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죽(靑竹)
【정견망】
단체 연공, 이 문제는 대법 사이트에서 여러 차례 교류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 왜 또 이 화제를 이야기하는가? 우리 태국 방콕에는 100명 안팎의 대륙에서 온 대법제자들이 살고 있지만 날마다 인근 공원에 나가 단체 연공에 참여하는 이들은 겨우 10명에 불과하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아래에서 나는 두 가지 방면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여러분에게 참고가 되길 바란다. 만약 법(法)에 없는 부분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1. 고생을 겪음
주지하다시피 우리 수련의 최종목적은 바로 반본귀진(返本歸真)으로 우리의 아름다운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되돌아갈 수 있는가?
사부님께서는 《시드니법회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만약 당신이 되돌아가려면 이 두 가지 요소를 반드시 갖춰야 한다. 즉, 하나는 고생을 겪는 것이고 하나는 깨달음이다.”
그러니 수련이란 고생을 겪어야 한다. 물론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고생을 겪음에 담긴 함의는 대단히 크다. 나는 단지 내 층차와 경계에서 단체 연공을 할 때 고생을 겪는 것에 대한 일부 경험과 인식을 말해보고자 한다.
나는 방콕에 온지 5년이 되어 가는데 이 기간에 내가 겪은 가장 큰 고생은 단체 연공할 때 모기에 물리는 것이다.
내가 한 이 말을 아마 많은 동수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믿지 못할 수 있는데 이는 당연하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아예 단체 연공에 참여하지 않거나 일부 사람들은 참여하지만 각종 방법으로 모기에 물리는 것을 방어하기 때문에 이런 것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첫날 공원 단체 연공에 참가했을 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보았다. 나는 많은 동수들이 연공하기 전에 모두 몸에 물약(모기 기피제)을 바르고 두 팔에 토시를 한 것을 보았다. 그때 나는 좀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들이 대체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것이 모기에 물리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임을 알았다.(공원에 모기가 아주 많음) 당시 내가 받은 느낌은 그들의 이런 행동이 사부님의 법과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인식을 확인하기 위해 돌아가서 전문적으로 사부님의 이 방면에 관한 설법을 찾아보았다.
“제자: 수련인의 피는 그처럼 소중한데 어찌 모기가 빨아가게 할 수 있습니까?
사부: 당신이 수련하면서 당신 자신의 업력이 밖으로 발산될 때 당신은 당신의 그 피가 얼마나 더러운지 아는가? 당신은 그 모기가 당신에게서 빨아간 것이 모두 더러운 것임을 아는가? 물론 우리가 수련할 적에 신체가 갈수록 건강해지며 갈수록 속인보다 좋아질 때 아마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 모기가, 당신이 전생에서 죽인 한 생명이라면 당신이 그것에게 갚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지만 빨아간 것 역시 결코 소중한 것이 아니다. 늘 자신이 어떻게 해를 입었다고만 보지 말라. 왜 자신이 빚진 업력을 어떻게 갚을 것인지 하는 것은 생각해 보지 않는가? 어떤 사람은 전생에 죽인 사람이 너무나 많으며 나쁜 짓을 한 것이 너무나도 많은데, 당신이 오늘 수련한다 하여 모기마저도 당신을 물지 않고, 엉덩이를 툭툭 털고는 당신이 가려고 한다면 어찌 될 일인가?!”(《미국동부법회설법》)
사부님의 이 단락 설법을 보고 나는 더욱 자신의 인식을 견지했고, 사부님께 이렇게 소원을 빌었다.
“모기가 무는 것이 아무리 견디기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제자는 절대 약을 바르거나 토시를 하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정정당당하게 이 한 관(關)을 넘기겠습니다.”
