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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행함에 법이 몸을 비추다

천윤(天潤)

【정견망】

나는 중국 북방의 작은 산간마을에 위치한 아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부모님 말씀에 따르면 내가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병이 생겨서 치료비가 4위안이 필요했지만 가족들이 돈이 없어서 나를 황야의 산비탈에 버렸다고 한다. 다행히 사촌 할아버님이 나를 데려가 겨우 살아 남았다. 나중에 나는 또 7~8번 죽을 뻔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열 살 때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해 집에 가지 않고 도망쳐 마을 동쪽 비탈의 밀밭에 숨어 지냈다. 그때는 밀이 익을 시기라 작은 손으로 밀을 비벼 먹었는데 아무도 나를 볼 수 없었다. 당시 내 기억에 전혀 두렵지 않았다. 밀밭 동쪽에 묘지가 있었다. 날도 어둡고 집에 가기 싫어 그냥 바닥에 누워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는데 아주 친근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생각했다.

‘위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곳이 누구에게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진짜 집이고,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의 품속 같겠지.’

반짝이는 별들이 내게 말을 걸고 내 마음을 아는 것 같았다. 내 집은 하늘에 있을까? 별들이 나를 집으로 데려갈 수 있을까? 그 당시에는 매우 편안하다고 느꼈다. 나는 이에 마을 사람들은 왜 밖에서 자지 않는 걸까? 밖이 이렇게 좋은데 왜 다들 모르는 걸까? (나중에 열일곱 살, 열여덟 살, 스무 살 때, 슬프고 비참할 때, 여러 번 밖에 나가 누워서 별을 보았지만, 예전의 그 느낌은 더 이상 없었다.)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족들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족들은 나를 찾으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대답하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집에 돌아왔을 때 가족들은 내 눈이 비정상인 것을 보고 내가 죽은 줄 알았는지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나도 하루하루 성장했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중학교 1학년 때 학교를 자퇴했다. 그 해 열여섯 살이었는데, 처음에는 아버지를 따라 농사를 짓다가 도시로 일하러 나갔으나 돈을 많이 벌진 못했다. 열여덟 살 때 인맥를 이용해 탄광에 출근했지만 곧 직장을 그만뒀다. 그 후 신발 공장, 씨앗 가공공장, 자동차 판매 등 분야에서 혼자 일하고 싶어서 2년 동안 열심히 뛰어 다녔지만 아무 것도 이룬 게 없었다.

거듭된 실패를 통해 나는 현 사회를 뚜렷이 보게 되었다. 전체 사회가 하나의 큰 네트워크로 이뤄졌는데 완전히 흑사회(黑社會)처럼 운영되었다. 완전히 거대한 흑사회 조직이었고 표면적인 것은 다 가짜였다. 공산당은 소수 사람이 먼저 부자가 되라고 했지만 그것들 일부 사람들만 먼저 부자가 되었다. 인민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했지만 인민은 영원히 주인은 될 수 없었다, 인민대회당에는 인민이 하나도 없다. 공산당을 인정하지 못하면 큰 손실을 입었다. 그때부터 나는 공산당과 반대로 생각했고 그들의 속임수를 간파했다.

2000년 늦봄, 내 나이 서른여섯 살이었다. 고향에서는 1년에 많은 돈을 벌지 못했다. 그런데 집을 짓고(당시 내가 살던 흙집), 아이들 학업 문제, 80대 노모 문제 등에 직면해, 가족들과 의논하고 출근 준비를 했다. 떠나기 전날 밤, 나는 분명한 꿈을 꾸었다. 우리 마을 한복판 사거리에서 서쪽에서 온 한 남자가 나에게 다가와 종이를 건네며 100점을 얻었다고 했다. 받아보니 정말 100점을 받았다. 잠에서 깨어난 후 나는 생각했다.

