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소(槿素)
【정견망】
‘굴라(Gula)’라는 단어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으며 기독교에서는 ‘식탐’의 죄악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다. 불어로 ‘식탐꾼’이란 말은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방탕하다는 뜻이 있다.
‘식탐’은 줄곧 철학, 종교 및 사회학의 연구 대상이었다. 그리고 ‘식탐’은 기독교에서 인정하는 인류의 7대 죄악 중 하나다.
그럼 왜 식탐이 죄가 되는가? 이는 기독교를 신봉하며 사막에서 수행했던 은둔 수도사들과 관련이 있다. 그들은 고된 수련을 위해 매일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음식만 먹었다. 그 어떤 잉여음식도 마귀가 인류를 유혹하는 도구로 간주 되었다. 서기 365년경, 고행 수도사 에바겔로는 마귀가 인류를 유혹하는 데 사용하는 여덟 가지 죄악과 사념(邪念)을 나열했는데 그중 1위가 식탐 2위가 음욕이었다. ‘식탐-음욕’이라는 천 년을 해치는 지옥의 조합이 탄생한 것이다.
중국어로 말하자면 “등 따습고 배부르면 음욕이 생긴다”는 것에 해당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작품에서도 ‘식탐’은 마치 늘 ‘호색’과 함께 등장하는데, 《서유기》의 저팔계가 그 전형적인 사례다.
중세 미술 작품에서 가장 못생기고 역겨운 동물인 두꺼비는 식탐자들을 처벌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15세기 《양치기 일기》라는 판화에서 볼 수 있듯이, 식탐을 저지른 교인들은 살아있는 두꺼비, 뱀, 도마뱀을 잡아먹는 ‘탄탈로스 고문’이란 징벌을 받았다.
14세기 프랑스 시인 데샹의 시에 “가자! 돼지고기 먹으러!”라고 썼다. 그 당시에는 식탐이 짐승의 본성을 크게 폭발해 이지를 상실한 표현으로 여겨졌다.
현대인들은 식탐에 대한 고인(古人)들의 깊은 인식에 미치지 못하거나 또는 식탐을 아예 탐욕, 방종, 음탕, 죄악 등과 연관시키지 못한다. 중세에 초콜릿과 각종 단 음식들은 음욕을 유발하는 식품으로 여겨졌고 심지어 자극적인 맛을 지닌 고추도 음욕을 유발한다고 보았다. 즉, 단맛 나는 음식뿐만 아니라 자극적인 매운맛, 지나친 짠맛, 심지어 커피의 쓴맛도 모두 사람의 구미에 자극을 주어 신체를 이지적이지 못하게 만드는 원천으로 여겼다.
속인들은 늘 아름다운 여인을 일러 “탐스럽게 예쁘다”라고 칭찬하지 않는가? 식사와 색(色) 사이의 깨끗하지 못하고 혼란한 관계를 속인마저 무시할 수 있는데 우리 대법제자들에 대해 말하자면 이것은 아주 험악한 사악의 유혹이자 집착을 생기게 하는 근원의 하나다!
노자는 “다섯 가지 맛은 사람의 입맛을 상하게 한다.[五味令人口爽]”라고 했다. 여기서 ‘상(爽)’이란 혀가 맛을 구별하는 능력을 잃었다는 뜻이다. 혀가 맛을 구별하는 능력을 잃으면 동시에 사유 역시 기본적으로 둔해지거나 심지어 정체된다. 왜냐하면 맛을 느끼는 것은 뇌가 신경계에서 전달된 전기 신호를 받아 생기는데 전기 신호는 혀에 있는 수용체가 느끼는 맛 분자의 특정 구조에 의해 변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각은 뇌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다섯 가지 맛을 먹고 나면 입맛만 상할 뿐아니라 머리도 혼란스러워진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맛에 집착하는 것은 정말이지 사람의 지혜를 어둡게 만드는 재앙의 근원이다.
