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대법제자
【정견망】
나는 과거 다년간 늘 심각한 부과심(浮誇心 역주: 과장하며 허풍을 떠는 마음)을 느꼈는데 사실 당 문화(黨文化 사악한 공산당 문화)의 표현이다. 여기서 부과(浮誇)란 남이나 자신 또는 일에 대한 자기 이해를 표면에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과 감정이 쉽게 과장하거나 극단적으로 되고 과격해지거나 편협해진다.
나는 부과심이란 마치 연막탄과 같아서 사물의 극히 얕은 표층을 덮고 사람과 일의 전모(全貌)를 깊이 있고 세밀하게 관찰하거나 이해하는 것을 방해함을 인식했다. 때문에 나는 과거 일에 대한 이해가 늘 단순하고 조잡한 인식에 치우쳐 그럴듯하지만, 스스로 독립적이고 이지적으로 사고하지 않았고, 바람 소리에 비가 온다고 단정하는 것처럼 다른 관점에 쉽게 선동당했다.
과거에 수련 및 심성에 대한 이해 역시 매우 피상적이고 편협했으며, 또 일종 과격함과 고집이 있었고, 이성적이지 않고 매우 감성적이었다. 몇 달 전에야 나는 비로소 심성과 관련된 일부 요소들을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평온[平靜]
대법 사이트에서 동수의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많은 서양인들이 대법 활동이 그들에게 평온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고 자주 말한다는 것을 알았다. 또 많은 서양 신수련생들이 수련 감수를 말할 때 흔히 마음의 평온을 느꼈다고 말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최근 몇 달에야 비로소 평온의 가치를 진정으로 느꼈다. 과거에는 내심이 평온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느낄 수 없었다. 과거에 수련을 말하면 나는 완전히 당 문화의 각종 감정 기복으로, 어떤 일에 대해 격앙하거나 불공평에 대해 정의로운 분노나 원수처럼 미워했다. 정진(精進)을 말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각종 ‘병(拼 역주: 필사적으로 목숨을 건다는 뜻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극단적으로 일을 한다는 의미)’으로 일찍 일어나, 전력투구하고 감옥에서는 단식투쟁을 하고 법을 얼마나 많이 외웠는지 어쨌든 바로 이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마음의 평온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오래전, 법회에서 동수들의 교류를 들으면서, 나는 감옥에서 단식으로 박해에 반대한 이야기나 무슨 큰일을 한 이야기를 들어야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한 동수의 발언에서 마음 수련을 약간 언급하면서 ‘진선인(真善忍)’에 더 가까워지고 싶다고 했다. 비록 많은 동수들이 그 교류가 아주 좋고 내심에 감동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수련인의 ‘능력’을 체현하지 못한다고 여겼다.
수 년 전의 일이다. 두 동수가 감옥에서 박해에 반대하다 나왔는데 동수 갑(甲)은 단식으로 박해에 반대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나는 매우 탄복했다. 하지만 동수 을(乙)은 감옥에서 단식하지 않았고 강제노역을 당했다. 나는 그가 박해에 철저히 반대하지 않았고 생사를 내려놓지 않았으니 동수 갑과는 차이가 아주 크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과거에 내가 가늠하던 표준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동수 갑의 상태는 몹시 걱정스러울 지경이지만 동수 을은 오히려 도처에서 수련에 소양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나는 동수 을이 했던 많은 세부적인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는 지금껏 격앙된 높은 톤으로 말한 적이 없고 아주 평화로우며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늘 온화하다. 평소에도 조급하지 않으며, 화를 내는 일은 더욱 없다. 그의 내심이 늘 아주 평온함을 느낄 수 있다.
법(法)에서 내가 이해한 것은 심성의 높고 낮음이야말로 수련의 관건이며 마음이 조용(靜)해지고 마음이 정(定)에 이를 수 있는가가 심성을 가늠하는 관건적인 요소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당신이 만약 당신 자신을 제고하려면 당신은 안에서 찾아야 하며, 당신의 이 마음에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당신은 그래야만 진정하게 제고할 수 있으며, 가부좌 중에서 당신은 비로소 고요해질 수 있고, 고요해질 수 있음이 바로 공(功)으로서, 정력(定力)이 얼마나 깊은지는 층차의 체현이다.”