‘나는 학교 다닐 때도 시험에서 100점을 받지 못했는데, 30대인 지금 이런 꿈을 꾼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래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3년 늦봄 어느 날 저녁, 나는 또 다시 낯선 땅의 광야에 누워있었다. 더는 내게 말을 걸지 않는 별을 보니 마치 하늘은 나의 존재를 모르고 나의 불안과 슬픔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돈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3년 동안 밖에 나가 있었다. 하지만 돈은 벌지 못했고, 목표도 달성하지 못해 오히려 몸과 마음이 황폐해졌다. 밖에서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꿈속에서도 수없이 울었다. 고향에 돌아가기는 어려웠다. 곰곰이 생각하면서 나는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캄캄한 밤에 바다에서 길을 잃은 배와 같았다.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고,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으며, 바람 속에서 방향도 없고 구원도 없었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혼자 몸부림쳤다.

1. 바르게 돌아가는 길

무심코 뒤를 돌아본 것이 내가 법을 얻고 수련할 기연을 마련해 주었다. 그날은 날씨도 좋고 공기도 좋았다고 아직도 기억한다. 나는 다른 지역에서 논 옆 산책로를 걷다가 폭 1m 정도의 작은 돌 구멍을 지나는데, 그 작은 구멍 위에는 예전에 버려진 돌 운하가 있었다. 돌 운하에 담뱃갑 크기의 스티커가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진선인(真善忍)라는 정결한 세 글자였다.

이에 나는 파룬궁을 연상했다. 권력과 돈이 정의인 이 시대에도 진선인은 필요하다. TV에서 정치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정치를 해도 좋으니 공산당과 맹렬히 싸워라. 공산당을 타도하고 사람을 구하라. 연공하는 것이 무슨 법을 어기는가? 나는 공산당이 말하는 그런 것을 믿지는 않았지만 어디에 가서 파룬궁을 배운단 말인가? 가게 주인에게 물어봤는데 대답하지 않았다. 또 어느 날 한 마을의 서기에게 물었지만 그는 말해주지 않았다.

2004년 여름까지 나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인력시장에 나갔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섯 사람이 수다를 떨며 농담하는 것을 보았다. 전에 한 대법 수련생이 진상을 알리는 것을 보고 나는 그에게 공산당에 대한 나의 이해를 설명해 주자 그 사람들이 떠난 후였다. 나는 단지 법을 배우고 연공하고 싶다고 말하고 당신이 나에게 가르쳐달라고 했다. 나는 법을 얻었다! 법을 얻은 후 해결할 수 없었던 모든 문제들이 전부 해결되었다. 이 세상의 일체는 다 가상이고 오직 법만이 진실한 것이다. 내가 집에 있을 때 아들이 내게 묻던 말이 생각났다. 사람은 무엇 하러 왔어요? 이때 나는 대답할 수 있었다. 사람은 바로 이것을 하러 왔단다.

나는 처음 법 공부를 시작할 때 한 가지 목표를 정했다. 두 달 안에 가부좌를 틀자. 올해 안에 30분에 도달하고, 내년에는 1시간에 도달하자. 나는 인력 시장에서 장기 근무 대신 단기 근무를 하면서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날마다 연공하고 법을 공부해 다그쳐 노수련생들을 따라잡았다.

2. 정을 내려놓다

처음 수련을 시작할 때 나는 일단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으니 신중하게 고려했다. 엄혹한 박해하에서 견딜 수 있든 없든, 나는 사당은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우리 가족이 나와 함께 잘 살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들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줄까 아무 연락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당시 내가 집을 나올 때 큰딸은 열두 살이었고, 아래로 쌍둥이들은 고작 네 살이었는데,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때때로 내 마음속에는 뿌리 깊은 것들이 서로 얽혀 싸우고 있었다.

어느 해, 설날 밤에 몰래 집에 돌아가서 보니 집은 완전히 무너지고 가족들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보았다. 그때의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때 사부님의 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나는 돈을 좀 많이 벌어서 집을 잘 안정시켜 놓으면, 나는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고, 나는 다시 도를 닦겠다.” 나는 당신이 망상한다고 말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생활을 간섭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우지할 수 없다. 아내와 자식, 부모형제를 포함한 그들의 운명, 그것이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인가? 그 밖에, 당신이 뒷근심이 없고, 당신이 어떤 번거로움도 없다면 당신은 또 무엇을 수련하겠는가? 편안하고 편안하게 거기서 연공(煉功)을 한다고? 어디 그런 일이 있는가? 그것은 당신이 속인의 각도에서 생각한 것이다.”(《전법륜》)