물론 신체 건강을 위해 정상적인 식사는 당연히 필요하다. 교회에서도 식탐의 범주를 객관적으로 지적하는데, 식사 시간 외에 음식을 먹는 것, 식사 시간 전에 미리 먹는 것, 생리적 필요를 초과하는 폭음이나 폭식, 지나치게 풍성하고 아름다운 식사는 모두 식탐의 범주에 속한다.
현대 사회의 각종 음식의 유혹은 그야말로 천지를 뒤덮을 정도다. 각종 광고, 동영상 및 스타들의 선전으로 최고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것이 고귀한 신분을 상징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대중들의 미식(美食)에 대한 추구는 그야말로 사치가 극에 달했다.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들이 심지어 예술가처럼 추앙받는데, 영국의 가장 유명한 요리사들은 연봉이 천만 파운드에 달한다. 속인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음식 관련 광고와 동영상의 유혹이 있는데 확실한 것은 음식 자체보다 더 우리 수련인의 정력(定力)을 고험한다.
많은 속인들도 이런 체험이 있는데 맛있는 음식의 유혹에 넘어가 미친 듯이 음식을 먹거나 배불리 먹고 난 후 또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로 마무리한다. 이렇게 하면 식사 후 졸음이 쏟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불필요한 살이 쌓인다. 거울에 비친 뚱뚱한 자기 모습과 아예 들어가지 않는 예쁜 드레스를 보면서 다시는 함부로 먹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면 다시 이렇게 먹고 후회하고 다시 먹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모든 고통의 근원은 영원히 만족시킬 수 없는 욕망임을 속인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이 식욕에 대해 말하자면, 현대 사회는 식욕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아 사람들이 헤어 나오지 못하게 했고 욕망의 수렁에 깊이 빠졌음에도 스스로 알지 못하게 한다. 기독교에서는 식탐자를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라고” 자리매김했다. 속인이 자신의 식탐을 어떻게 변명하는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수련자로서 우리가 어떻게 한 번이라도 “천사도 아닌” 대열에 오를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이미 명확히 말씀하셨다.
“남들이 무엇을 주면 바로 무엇을 먹었는데,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음식을 가릴 수 없었으며, 주는 음식 중에는 고기가 있을 수 있었다.”
“사람은 먹는 문제에서, 다만 고기를 먹는 것뿐만이 아니라 어떤 음식에 대해 집착해도 다 안 되며 다른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중생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사람들과 자주 식사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고기 및 다양한 ‘미식’을 먹을 필요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그것들이 있어선 안 된다. 만약 우리 역시 미식을 아주 좋아하고 늘 끌리는 상태라면 그것이 바로 정말 일종의 집착이다.
수련하는 사람은 마땅히 사부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먹어도 음미하지 않으니 입의 집착 없도다”(《홍음》〈도 중에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불미(不味 맛을 모른다)’란 개인적으로 이해하기에 ‘무미(無味 맛이 없다)’가 아니라 각종 맛에 대한 미뢰의 자극에 직면해 우리의 태도가 늘 한결같은 것을 말한다. 즉 특별히 맛을 모르며 그 맛에 이끌리지도 않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식욕을 끊는다면 그 어떤 형태나 맛을 지닌 음식이라도 더 이상 우리를 끌어당길 수 없다.
사람에게 있어 식탐이란 일종의 악(惡)이며, 수련인에게 있어서는 바로 일종의 집착이다.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에게는 더욱이 일찌감치 제거해야 할 두려운 하나의 집착이다. 하루에 세 끼, 하루에 적어도 세 차례 고험인데, 어떻게 음식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내려놓고 어떻게 신(神)의 자태와 신의 행동으로 음식을 대할 것인가는 멋대로 할 수 있는 작은 일이 전혀 아니다.
이 글을 미식에 집착하는 동수들과 함께 나눠 공동으로 제고하고 식탐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7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