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성 대법제자
【정견망】
20년 넘게 수련해왔지만 나는 줄곧 자신의 근본 집착이 무엇인지 몰랐다. 또 내게는 무슨 근본 집착이 없다고도 생각했다. 동수들과 함께 원한심(怨恨心)에 대해 교류하면서 나는 또 희희낙락하며 내게는 무슨 원한심이 없다며 “내가 누구를 원망하고 미워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곤 했다.
2018년 10월, 옷을 갈아입을 때 갑자기 왼쪽 유방에 동전 크기의 딱딱한 혹이 만져졌다. 아프거나 가렵지 않아서 세 가지 일을 하는 데 지장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는 “좋은 것은 남기고 나쁜 것은 제거”(《전법륜》)한다는 것만 기억하고 모든 것을 다 사부님께 맡겼다. 당시 나는 자신에게 사람 마음의 집착, 관념, 욕망 등이 있는지 진지하게 조사해보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큰 누락이 발생했다. 왼쪽 유방의 병업 가상이 표면에 나타났는데 표현되는 형식은 궤양, 농혈(膿血 농과 피)이 흐르고 체중이 감소해 세 가지 일을 하는데 심각한 교란이 되었다. 나는 그제야 문제의 엄숙성을 깨달았다. 나는 자신에게 나타난 병업 가상을 현지 협조인 동수에게 말했다.
동수는 법에서 나와 교류하며 말했다.
“당신은 마땅히 드러난 것을 폭로하고 그것을 움켜잡아야 합니다. 어떤 마음이 초래했는지 그것을 제거하세요. 이렇게 큰 법이 우리를 수용하기란 아주 쉽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부님이 계시고 대법이 있으니 두려울 게 뭐 있습니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니 사람 마음을 찾아 사람 마음을 닦아 버리면 곧 해체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함께 법을 배우고 교류하면서 어디에 누락이 있고 어떤 마음이 사악한 마(魔)가 틈을 타게 했는지 안으로 찾았다. 원래 다년간 형성되었던 원한심을 제거하지 않아 병업 가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동시에 또 원한심, 사상업이 만들어낸 색욕심, 불평하는 마음, 질투심, 우월감, 쟁투심, 허영심, 체면을 중시하는 마음 및 특히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폭로되었다. 이런 마음들을 제거하지 않아 원망심이 생겨났는데, 그럼 원망심이 어떻게 생겼을까?
나는 남편과 딸과 함께 1996년에 대법수련에 들어왔다. 남편은 일반인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근무하는데 체면을 아주 중시하는 사람이다. 나는 친정 식구들이나 친척들이 보기에 아주 효성스런 사람인데, 친정이나 시댁에서 원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해주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서 돈에 이르기까지 작은 돈은 물론이고 1만 위안에서 몇 만 위안에 이르는 큰돈까지 빌려가서는 흐지부지 갚지 않았는데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점점 더 심해졌다. 나와 남편 동수는 줄곧 참아낼 수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진정하게 내려놓지 못했고 수련이 아주 힘들다고 느꼈다.
1994년 소위 큰 개인 사업을 하면서 어떤 사람이 남편 앞에서 우리 지역 운수업이 아주 좋고 돈을 빨리 벌 수 있으니 차를 사라고 했다. 이에 남편은 외지에서 중고 동풍(東風 역주: 중국 자동차 회사)차를 하나 샀는데 4만 5천 위안을 썼다. 차를 구매한 후 남동생이 차를 몰았는데 차가 좋다면서 차량 가격의 절반을 대기로 했다. 다음날 동생이 도로에서 운전하다 전화가 왔는데 차가 망가졌다고 했다.(즉, 차량 전체를 폐기했다는 말) 나중에 남편이 1만 위안 가량을 들여 새 기계로 교체했다. 동생은 이렇게 1년 넘게 차를 몰았지만 우리는 아예 돈을 보지 못했다. 남편과 나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고 남편은 나더러 내일 동생에게 차를 파는 것에 대해 논의해보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다음날 동생이 오자 남편이 말했다.
“나는 출근해야 하니 차를 관리할 시간이 없으니 처남이 차를 사게.”
동생이 “얼마에 파실래요?”라고 물었다.
남편은 가족이니까 2만 위안에 팔겠다고 했고 동생은 기뻐하며 좋다고 했다. 남편은 차용증을 남겨야 하며 차량으로 돈을 벌면 먼저 빚부터 갚아야한다고 했다. 동생은 한 가족이지만 그래도 차용증을 쓰기로 했고 돈을 벌면 반드시 우선 변제하기로 했다.
하지만 동생은 1년 넘게 일을 했지만 우리에게 돈을 갚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안부 인사조차 없었다. 또 차를 친정 엄마집 마당에 주차해 놓고 엄마에게도 말도 없이 부부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내가 남편과 함께 친정집에 가서 차량을 보니 손상이 이미 아주 심했다. 내가 어머니에게 동생이 왜 차를 몰지 않는 지 물었지만 엄마도 모르겠다고 했다.
