한 가지 일이 생길 때마다 많고 많은 생명들이 자신의 염두를 떠올린다. 이런 염두들이 모두 주원신 그곳으로 모이는데 즉 주원신이 어떻게 똑똑히 분별하고 어떻게 선택하는지 본다.

어떤 생명은 아주 강퍅해서 내보내는 염두가 아주 강한데 주원신이 여기에 교란 받고 좌우되지 않을 수 있는가? 주원신이 일단 혼미해지면 마치 어리석은 황제가 조정 일을 주관하지 않고 대신이나 측근에게 일을 맡기는 것과 같아서 공정성을 잃고 법도(法度)에서 이탈해 조정의 기강이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이 삶이 불편해진다. 수련인으로서 말하자면 주의식이 강하지 못하면 비이성적이 되고 욕망과 집착심이 강하며 정신이 오락가락하며 작은 좌절에도 어찌할 줄 모르는 것으로 표현된다.

사람은 불성(佛性)과 마성(魔性)이 함께 존재하며 수련(修煉)이란 불성을 충실히 하고 마성을 닦아 없애는 것이다. 이 과정을 주원신이 주도하기 때문에 수련 성취되면 주원신의 공덕(功德)이 된다. 주원신은 마땅히 정과 사,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가늠하는 표준을 명확히 알고 어느 것을 제거하고 어느 것을 따라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하나의 염두, 하나의 욕망, 하나의 집착이 나올 때 곧바로 옳고 그름을 분별해 정확한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경우 좋고 나쁨을 모르는 것이 아니고 뻔히 알면서도 잘못을 저지르는데, 늘 미련을 남기고 아쉬워하면서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쟁투심, 원한심, 과시심, 색욕심, 질투심 등이다. 이것이 바로 정사대전(正邪大戰)에서 대치하는 과정이자 또한 업력이 전화하는 과정인데 수련이란 단번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밝은 지혜로 미혹되지 않고 꾸준히 견지해 나가야만 비로소 원만(圓滿)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각자(覺者)가 세간에 존재하기란 아주 어렵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업력이고, 도처에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미식(美食)이 맛있다고 생각하지만 각자의 눈에는 대변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신(神)이 세상에 올 때 육신이란 한 장의 가죽 주머니를 써야 하는데, 자신을 가두는 동시에 표면을 사람과 혼동하게 하고, 사람의 사상을 가져야지만 이곳에서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또 번거로움이 생기는데 바로 쉽게 현혹되어 정말 사람으로 타락하는 것이다.

인간 세상은 이렇게 상생과 상극의 환경이라, 공능(功能)이 전부 열려서 너무 똑똑해도 안 되며 봉폐(封閉)가 너무 심해서 미혹이 너무 깊어도 안 된다. 바로 이렇게 흐릿하고 분명하지 않은 것 같은 속에서 사람의 오성과 선택을 보는데 이렇게 해야만 생명의 심성 표준이 진실하게 드러난다. 똑같은 환경에서 다른 사람은 걸어 나올 수 있는데, 당신은 왜 안 되는가?

미혹의 홍진(紅塵 속세)은 바로 한 바탕 연극이자 꿈이자 여행이자 연옥(煉獄)으로, 시비선악(是非善惡), 사랑과 미움, 영욕(榮辱 영광과 치욕)과 득실(得失)은 모두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연기처럼 사라진다. 마치 생생세세 윤회 속에서 겪은 것처럼 큰 꿈에서 처음 깨어났을 때 원래 한바탕 몽환(夢幻)이었구나 하며 맹렬히 각성하는 것과 같다! 꿈속의 생사이별, 비장하고 호탕함, 처량한 슬픔을 떠올리면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원래 다 치정(癡情)과 망념(妄念)이로구나! 이로부터 단번에 깨닫게 되는데 천천히, 너무 고집부리지 말고, 기(機)에 따라 행동하고, 장계취계해서 “텅빈 듯 비지 않은 듯 움직임과 고요함이 뜻대로(似空非空,動靜如意)”(《대원만법》)되게 해야 한다. 정말로 “몸은 속세에 있어도 마음은 방외(方外)에” 있는 그런 출세(出世)의 느낌이 있을 것이다.