3. 두 차례 사악의 박해

2008년 겨울, 나는 정규직장을 찾아 몇 년간 공장에서 일했다. 그 몇 년 동안 진상을 알렸지만 삼퇴한 사람은 적었다. 1년 동안 진상을 알렸지만 삼퇴자는 겨우 20명에 불과했다. 바쁜 업무 일정으로 인해 법 공부와 연공을 따라가지 못했다. 심성이 올라가지 못하자 속인 마음이 점차 많아졌다. 자식 정, 색의 교란. 나는 자신에게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한동안 이 문제를 전문적으로 닦았다. 하지만 내가 사직하기 전인 2011년에 다른 사람의 모함으로 불법 납치되어 간수소에 들어갔다. 나는 사악에 협력하지 않았고 네 번이나 피를 뽑혔다. 안에 있으면서 내가 가장 그리웠던 것은 《전법륜》이었다. 매끼 찐빵 하나에 짠지도 먹지 못해 살이 많이 빠졌다. 이 기간에 나는 두 차례 사부님 꿈을 꾸었는데 나는 사부님께서 내 곁에 계심을 알았다. 27일 후, 나는 정정당당하게 검은 소굴에서 나왔다.

몇 년 후, 나는 큰 집회에서 진상을 알리기 위해 어느 현(縣)에 갔다가 다시 사악에게 납치되었다. 구치소에서는 실명과 주소를 알리지 않았다. 구치소 경찰은 나를 온몸에 멍이 들 때까지 구타했고, 독방에 갇혔다. 그곳에서는 아무런 구제도 없었고 반년 후 이미 피골이 상접해졌다. 나는 불법으로 1년 3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에 가는 길에 한 경찰관이 “당신같은 사람은 산 채로 묻어도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아”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감옥 문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사부님의 시 《무존》을 외웠다.

살아 바라는 것 없고
죽어 애석할 것 없네
허망한 생각 다 떨쳐버리면
부처 수련 어렵지 않도다

감옥에서는 전문적으로 나를 위한 팀을 꾸렸다. 5명의 포협(包夾), 1명의 감방장이 모든 행동을 상부에 보고했다. 그들이 가장 많이 말한 것은 너는 공산당의 것을 먹고 마시면서 왜 공산당을 욕하냐는 것이다.

나는 대답했다.

“먹는 것은 다 하느님의 것이다. 하느님이 태양과 지구를 창조하셨다. 태양이 없으면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고 아무것도 살 수 없다. 하느님이 사람더러 살라고 하면 살고 죽으라고 하면 죽는 것이다. 누가 얼마나 사는지는 하느님의 뜻대로 한다.” 그러자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나를 어찌할 방법이 없자 이후 나에 대한 통제를 느슨히 했고, 늘 자라고 했다. 나는 그러면 곧 1시간 발정념을 하고 나서 법을 외웠다.

얼마 후 포협이 내게 또 서명을 강요하며 말했다.

“네가 이름을 쓰지 않으면 안 돼. 서명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어. 서명하지 않으면 감옥에서 어떻게 문을 열어주겠어?”

나는 당시 속으로 생각했다.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결정하시고 그 누구도 결정할 수 없다.’

결국 감옥에서 풀려날 때 수감자들이 포협이 나를 사무실로 데리고 가서 석방 절차를 밟게 했다. 어느 실내에서 제복을 입은 교도관이 나를 위협하며 종이와 펜을 내밀며 말했다.

“서명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말했다.

“나는 서명하지 않고 지장도 찍지 않겠소.”

이때 교도관이 “나가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나는 사부님의 보호 아래 성공적으로 감옥 문을 빠져나왔다.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그리 즐겁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감옥에서 풀려나면 마중하러 나온 이들이 있지만 나는 돌아갈 집도 없고 여전히 죄수복에 낡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날은 비가 오고 눈이 오고 찬바람이 이리저리 눈꽃을 날리며 행인들이 분주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사명은 사부님을 도와 정법(正法)하는 것임을 잘 알았다. 나는 그날 법을 공부하고 연공하기 위해 동수를 찾아갔다.