한 달 후에야 동생 부부가 식당을 열기 위해 모(某) 도시로 간 것임을 알았다. 나는 당시 너무 화가 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엄마가 동생에게 화를 내며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했고 남편은 나더러 화를 내지 말라고 했다. 신체는 자본인데 화를 내서 아프면 돈이 들고 고생스럽다는 것이다.(당시 내 신체가 좋지 않았다)
엄마가 말했다.
“내가 정말 좋은 사위를 얻었어.”
엄마와 남편의 말을 듣고 마음이 좀 편해지긴 했지만 속으로는 동생 부부의 행동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남편은 차를 큰 카센터에 가져가 수리를 받았다. 시동생이 소식을 듣고는 전화를 걸어 차를 자신에게 팔라고 했다. 남편이 2만 위안에 준다고 했고 방금 정비를 마쳤다고 했다. 그러자 시동생은 좋다면서, 내일 가져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다음날 시동생이 와서는 지금은 돈이 없다면서 차로 돈을 벌면 돈을 갚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돈은 갚지 않았고, 또 차를 몰고 돌아와 큰 돌을 싣다 차를 망쳐버렸다. 결국 차는 고철 상태로 8천 위안에 팔렸고 시동생은 장사를 하기 위해 남방으로 떠났다. 시동생의 이런 행동은 나를 더욱 화나게 했고 나는 속으로 아예 관계를 끊고 앞으로 다시는 왕래하지 않으려 했다.
1996년 연말 우리 가족은 친구로부터 대법 수련을 소개받았다. 당시 우리 온 가족이 대법의 은혜를 입었고 우리의 세계관마저 개변되어 아주 즐거웠고 날마다 단체 법 공부, 연공 및 대법을 널리 전했다. 우리는 동생 가족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동생과 시동생에 대해 생긴 원한심을 찾지 않았다. 단지 감성적으로만 법을 인식했을 뿐 이성적으로 진정하게 법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때 남동생은 외지에서 차를 몰았고 아내와 아이는 모(某) 시에 살았다. 갑자기 어느 날 동생이 전화가 와서는 아이 학교에서 사고가 나서 몇 만 위안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 연말이라 해를 넘길 수 없다고 했다. 남편이 대체 무슨 일이 그렇게 심각한지 물었지만 동생은 묻지 말라면서 아이 엄마가 강에 뛰어들지 않도록 좀 도와달라고만 했다. 남편이 이에 올케에게 전화를 걸어 이유를 물었지만, 그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울기만 하면서 자신의 팔자가 기구해서 살고 싶지 않으니 죽고 싶다고만 했다.
남편이 “대체 무슨 일입니까? 말씀 하지 않으면 내일 집으로 찾아가겠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올케는 “올 필요 없고 돈만 보내주세요. 다른 사람에게 맡겼으니, 오셔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3만 위안을 보냈다. 며칠 후 동생이 다시 전화를 걸어 아이들이 수업료를 낼 돈이 없다면서 3천 위안을 더 빌려달라고 했다. 동생이 외지에서 설을 쇠러 집에 돌아왔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빌려간 돈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설을 쇠고 나서 동생 부부는 이혼했고 동생은 집을 나와 우리 집으로 왔다. 불쌍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동생은 나더러 차를 사서 운수업을 하자고 했고, 나한테 빌린 돈만으론 부족하니 또 형부한테 돈을 좀 빌리게 도와달라고 했다.
남편이 말했다
“도와줄 수는 있지만 일단 지난번에 가져간 돈을 갚게.”
동생이 말했다.
“매형이 그렇게 많이 도와 주셨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먼저 돈을 갚겠습니다.”
결국 4만 위안을 또 빌려갔다. 몇 년 후 어렵사리 2만 위안을 회수했지만 나머지 2만 위안은 여기서 조금 저기서 찔끔 갚았고 결국 1만 8천 위안은 정산할 수 없었다. 남편은 이 상황을 보고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 나는 원망하는 마음이 다시 올라왔고, 이미 자신을 속인과 혼동했으며 동생의 생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명리심에 이끌려 동생을 미워하고 무시하고 질투했는데 완전히 사람의 생각으로 문제를 바라보았고 쇠뿔을 파고들면서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대법제자의 자비로운 흉금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한편 외지에 가서 장사하던 시동생은 장사가 잘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전화를 걸어 5000위안이 필요하다고 했다. 남편이 출근해서 직접 5000위안을 보냈다. 그런데 며칠 후 다시 전화가 와서 “5천 위안으로는 부족하니 1만 위안만 더 빌려 달라”고 했다. 남편은 아무 말 없이 1만 위안을 더 보내주었다. 시동생 가족은 농촌에 사는데 시동생이 외지에서 돌아와서 우리를 만났을 때 돈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게다가 동서는 친척들에게 우리에게 빚진 게 없고 오히려 우리가 자신들에게 빚을 졌다고 말했다. 시동생은 거기에 있었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난 후 둘째 백부님 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나는 시동생 부부에게 유쾌하게 말했다.
