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휘 대법제자
【정견망】
최근에 자신의 상태가 또 좋지 않음을 느꼈다. 모순이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또 잘 처리하지 못해 관(關)을 잘 넘기지 못했다.
하나는 아들과 사소한 일로 사이가 틀어져서 기분이 나빴다. 아들은 줄곧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내가 동쪽을 말하면, 그는 늘 서쪽을 말했고,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반대하곤 했다. 엄마인 나를 전혀 존중하지 않았고, 늘 소란을 피웠는데 나는 아들을 불효자라 생각했다. 예전에는 늘 전세(前世)에 무슨 빚을 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따지지 말고 화를 내지 말자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아들과 주택 위생 문제를 놓고 전화하던 중에 또 언쟁이 벌어졌다. 내가 엄격하고 강경하면서 모욕적인 말을 한 마디 했다. 나중에 스스로도 자신이 틀렸음을 알고 매우 괴로웠다. 하지만 남편에게 아들이 불효해서 사소한 일에도 나와 맞선다고 했다.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당신이 하는 말은 나도 들어줄 수 없어. 당신은 마땅히 안으로 자신의 원인을 찾아봐야 해.”
남편은 평소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는 속인이니 이는 사부님께서 그의 입을 빌려 나를 점화하신 것이다. 나는 아들의 무리한 태도에 이끌려 조급한 마음, 화를 내는 마음, 쟁투심이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지 표면적인 사람 마음의 표현일 뿐이며 나는 마땅히 심층의 원인을 한번 찾아보아야 한다. 왜 자꾸만 이런 광경이 반복되는가?
다음날 나는 전병차(電瓶車 배터리로 가는 차를 말함)를 타고 동수 집을 가는데 헬멧을 쓰지 않았다. 결국 근처 교차로에서 교통경찰에게 붙잡혔다. 교통경찰은 벌금 10위안을 부과했는데, 내가 10위안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기어코 신분증이나 주민등록번호를 내라고 고집했다. 나는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잠시 경찰과 대치했다. 그러자 교통경찰이 집법의(執法儀 역주: 경찰이 공무 집행을 녹화하기 위해 휴대하는 카메라 장비)를 켜고 내 자전거를 압류하려 했다. 결국 나는 신분증 번호를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온 후, 나는 매우 낙담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했을까? 당시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했을까? 나는 반드시 똑똑히 생각해봐야 한다.
하루가 지난 오전 하교 시간이 가까워졌다. 나는 집 창문 아래 앉아 컴퓨터를 하거나 책을 읽으려고 준비했는데 창밖에서 격렬한 록 음악 소리가 들렸다. 급히 문을 열고 나가보니 건너편 건물에 세들어 사는 여자가 우리 집 창문 앞 베란다 위에서 큰 스피커를 켜고 춤을 추며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내가 너무 시끄럽다고 했더니 그녀는 지금 시간에는 괜찮다고 했다.
이때 그 건물 남자 사장님이 보고는 뜻밖에 소란피우지 말라면서 뭐가 시끄럽냐고 했다.
그는 나와 매우 잘 아는 사이로 내가 진상을 알려, 삼퇴한 적이 있다.
내가 곧 한마디 했다.
“당신 집 창문 아래에서 틀어 봐요, 시끄러운지 안 시끄러운지?”
“시끄럽지 않아요.” 그리고는 곧 떠났다.
나는 좀 겸언쩍어 그녀에게 말했다.
“음악 소리를 좀 줄여줘, 내가 창가에서 책을 읽는데 너무 시끄러워.”
그러자 그녀는 곧 볼륨을 좀 줄이고 빨리 촬영을 끝내겠다고 했다. 나는 집에 돌아와 또 관을 넘기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나는 자신이 최근 며칠 동안 마주친 모순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처음에 말한 아들과의 모순은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여기에는 반드시 역사적인 인연이 있을 것이다. 금세(今世)에 마땅히 대법 속에서 풀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풀지 못한 것은 분명히 수련인인 내게 원인이 있을 것이다.
나는 아들에 대해 조급하고, 원망하며, 쟁투하는 마음이 있다. 이런 사람 마음이 어떻게 생겼을까? 나는 깊이 분석해보았다. 사람의 이치에 따르자면 자녀는 마땅히 부모를 존중하고 효도해야 하는데 이는 사람이 되는 도덕이자 사람의 바른 이치다.
그러나 현재 많은 젊은이들은 어릴 때부터 사당(邪黨)의 독문화(毒文化)에 세뇌되고 현대 변이관념의 피해를 입어 전통 도덕을 위배했다. 자기중심적이고 자사자리(自私自利)하며 먹는 것만 좋아하고 게으르며 자유롭고 산만하다. 자신에 대해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 무책임하니 자연히 부모나 가족에 대한 책임감은 말할 것도 없고 감사는 더욱 말할 수 없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이 그런 젊은이들과 말하면서 德(더)가 없고 德(더)가 적음을 말하면 그는 전혀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전법륜》)
내가 보기에 아들은 전통 도덕에서 어긋난 젊은이로 컴퓨터 게임 및 휴대전화에 매료돼 정상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고 즐기려고만 하며, 고생을 겪으려 하지 않는다. 남의 단속을 받고 싶어 하지 않으며, 직장도 불안정하지만, 하루하루를 적당히 살아갈 뿐이다. 아들은 1992년에 태어났고, 나는 그가 법을 얻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안다. 그가 악세(惡世)의 혼탁한 파도에 휩쓸려 떠도는 것을 보고,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가 대법 수련에 들어오게 할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거에 나는 늘 역사적으로 진 빚을 내가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우리는 또 사부님의 정법시기에 처해 있어 조사정법(助師正法)해야 하며, 정(正)의 요소에 대해 책임지고 일체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사부님께서 “세상 쇠락을 끊어 막노라”(《홍음 2》〈널리 비추다〉)라고 하셨으니 아들의 바르지 못한 언행(言行)은 마땅히 바로잡아야 하며, 방임하거나 끌려 다녀서는 안 되는데 이는 또 그의 생명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늘 사람의 정(情) 때문에 잘 파악하지 못했고, 시종일관 이성적이고 평화롭게 이치를 설명할 수 없었다. 늘 아들의 무례한 태도에 이끌려 말다툼을 했고 결국에는 기분 나쁘게 헤어지곤 했다. 선(善)은 인류의 보편적인 법칙이다.