몇 년 전, 어떤 동수가 자신이 가부좌할 때 일종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느꼈다고 말했다. 이 동수는 또 수련 상태가 비교적 평온했고 기본적으로 당 문화가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나는 이런 종류의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듣기 좋아한 것은 모두 비교적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그런 것들이었다. 나중에 다시 돌아보니 사실 어떤 교류는 과격하고 극단적이었는데 나중에야 명백히 알게 되었다.
20여 년이 지난 후, 모두 동수들의 수련 상태를 더 똑똑히 알게 되었다. 내가 발견한 것은 상태가 좋은 그런 동수들은 확실히 모두 마음이 비교적 평온하다. 이 평온의 배후에는 사실 수많은 좋은 심성(心性)들이 있다. 예를 들면, 명리정(名利情)에 대해 늘 비교적 담담해서 득실을 따지지 않고, 탐욕이 적으니 자연히 평온해진다. 당 문화는 쉽게 사람의 감정 기복이 심하게 만드는데 내심이 아주 괴롭게 만든다. 내가 이해하기에 배후에는 사실 탐욕이 너무 많아져서 생각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늘 어떻게 해야만 더 많은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지름길을 가려 하며, 극단으로 가고, 빨리 효과를 보려 하고, 남과 비교하고, 남과 다투려 하는 등등이다.
행복감
어떤 동수가 자신은 늘 수련이 가져다주는 행복감을 느낀다고 했을 때 나는 내심에서 감촉이 있었다. 사실 나는 일종의 죄책감이 있었다. 나는 왜 수련이 가져다주는 행복감을 느끼기가 이렇게 힘든가? 사부님과 대법에 너무 죄송했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본 후 나는 자신의 문제는 살아가면서도 행복감을 느끼기 힘든 것을 발견했다. 내가 느낀 것은 명리정에서 수확을 얻었을 때 오는 흥분으로 이것은 전통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수련하고 나서 내가 느낀 기쁨도 뭔가 ‘좋은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동수가 나를 인정해 주거나, 내가 하는 항목에 진전이 있는 등등 결국에는 여전히 명리정 방면의 ‘소득’이었다. 사실 이런 느낌은 행복감이 아니라 사람 마음이 ‘좋은 일’에 자극된 후 생기는 일종의 흥분이었다. 이는 어떤 면에서 담배, 술, 마약 등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나 자극을 받은 후의 흥분과 같다.
법에서 내가 이해한 것은 수련인은 곧 나한으로 성취되는데 모두 기뻐할 수 없다. 즉 그 어떤 ‘좋은 일’의 자극으로 오는 흥분이 없어야 하며 마땅히 마음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즉 평온해야 한다.
최근 들어 개인적으로 이해하기에 행복감이란 자신이 어떤 좋은 것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일종 나를 잊고 남을 위하는 감수다. 그러므로 아주 이기적인 사람은 진정한 행복을 느끼기 아주 어려우며 단지 자극이 주는 흥분만 느낄 뿐이다.
법에서 내가 이해한 것은 우주 특성 ‘진선인(真善忍)’이 일체를 제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심이 없는 사람은 그의 심성이 우주 특성에 비교적 부합하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반면 이기적인 사람은 그의 심성이 우주 특성과 괴리되어 있기 때문에 ‘행복’을 느끼기 어렵다. 이는 또한 많은 현대인들이 왜 몹시 성공해서 큰 명예와 이익을 얻었음에도 즐겁지 않고 우울한 이유일 것이다. 사실, 행복감은 일종의 무사(無私)하고 자아를 잊으며 선량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지난 몇 년을 회상해 보면 내가 어떤 방면에서 강하다고 우쭐할 때의 그런 느낌은 행복이 아니라 일종의 자기 과시이자 자만심이었고, 심지어 마음속으로 남을 무시한 것이다. 이런 것들은 좋지 않은 심성이다. 좋지 않은 심성이 행복한 감정을 가져올 수는 없다. 또한 내가 일을 해서 성적을 얻었다고 흥분할 때 또한 수련 중의 ‘이익’을 얻어서 기뻐하는 이런 느낌 뒤에는 강렬한 사람 마음이 있다. 얻으면 기뻐하고 얻지 못하면 실망하는데 얻어도 걱정이고 잃어도 걱정이다. 이 역시 행복한 느낌이 아니다.