“지금 도련님 가족들이 어떻게 사는지 잘 봤으니 빌려간 15,000위안은 받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은 파룬따파(法輪大法)가 나더러 당신들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했습니다.”
내가 말을 마친 후 시동생 부부는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시동생이 말했다.
“형수님은 그렇게 돈이 많으신데 아직도 요만한 돈에 연연하세요.”
이 말에 평온했던 마음이 다시 평형을 이루지 못했다. 누구의 돈이든 힘들게 번 것으로 저절로 굴러들어온 게 아니다. 원한심,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마음, 심지어 억울하고 보답을 받지 못한 마음,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과 심지어 자신이 너무 재수가 없어서 늘 손해만 본다고 여기면서 완전히 속인과 혼동했다. 이렇게 여러 차례 원한(怨恨)이 성장할 토양을 제공했고 점차적으로 원한심을 형성했고 결과적으로 신체에 병업 가상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깨닫지 못했다.
동수들과 함께 법을 공부하고 교류하면서 나는 진정으로 법을 공부하고 안으로 찾음과 마음 닦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았는데 특히 내게 있어 지금은 일사일념(一思一念)이 아주 중요하다. 왜 계속해서 가족들이 반복적으로 이익 문제에서 내게 이런 표현이 나타나게 했을까?
첫째, 수련을 했으니 사존께서는 내게 대법의 법리와 법에서 수련해낸 자비로 모든 사람들을 대하게 하셨는데 여기에는 가족도 포함한다. “어떠한 우연한 일도 없다”(《캐나다법회설법》). 그것은 바로 나더러 생생세세 지은 업의 빚을 갚으라는 것인데, 그럼 내 가족은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모두 인연관계가 있는 것으로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하는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왜 마음이 불편한가? 왜 나는 그것을 붙잡고 내려놓지 못하는가? 그 궁극적인 원인은 자아(自我)와 자사(自私)가 장난을 친 게 아닌가?
둘째, 사존께서는 이 못난 제자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나더러 이런 형식으로 다그쳐 빚을 갚는 동시에 사람 마음을 제거하게 하셨다. 심성이 제고해 올라가고 업도 없애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존께서 배치하신 수련의 길을 따르지 않고, 밖으로 보고 밖으로 찾으며 자신을 수련하지 않았으며 사존의 고심한 배치를 완전히 망각했다. 사존께서는 여러 차례 내게 수련 제고할 기회를 주셨고, 나더러 명리심, 자아, 사심(私心)을 제거하라고 관(關)을 설치해서 내가 자신을 깨끗이 씻고 아주 깨끗해져서 사존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셨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속인의 생각으로 문제를 생각하고 자신의 가족을 미워했으며 대법에서 닦아낸 자비로 가족을 대하지 못했다.
그들은 또한 사존의 가족이다. 또한 사존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세간의 이치란 반대로 되는 이치임을 망각한 것이다. 기왕에 세간의 이치가 반대로 되는 이치라면 이는 나더러 내려놓으라는 것인가 아니면 얻으라는 것인가? 사존께서는 이런 형식으로 나더러 대법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게 하셨고 마치 큰 바다처럼 일체를 포용할 수 있는 흉금으로 나를 성취시키려 하셨다. 이는 내가 집으로 돌아갈 길을 깔아주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반복해서 제고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사람의 명리정(名利情)을 꽉 움켜쥐고 내려놓지 않았으며 조그마한 손실에도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기회를 반복해서 놓쳐 관난(關難)이 반복적으로 커지게 했으며 또한 가족이 죄를 짓게 했으니 이는 모두 나의 잘못이 아닌가? 이는 자아(自我) 자사(自私)가 장난을 친 것이 아닌가? 근본 집착은 바로 자아 자사가 장난을 친 것이 아닌가? 수련인이 반드시 닦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또 밖으로 그들이 옳지 않은 것을 보면서 속으로 평형을 이루지 못해 질투하고 미워했는데 이것은 마도(魔道)로 가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사부님을 기만한 것이 아닌가? 남을 해치고 자신을 해쳤으니 지극히 위험한 것이다!
법 공부와 《9평(九評)》 듣기를 통해 나는 원한심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생겼다. 원(怨 원망)이란 바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자신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으면 기뻐하지 않고 듣기 좋은 것만 들으려 하는데 보답 받지 못한 것이다. 원한심은 수련인을 훼멸하는 독근(毒根)인데 원(怨)은 또 한(恨)과 부합하며 원과 한은 바로 사령(邪靈)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으로 우주 진선인(真善忍) 특성에 위배하고 어긋난 것이다. 그것은 질투심과 서로 연계되어 있으며 수련인이 반드시 제거해야 할 것이다. 나는 반드시 일사일념(一思一念)에서 그것을 깨끗이 제거하고 마음속에서 제거해 깡그리 없애버려야 한다!
법에 없는 곳이 있다면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허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6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