전통문화에서는 ”백가지 선(善) 중에서 효(孝)가 으뜸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사람 이 한 층의 법을 지키는 것은 틀리지 않는다고 본다. 하지만 사람의 이 이치에 매몰되어 일률적으로 이 이치로만 그를 가늠하고 요구하면서 자신을 가늠하는 것은 망각했다. 나는 대법제자이니 마땅히 대법의 표준으로 가늠하고 자신을 요구해야 한다. 그것은 속인의 표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이 평소 늘 慈悲(츠뻬이)한 마음과 상화(祥和)한 심태를 유지한다면, 문제와 마주쳐도 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충적인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전법륜》)
내가 법의 요구에 따라 하지 못한 이유는 아직 정(情)의 물질이 많이 남아 있어서 나의 자비심이 충실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들에 대한 친정(親情) 때문에 나는 그가 도덕적으로 우수한 인재가 되기를 기대했는데 그가 해내지 못하자 나는 또 아들을 “몹시 미워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아들에 대한 나의 미움과 쟁투심의 유래이다. 이런 기대를 내려놓자 이성적으로 선을 권하고 타일러 아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그를 중생으로 여기며 자비롭게 대할 수 있었다.
나는 또 교통경찰을 만난 사건을 생각해보았는데 마찬가지로 화를 내는 마음과 쟁투심의 표현이었다. 이렇게 화를 내며 원망하는 마음은 악당에 대한 나의 한(恨)에서 비롯된다. 이것 때문에 나는 악당의 명령을 집행하며 인민을 해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저항하게 되었고 만나기만 하면 쟁투심이 생겼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마음속으로 늘 다른 사람과 다투고 싸우려고 생각한다면, 내가 말하건대 문제와 마주치기만 하면 당신은 남과 맞서 싸울 것인데, 틀림없이 이러하다.”(《전법륜》)
나는 전에 이 한(恨)을 닦아 없앤 적이 있는데 왜 또 있는가? 생각해보니 나는 또 사당(邪黨)의 멸망 시간에 대한 집착이 가끔 나타나는데, 원인은 내가 사당을 중시하고 그것을 크게 보았기 때문이다. 사당이 만든 온갖 사악한 사건들을 너무 실제적으로 보았는데, 다시 말해 나는 현실에 미혹되었기 때문에 사람의 정서에 좌우지된 것이다.
이 사건에서 나는 여전히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고 걱정했는데 이 역시 장기간의 박해와 반박해(反迫害) 속에서 형성된 일종 수시로 경계하고 안전에 주의하는 것에 대한 습관적인 반응이지만 지나쳐서 오히려 집착이 되었다.
세 번째 일에서 나는 또 다시 조급함, 분노, 쟁투를 드러냈는데 이번 일의 근원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지키려는 사심(私心)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늘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안정적인 환경을 좋아했다. 속인의 관념에서 함부로 떠드는 것은 나쁜 일이고, 자신의 사욕(私慾)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생활을 고려하지 않고 큰소리로 떠드는 것은 부도덕하고 법을 어긴 것이다. 이 이치는 속인에 대해 말하자면 맞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또 이 이치를 붙잡고 내려놓지 않았다. 때문에 누가 시끄럽게 굴어 나를 편안하지 않게 한 것은 나의 이익을 침해한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는 사념(私念)이 나를 지배해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논쟁을 벌이게 했다.
사부님께서는 수련인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셨다.
“수련 중에서 당신들이 부딪힌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모두 좋은 일이다.”(《정진요지 3》〈시카고 법회〉)
“고생을 낙으로 삼는다.”(《정진요지》〈경지〉)
“고통을 겪으면 소업(消業)할 수 있으며”(《전법륜》)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고”(《미국서부법회설법》)
“慈悲(츠베이)로 중생을 구도하라”(《워싱턴DC국제법회설법》) 등등
하지만 막상 일에 봉착하면 나는 법을 떠올리지 못했고 때문에 “참지” 못한 것이다.
나는 정말 자신에게 한숨이 나왔다. 어떻게 수련했기에 이 모양인가? 나는 전에 자신을 그래도 양호하게 여겼고, 또 동수의 사람 마음이 많다고 못마땅하게 여기곤 했다. 하지만, 뒤로 가면 갈수록 자신이 원만의 표준과 여전히 거리가 멀다고 느껴진다. 나는 사부님께 너무나 죄송함을 느꼈다! 사부님께 너무 많은 빚을 졌다! 왜냐하면 자비하신 사존께서 우리를 위해 시간을 연장하셨는데 이 연장으로 인해 무량한 거대한 난을 짊어지셨기 때문이다.
나는 반드시 엄격하게 자신을 요구하며 정진 수련해서 사부님께서 내게 배치해 주신 매 한 차례의 제고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모순 속에서 착실하고 착실하게 한 걸음 제고하고, 한 걸음 제고하며 또 한걸음 제고해야 한다. 법을 잘 배우고, 사람에서 걸어 나와야만 비로소 사부님을 도와 중생을 구도하는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6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