음식에 대한 집착을 예로 들자면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목적은 당신에게서 이런 집착심을 없애려는 것이다.”(《전법륜》)

그렇다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집착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누구인가?

“여우부체가 붙은 그 기공사가 닭고기를 먹는 그 모습을 당신이 보라. 그야말로 게걸스럽게 먹는데 뼈마저도 뱉기 싫어한다.”(《전법륜》)

닭고기를 먹길 좋아하는 이런 욕망은 원래 여우부체가 내보낸 것으로 그것이 그 기공사를 통제한 것이다.

“술을 마시면 틀림없이 인(癮)이 박이는데, 그것은 욕망으로서 사람의 은호신경(癮好神經)을 자극하기에 마실수록 인은 더욱 커진다.”(《전법륜》)

내가 이해하기에 인이 박이는 것 역시 일종의 생명이다.

“어떤 사람은 담배를 피우면 정신이 날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은 자신을 속이고 남도 속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근무하다 힘들거나 또는 글 한 편을 쓰다 힘들어 조금 쉬려고 생각하면 곧 담배를 피우는데, 그는 담배를 피우고 나면 정신이 난다고 느낀다. 사실 그렇지 않으며, 그것은 그가 그렇게 잠시 휴식한 까닭이다. 사람의 사상은 일종의 착각을 조성할 수 있으며 또 그러한 일종의 환각을 일으킬 수 있다. 그렇다면 나중에 정말로 일종의 관념이 형성되고 일종의 착각이 형성되어, 당신은 담배를 피우는 것이 마치 당신에게 정신이 나게 한 것처럼 느끼는데, 전혀 그렇지 않으며 그것은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전법륜》)

내가 이해하기에 착각과 환각 및 관념은 모두 생명이며 모두 사람의 심지(心智)를 교란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한다. 사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데, 그는 정확한 사상을 지도로 삼지 못해서 그렇게 끊어버리려 해도 그리 쉽지 않다.”(《전법륜》)

내가 이해하기에 법을 공부하고 밝은 지혜로 미혹이 없는 것[明慧不惑]이 수심단욕(修心斷欲)의 전제이자 기초가 된다.

결국 주의식이 강한가 강하지 못한가, 마음이 바른가 바르지 못한가의 문제이다. 모든 집착심은 다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업력 및 외래 교란에서 온다. 만약 한 사람이 스스로 어리둥절하여 자아와 외래의 교란을 구별하지 못하고 그저 흐름에 따라 살아가면서 각종 욕망, 중독, 사념(邪念), 집착에 이끌린다면 그럼 어찌 가능할 수 있겠는가? 수련이란 엄숙한 것이자 또 신성(神聖)한 것으로 오직 청성(淸醒)하고 이지적이며 명백하게 닦아야지만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사부님 설법을 복습해보자.

“우리 이 우주 중에는 또 이런 이치가 있다. ‘당신 자신이 구하는 것, 당신이 가지려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간섭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 여기에서는 여러분이 바른 길을 가게끔 가르치는 동시에 법을 당신에게 투철히 말해 주어 당신 스스로 깨닫게 하는데, 배우고 안 배우고는 여전히 당신 자신의 문제다. 사부가 문으로 이끌어 들이나 수행은 자신에게 달렸다. 당신을 강박하고 핍박하여 수련하게 할 사람이 없으며, 수련하고 안 하고는 당신 자신의 문제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어느 길로 가려하고, 당신이 무엇을 가지려 하며, 당신이 무엇을 얻으려 하든지 누구도 당신을 간섭하지 않을 것이며, 단지 선(善)을 권할 뿐이다.”(《전법륜》)

부당한 곳이 있다면 시정해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4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