4. 진상을 알리기 위한 행각

이번에 감옥에서 나온 후 나는 더는 예전처럼 진상을 알리지 않는다. 지금은 늘 300~400부의 자료를 싣고 오토바이에 싣고 또 이불을 갖고 나가 7~8일 동안 진상을 알린다. 매번 약 80명에서 때로는 100명 이상 삼퇴한다. 내가 진상을 알릴 때 고개를 끄덕이며 “응?”이나 “흥”이라고 하는 사람은 삼퇴를 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국 대륙 사람들은 매우 교활해서 적당히 대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오직 “가능해요”, “좋아요”, 또는 “내가 탈퇴할께요”라고 말하는 경우만 삼퇴로 계산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답하는 사람에게는 그냥 “당신이 탈퇴하기 싫다면, 앞으로 삼퇴를 권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때 다시 삼퇴하세요”라고 한다. 나는 오토바이로 200~300리를 이동할 수 있다. 나는 신분증이 없어서 외출 할 때 호텔에 묵을 수 없고, 늘 황야나 산허리, 산림, 잡초 속이나 옥수수밭, 농경지 등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1) 나뭇잎을 이불로 삼다

한번은 진상 자료를 배포하러 고향에 갔다. 차를 타고 200여 리를 다녔고, 산길을 수십 리 걸어 다녔다. 아주 추운 겨울이었는데, 자료를 배포하고 나니 밤 12시가 넘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갈 곳이 없었다. 버스는 아침 6시에 출발하는데 어떻게 할까? 숲에 가보니 숲 남쪽에 돌둑이 있었는데 그 아래에 바람에 날린 낙엽이 쌓여 있어서 손으로 끌어안고 몸 위에 얹고 잠을 자려고 했다. 그런데 잠이 들수록 더 추워서 잠이 오지 않아 앉아 있으니 더 추웠다. 나뭇잎 아래에서 이렇게 힘들게 몇 시간을 보냈다. 날이 밝기도 전에 시장에 갔는데, 너무 이른 시간이라 시장에 사람이 없어서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버스가 왔다.

(2) 한밤중에 비가 내리다

어느 가을날, 밖에서 진상을 알리다 미리 한 곳을 찾았는데, 바로 복숭아밭이었다. 복숭아는 이미 딴 상태라 여기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어두운 진(鎭)에 나가 먹고 마시다 마침 한 동수를 만났다. 나더러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나는 이미 자리를 잡았으니 가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또 자료를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불편해서 거부했다. 나는 평소 진상을 알리면서 동수 집에는 가지 않는데, 사람 마음이 서로 다르고 두려운 마음이 서로 달라서 동수들에게 번거로움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그래서 가지 않았다.

그날 밤은 화창한 날이었고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하지만, 밤 2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꽤 많이 왔다. 급히 침구를 거두고 비닐 시트를 가져다가 차를 덮고 진상 자료를 덮었다. 차를 길가로 밀고 거기에 반나절 동안 쪼그려 앉아 있었는데, 새벽이 되어야 비가 그쳤다. 자료는 하루 진상하기에 충분했기에, 며칠 동안 진상을 알렸으니 돌아갈 때가 되었다. 이에 돌아가면서 사람을 구했다. 9시가 되자 하늘이 맑아졌다. 그날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0~20명 정도 삼퇴했다.

(3) 한밤중에 들개가 짖다

한번은 다른 곳에서 진상을 알리고 있을 때, 잡초가 사람 키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황무지를 보았다. 거기에 오토바이를 넣기에 아주 좋았다! 오늘 밤은 그냥 여기서 지내자. 저녁 12시쯤 들개가 땅에 누워있는 나를 보고 크게 짖었다. 나는 생각했다.

‘아, 사람들은 나를 볼 수 없지만 개들은 나를 볼 수 있구나. 계속 짖어대니 짜증이 나는군. 어떻게 할까?’