수련 중에 늘 ‘행복감’을 느낀다고 말한 그 동수는 내심이 늘 평온하고 상화(祥和)하며, 사상이 단순하고, 아주 선량해서, 이기적이지 않고 자아가 없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매우 강하고 아주 이기적이다. 이것이 나와 그녀의 차이점이자 또한 그녀가 쉽게 행복을 느끼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소립자(小粒子)
어제 본 크리스마스 영화에서 수백 명의 난쟁이들이 산타클로스 부부와 함께 산타 마을에서 즐겁게 생활하는 장면이 있었다. 거기서 한 난쟁이가 점점 자아가 팽창해 처음에는 장난으로 하다가 나중에는 산타와 우열을 가리려 했다. 또 다른 아이들에 대한 산타의 사랑을 질투했고, 나중에는 일체를 파괴하려고, 각종 투쟁을 도발해 산타를 이기려 했다. 그는 철저히 실패했지만 산타는 여전히 그를 미워하지 않았고 시종 자신의 아이로 여겼다. 마침내 그의 양심이 드러났고 다시 수많은 난쟁이의 일원으로 돌아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여기서 많은 것을 느꼈다. 행복이란 자신을 돋보이게 하거나 우쭐대는 것이 아니다. 마(魔)로 변한 마음으로는 행복을 느낄 수 없다. 행복이란 기꺼이 아주 작은 입자가 되는 것을 감수하고, 자아를 망각하며 다른 많은 입자들과 서로 의지하며, 그 속에서 위대한 우주가 아주 작은 입자에게 주는 당연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당신의 마음이 마로 변했을 때 자신이 아무리 강력하고 아무리 권위가 있고 거만해도 모두 행복과는 반대로 가는데 왜냐하면 우주 특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가 진심으로 되돌아온 후 마치 하나의 티끌처럼 아주 작아 보이지만 이것이 바로 행복이다. 마치 한 방울의 바닷물은 큰 바다에 들어가야만 비로소 행복이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거나 함부로 잘난 척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사부님께서는 《2003년 정월 대보름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당신들은 모두 하나의 입자일 뿐, 나의 눈에는 누가 누구에 비해 나은 것이 없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모두 내가 동시에 건진 것이기 때문이다.”
법에서 ‘자심생마(自心生魔)’를 언급하셨는데, 나는 이 마음이 일단 나타나기만 하면 되돌아가기란 쉽지 않음을 떠올렸다. 때문에 그 영화에서 산타클로스 부부 역시 여러 차례 감화시킨 후에야 마(魔)로 변한 그 마음을 일깨울 수 있었다. 그 마로 변한 마음이 아무리 악랄하고 아무리 지나치더라도 산타클로스는 여전히 그를 아이로 여기고 변함없는 자애(慈愛)로 기다렸다.
나는 이 장면에서 사부님께서 대법제자들을 대하시는 것을 떠올렸다. 그 어떤 제자에 대해서도 똑같이 예전처럼 자비하시다. 어떤 동수들은 자아가 팽창해 이미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 대법과 대립하는데 나는 이런 동수들에게 빨리 마로 변한 마음을 버리고 무수한 입자 속으로 되돌아와 작은 입자가 되어야지만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반드시 믿어야 하는데 사부님께서는 줄곧 당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다. 사부님의 자비는 홍대한 것으로, 사람 마음으로 사부님을 헤아려선 안 된다.
영화에서 그 마로 변한 생명은 다른 아이들에 대한 산타의 사랑을 시기하며 자신은 남들과 다르니 마땅히 특별히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부님께서 경문 《사부의 가족을 대함에 정확히 하라》에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인류의 일원(一員)으로서 특히 대법제자의 일원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부를 기만(欺)하는 것! 또 하나는 중생구도를 교란하는 것! 왜냐하면 이것은 생명이 남거나 제거되는 근본적인 경계이기 때문이다. 건드리기만 해도 안 된다.”
