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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가 문제

대법제자

【정견망】

명혜 문장 《교훈과 깨달음(教訓和理悟)》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일부 생명에 대해 말하자면 정말 애석한데 정법 수련 단체에 걸어들어왔음에도 오히려 홍대(洪大)한 ‘불법(佛法)’ 앞에서 개체 생명의 위치를 바로잡지 못해 최종적으로 대법 수련을 떠나갔다. ‘자아(自我)’라는 이 물건이 얼마나 사람을 해치는가! 그러나 결자해지라 여전히 자신(真我)이 걸어 나와야만 진정한 광명을 소중히 여길 수 있고 남들이 말하는 것은 늘 자신(真我)이 착실히 닦느니만 못하다.

자기(自我) 실증과 대법 실증 앞에서 만약 자기(真我)를 저애하는 것이 바로 자신(자아)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안으로 찾아 대법에 동화할 수 없으며 오히려 남을 개변하려 하면서 자신(자아)은 개변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단언컨대 반드시 완고한 자아의 물질 성분이 부면(負面) 작용을 일으킬 것이다. 그것도 생명이라 죽으려 하지 않기에 최후에 그것의 생명을 위협할 때면 반드시 끝까지 버티면서 도발할 것이다. 실제로는 이미 힘이 없지만 오히려 그것에게 쉽게 미혹 당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럴 때가 가장 위선적인 때로 자신(자아)이 자신(진아)을 속인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이다.

여기서 나(진아)의 현재 수련상황에 대해 좀 말해보겠다. 요즘 늘 일부 변이된 것들을 보는데 나는 더해진 것이 더욱 변태적인 것이고 전혀 내가 아니며 나에게 강요된 것임을 안다. 왜냐하면 그것(자아)이 형성될 때 내(진아)가 묵인 했거나 또는 당시 그것이 일으키는 맹아와 변이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줄곧 그것(자아)의 존재에 주목해 왔지만 그것은 줄곧 그곳에 있었고 줄곧 살아 있었고 또 성장했는데 그것의 인지(認知)로 일체를 가늠했다. 때문에 대법에 대한 그것의 이해는 아주 제한적이거나 심지어 변이된 것으로 그것의 관념에 부합하는 것으로 수련하고 그것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으면 의심하고 불신하거나 심지어 이견을 제출하거나 ‘불법(佛法)’의 미세하게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 한다. 겉으로 보면 정면(正面)적이지만 사실은 변이된 것이다.

왜냐하면 개체 생명이 홍대한 ‘불법’ 앞에서 위치와 관계를 바로 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自我)가 생길 수 있는데 마치 ‘가짜 손오공’처럼 무슨 일을 하든 다 자아를 실증하고, 무슨 일을 하든 늘 탐구하고 연구하면서 쇠뿔을 파고들며, 무슨 일을 하든 늘 자신의 능력에 의지해 해결하려 한다. 절대 다른 사람의 의심을 허용하지 않거나 심지어 남을 살해하는 것도 꺼리지 않는다. 때문에 ‘정법 수련’에서 완전히 순정하게 대법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 생명이 떨어져 내려가는 원인이 된다. 바로 이 ‘가아(假我)’가 가로막기 때문인데 그것은 또 ‘각자(覺者)’로 성취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가악투(假惡鬪)’의 것이다.

‘불법무변(佛法無邊)’이라 그 무엇도 법안(法眼 법의 눈)을 빠져나갈 수 없는데, ‘자아’는 필요하지 않고 ‘진아’를 되찾아야 한다. 만족함을 알아야 오랫동안 즐거울 수 있고 진정한 수련인은 모두 상화(祥和)한 것으로 성자(聖者)는 모두 이렇다. 아울러 개체 생명이 운명을 개변할 수 있는 바른 길은 오직 수련뿐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8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