하지만 말하긴 쉽고 발원하는 것도 좋은데 해내기란 정말 너무 어려웠다. 매일 아침 연공에서 모기에게 20~30곳 물리는 게 다반사였다. 하지만 이 고통을 감당하는 것이 하루 이틀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 장기간 오랜 세월 견지해야 했다. 그때 나는 연공하러 가거나 또는 연공하면서 늘 사부님의 법을 외우며 자신을 확고히 했다. 가령 《홍음》에서 〈마음고생〉, 〈인과〉, 〈정념정행〉 등을 날마다 외웠는데 사부님의 법이 나와 함께 하며 나를 격려해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수련의 길을 확고히 걸어갈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렇게 힘든 때 내 앞에는 또 보다 큰 고험(考驗)이 닥쳐와 나로 하여금 이 한 관 속에서 지금까지 해왔던 노력이 하마터면 수포로 될 뻔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나 흔히 모순이 생길 때, 사람의 심령(心靈)을 자극하지 않으면 소용없고 쓸모없으며 제고하지 못한다.”(《전법륜》)
한 번은 내 몸이 소업을 했는데 소업이 상당히 심했다. 침상에서 10여 일을 누워 있었는데 이 기간에 단체 법 공부와과 단체 연공에 참가할 수 없었다. 보름이 지난 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느낌이 들어 걸을 수 있었다. 이에 나는 단체 법 공부와 단체 연공에 참가하고 싶었다.
아마 어떤 동수는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당신은 왜 단체 법 공부와 연공을 이렇게 중시하는가? 집에서 배우고, 연공해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당연히 같지 않는데 내가 보기에는 천양지차다. 우리는 모두 단체 법 공부와 연공 및 법회 이 두 가지 형식은 사부님께서 친히 대법제자들에게 남기신 것임을 알고 있다. 내가 이해하기에, 이는 사실 단지 대법제자들에게만 남기신 게 아니며 장래 신우주(新宇宙)에 참조로 남기신 것으로 영세(永世)토록 불변하다. 우주 시일의 장단(長短)과 상관없이 장차 아무리 많은 신불(神佛)이 세상에 내려와 사람을 제도하더라도 반드시 모두 이 길을 걸어야 한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이 길이 얼마나 신성(神聖)하고 얼마나 중요한가! 그러나 사부님께서 남기신 이 길은 반드시 인간 세간(世間)에서 실천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며,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럼 누가 실천하는가? 누가 이 길을 걸어가겠는가? 그것은 바로 창세주(創世主)께서 직접 선정하신 대법제자들이다.
창세주께 이토록 신임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대법제자들이 막대한 영광이다. 창세주의 제자로서 우리는 또 이 길을 걸어가지 않거나 잘 걷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내가 아직 병업이 끝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연공장에 가서 연공할 때 더 큰 마난과 고험이 닥쳤다. 내 몸에 지닌 음기(陰氣)가 너무 심해서 그곳에 서자마자 모기떼들이 마치 지령을 받은 것처럼 윙윙거리며 나를 포위했다. 그때 내 몸은 온통 모기로 가득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동공을 마쳤는데 왼쪽 팔을 들어 물린 곳을 살펴보니 최소한 20여 곳이 물렸다. 이때 나의 감당 능력이 극한에 도달했다.
이에 나는 생각했다.
‘만약 내일도 이렇다면 내가 여전히 견지할 수 있을까? 만약 견지하지 못하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약을 발라볼까?’
막 이런 염두가 나타났을 때 저녁에 잠을 자는데 사부님께서 꿈속에서 내게 계속 견지하라고 점화(點化)해주셨다. 사부님의 점화에 나는 신심(信心)이 아주 증가되었고 곧바로 머릿속에서 부면(負面) 사유를 제거했다. 다음날 다시 연공할 때는 그렇게 많은 모기가 없어서, 그래도 좀 견딜 만했다.
오늘에 이르러 이 관은 기본적으로 다 돌파한 것 같은데 이 방면의 빚도 거의 갚은 것 같다. 나는 만약 사부님의 가호・격려・가지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예 이 관을 돌파하지 못했을 것임을 안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어떤 동수는 물을 것이다.