내가 이해하기에 사부님께서는 모든 입자를 똑같이 대하시며 똑같이 자비하시다. 하나의 작은 입자로서 다른 입자가 구도 받는 것을 교란한다면 그럼 큰 죄를 짓는 것으로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아울러 출발점은 바로 자신을 높게 보는 것으로 자신을 다른 입자보다 높게 보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홍음 2》〈연극 한 편〉에서 “만고의 일은 법을 위해 왔나니”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속인 중의 것 역시 사실 법을 위해 온 것이니 선용(善用)할 수 있고 대법을 실증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영화에 담긴 함의 역시 아마 이럴 것이다.
자신감(自信)
과거에 나는 자신감에 대해 잘못 이해했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당 문화가 비교적 강한 부모님의 교육을 받으면서 형성되었다. 나는 자신감이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강하다는 믿음이라고 여겼다. 예를 들면, 성적이 남보다 좋다거나 재능이 남보다 뛰어나며, 말재주가 좋고, 인간관계가 좋고, 더 총명한 등등. 나는 자신감이란 ‘남보다 나은’ ‘자본’이 주는 자아에 대한 좋은 느낌이라고 여겼다. 사실 이것은 일종의 허위와 허영의 느낌이다.
나중에 이것은 ‘자신감’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며, 배후에는 무신론, 진화론, 현대 관념, 당 문화, 마귀 문화 등이 있음을 깨달았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느낄 때는 곧 오만하고 안하무인이 되고 반대로 남보다 못하다고 느낄 때는 열등, 질투, 화를 내며 미워한다. 이런 사유는 생명에 대한 경외와 신(神)에 대한 신앙이 부족한 것이이다.
올바른 생각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 자신감이란 자신에게 좋은 품덕과 소양이 있거나 또는 이런 방면에서 제고되어서 생기는 신심(信心)이다. 가령 자율, 자아관리, 자신(의 욕망)을 이기는 것 등이다. 자신감의 이유는 원래 어떤 방면에서 남보다 강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옳은 일을 했기 때문이다.
일부 지혜로운 속인들이 아이를 교육할 때 늘 아이의 총명이나 예쁨, 재능 등을 칭찬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가 나눌 줄 알거나 남을 잘 대해주거나, 고통을 참는 것과 같은 일부 미덕(美德)을 보여줄 때 칭찬하고 격려한다. 이렇게 아이를 대하면 그들이 성장한 후 심태가 좋을 것이다.
과거에 내가 자신만만했던 때는 사실 기점이 모두 틀렸다. 그때는 어느 분야에서 남보다 낫다고 느꼈다. 반면 남보다 못하다고 느낄 때면 곧 질투하곤 했다. 잘못된 인식임을 깨닫고 이를 버린 후에야 나는 사실 자신감이 몹시 결핍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 이유는 자율, 집중, 냉정, 인내, 강인, 근면함 등 내면의 좋은 자질이 크게 부족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내가 이런 방면에서 조금씩 제고되었을 때 자신감이 점차 강화되었다. 예를 들면, 화를 내지 않자 자신감이 증가했고, 업무에 더 집중하고 세심해지자 자신감이 증가했다. 이런 것이 바로 ‘자신감’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자신감은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에서 진전이 있는 것이고 수련인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심성이 제고되어 가져온 것이다.
집중력
부과(浮誇 허풍)는 또한 집중력이 부족해서 일을 대충 하게 만드는데, 다시 말해 당 문화의 허울만 좋고 형식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게 한다. 개인적으로 배후에는 보다 심층의 원인이 있다고 본다. 너무 멀고 좋은 것을 바라고 큰 공을 세우길 좋아하는 등의 지나친 탐욕으로 늘 큰일이나 자신을 흥분시키는 성과만 주시하고 반대로 아주 평범한 일이나 사소한 것은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깊이 이해하려 하지 않고 대충대충하 거나 얼렁뚱땅 넘어가기 쉽다.
나는 과거에 잘 안 풀리거나 번거로운 일을 만나면 첫 일념이 바로 짜증이었고 시간을 또 허비해야 한다고 여겼다. 때문에 늘 대충 처리하려 했고 진지함, 인내심, 세심함 등 좋은 습관을 양성하지 않았다. 가끔은 내가 일을 대충대충 하고 신경 쓰지 않아 가족이 화를 내게 만들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나는 공부도 적당히 했는데, 그저 시험 문제를 외워서 답만 맞췄을 뿐 진정으로 이해하고 배우지 않았다. 바로 이렇게 얼렁뚱땅 일을 하려는 부과심(浮誇心) 때문에 생긴 것이다.
많은 동수들이 언급했다시피 법을 공부할 때 임무를 완성하는 식으로 형식적으로 하는 배후에는 사실 이런 부과심이 있다. 나는 일단 이렇게 허풍 떠는 습관이 형성된 후 고치려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님을 발견했다. 아마 허풍 역시 일종의 물질일 것이다. 자신이 가장 중시하는 법 공부에서도 늘 주의하지 못하면 한눈을 팔거나 형식적으로 된다. 지금은 전보다 이 방면에서 많이 중시해 제고도 많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주 주의하지 않으면 곧 한눈을 판다.
동수 중의 표현
주변 동수들 중에도 부과심 때문에 안으로 찾지 못하는 이들이 일부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니 여러분들이 참고하기 바란다. 허풍의 전형적인 표현은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동수는 늘 자신은 안으로 문제를 찾을 수 없으며,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자신이 우둔하다고 말한다. 이 동수는 다른 사람과 소통할 때 흔히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 설교조라, 흔히 상대방의 실제 심리에 부합하지 않기에 듣기 싫게 만든다. 일부 관념이 아주 고집스럽고 편협하며 원융(圓融)하지 못하다. 사실 이 동수는 심지어 자신조차 잘 이해하지 못하니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건 말할 나위도 없다.
내 생각에는 이 또한 부과심에 가려져서 자신의 섬세하고 깊은 내심의 활동과 동기 등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겉으로만 떠다니는데 비교적 거칠다. 하지만 이 동수는 심성 방면에서 장점도 많고 아주 많은 고생을 겪었으며 또 부지런하고 무슨 현대 관념이 없다. 단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나 자신도 이런 문제가 있어서 가족들이 늘 나더러 자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사실 아직 과거에 비해 좀 나아졌을 뿐 발전의 여지가 많다.
나는 자신을 이해하는 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또 인내심과 세심한 관찰 및 자기반성이 필요하며 때로는 느리고 세심하게 일하는 것이 필요하며 다른 일을 하는 것처럼 마음을 써야 함을 깨달았다. 만약 대충대충 일을 얼버무리는 심태로는 마찬가지로 잘할 수 없다.
어떤 동수는 사람들과 소통할 때 때때로 참을성이 없어서 다른 사람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자기 말만 한다. 말할 때 목소리가 높고 격앙된 느낌이 드는데, 때로는 영감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평화롭고 냉정하지 못하고 당 문화의 과장된 느낌을 받는다. 이 동수는 사실 매우 정진하고 또 다른 많은 장점이 있는데, 특히나 사람을 구하는 마음은 다른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나는 과거에 자주 다른 사람의 뜻을 오해하곤 했다. 사실은 너무 조급하게 서둘러 천천히 관찰하거나 경청하지 못했고 또 목적심이 강하며 인내하지 못하는 습관이 있었다. 지금 서서히 고치고 있고, 점차 다른 사람을 오해하는 일이 적어졌다.
또 어떤 동수는 다년간 늘 쉽게 화를 내면서 늘 자신의 성격이 나쁘다고 말하는데 이 일을 아주 중시했지만 고치지 못했다. 나는 사실 이 동수가 심성 방면에서 일부 구체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과심에 가로막혀, 계속해서 깊이 있고 세심하게 사고하지 않고, 경박하고 조급하며, 기껏 찾는다는 것이 자신은 성격이 나쁘고 성질이 급하다는 것에 등에 머무는데, 여기서 멈춘다.
이상은 최근 내가 깨달은 일부 체험이다. 이를 정리해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7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