“당신 말에 따른다면 모기에 물리지 않으면 이런 고생을 겪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 방면의 업채(業債)를 갚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렇지 않다. 불법(佛法)은 무변(無邊)하기에 사부님께서는 방법이 있으시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우리를 도와 일부 업력을 없애주신 후 남은 업채는 우리가 반드시 상환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단체로 연공할 때, 얼마나 되는 업채를 갚기로 정해져 있는데, 당신이 각종 방식으로 회피하고 갚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럼 이 부분의 업채는 아마 다른 형식으로 전화(轉化)되어 갚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병업을 없애는데 원래 2·3일이면 지나갈 수 있다고 하자. 만약 우리가 갚으려 하지 않은 모기의 업력이 더해진다면 그럼 이 난이 더욱 가중될 수 있고 어쩌면 관을 넘기지 못해 병원에 가야 하거나 심지어 육신(肉身)의 사망을 조성할 수도 있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이것이 작은 일인가? 중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 어느 길을 걸을 것인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우리가 수련에 입문할 때 사부님께서는 이미 우리 인생의 길을 개변(改變)해 우리에게 수련의 길을 다시 배치하셨다. 그러나 사부님의 설법에서 우리가 또 알다시피 대법제자는 단지 사부님뿐 아니라 구세력 역시 우리 매 대법제자에게 한 갈래 수련의 길을 배치해놓았다.
우리는 모두 구세력의 배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미혹 속에 있기에 어느 것이 사부님 배치이고 어느 것이 구세력의 배치인지 어떻게 똑똑히 구별할 수 있는가? 유일한 방법은 바로 대법을 이용해 구별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를 들어서, 공원에서 단체 연공하는 것은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단체 법 공부는 내가 여러분들에게 남겨준 것이고, 단체 연공은 내가 여러분에게 남겨준 것이다. 박해가 극히 엄중한 상황을 제외하고 중국대륙 이외의 기타 지역은 모두 이렇게 해야 한다.”(《2016년 뉴욕법회설법》)
의심할 바 없이 공원 단체 연공은 분명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배치해주신 길이다. 우리가 만약 이 길을 따라 걸어갈 수 없다면 그럼 반드시 구세력이 배치한 길을 걸을 것이다. 우리 앞에 높인 것은 이 두 갈래 길이며 제3의 길이란 없다.
우리가 일단 구세력이 배치한 길을 걸을 경우, 돌아가려고 해도 수많은 곤란과 교란을 겪을 것이다. 가장 주요한 것은 구세력의 교란인데 왜냐하면 당신 자신이 추구하고 원한 것이라, 그것이 당신을 단속할 이유와 구실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방콕에서 코로나가 심했던 기간에 공원이 잠시 폐쇄되었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연공해야 했다. 그런데 집에서 연공한 시간이 길어지자 사람 마음을 조장했다. 불학회(佛學會)에서 공원이 이미 개방되었다고 통지한 후에도 연공하러 갈 때면 가기 싫다는 염두가 생겨났다. 왜 가고 싶지 않은가? 집에서 연마하면 얼마나 자유로운가? 언제든 하고 싶을 때 연마할 수 있고 또 더우면 에어컨이 있고 모기에 물리지도 않으며 밖에서 시끄러운 차량 소음도 없으니 이렇게 연공하면 얼마나 편한가! 바로 이런 사람 마음이 자신이 고생을 겪고 싶지 않다고 이끌고 공원에 가서 단체 연공을 하고 싶지 않게 이끈 것으로 또한 무의식중에 구세력이 배치한 길을 걷고도 미혹에 빠져 깨닫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줄곧 이렇게 걸어간다면 위험하지 않겠는가? 당신 자신이 아무리 수련을 잘했다고 여겨도 그것은 단지 구우주의 표준에 도달한 것에 불과할 뿐이며 사부님께서 요구하시는 표준에는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이 걸어간 것은 구세력이 배치한 길이기 때문이다!
동수들이여, 고생을 겪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이 옳다는 것과 체면을 중시하는 마음을 내려놓기 바란다! 빨리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단체 법 공부, 단체 연공이란 이 길로 되돌아와야 한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6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