풀밭에서 나와 돌로 개를 쫓아내면, 잠시 후에 다시 왔고 쫓아버리면 잠시 후에 다시 짖었다. 연달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짐을 싸서 떠나야 했고, 먼 곳으로 이동해 반나절을 머물렀다.

(4) 검은 굴 이야기

나는 이렇게 밖에서 운유(雲遊)하며 진상을 알렸다. 특히 산간지대에서 노숙하기란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 가을, 어두워졌을 때 나는 옥수수밭을 발견하고 그 안으로 차를 넣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주변을 살펴보니 옥수수밭에 작은 돌둑이 있었고 그 위에는 사발 크기의 검은 굴이 있었는데 둥그런 모양에 수직으로 뚫려 있었고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굴 입구는 매우 매끄러웠다. 유심히 살펴보니 뱀굴이라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굴 입구에 지저분한 흙도 없고, 다른 동물의 발자국이나 그런 것도 없고 그냥 매끄럽고 땅이 많이 젖어 있어서 두들어졌기 때문이다. 수년에 걸쳐 나는 기본적으로 봄, 여름, 가을에 낮과 밤에 뱀이 언제 나오는지 아는데, 내가 만난 많은 뱀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 나는 돌을 하나 찾아 굴 입구를 막았다. 이미 날이 어두워져서, 산간 지역에서는 잘 곳을 찾기가 정말 어려웠기 때문에 다른 곳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땅이 아주 축축했다. 얼마 전 비가 내렸기 때문에 비닐 시트를 먼저 깔고 이불을 깔았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옆에 놓을 돌 몇 개와 나무 막대기도 가져다 놓았다. (물론 사람 마음이다) 나는 사부님께서 지켜주신다! 누워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집에 있을 때 일이 하나 생각났다. 우리가 살던 곳도 산간지대였다. 밭일을 하고 서둘러 집에 가던 중 1미터도 안 되는 뱀이 둑의 동그란 구멍을 뚫고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수직으로 뚫린 검은 굴이었다. 나는 마찬가지로 돌로 구멍 입구를 막았다. 며칠 뒤 뱀이 나왔나 보러 갔다. 결국 그 뱀은 원래 굴을 떠나 약 40센티미터 떨어진 곳에서 다른 구멍을 팠다. 아마 탈출했을 것이다. 나는 그날 밤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고 아직 날이 어두울 때쯤 차에 짐을 싸서 길을 떠났다. 인연 있는 사람을 찾아 구하기 위한 것이다.

(5) 큰 산의 신비한 인물

막 설을 쇤 직후 어느 날 밤, 나는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려고 산간지방에 갔다. 어두워지기 전에 큰 산을 지나갔는데, 산 바로 아래에 작은 길이 있었다. 그 작은 길을 따라 1리 정도 걸어가니 안에 소나무밭이 있었다. 나는 이곳이 아주 좋고, 조용한 데다 주변에 사람도 없어서, 매우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 밤은 여기서 자기로 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오토바이 시동을 끄고 소나무밭으로 넣었다. 또 짚을 찾아 땅에 깔고 이불을 펴고 잠시 쉬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큰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자동차 달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가끔 멀리서 슬픈 새소리도 들리고, 바람도 전혀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나는 돌아가서 진상 자료를 다른 곳에 숨겨 놓았다. 누워서 이불 밑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이 시간이 내가 경험한 가장 외딴 시간이었다고 생각했고, 산이 얼마나 조용했는지도 생각했다.

이 산에도 수련인이 있을까? 나는 또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구절이 떠올랐다.

“그가 공능으로 동굴을 다 막아 버렸기 때문에”

10시쯤 된 것 같았는데 눈을 떠보니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하나 있었는데 키가 1.8미터쯤 되고 덩치가 컸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고, 나와 불과 1미터 떨어진 곳에서 내가 자고 있던 곳을 천천히 지나갔다. 그는 또한 내 앞의 소나무 가지에 반사되는 불같은 빛을 발했고 그의 발 앞에도 빛이 있었다. 그때 나는 어떻게 사람이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나를 본 적이 없는데,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이상하다?

나는 나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고, 또 진상자료를 이미 숨겨두었다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진상을 알리는 일은 너무 피곤해서 그냥 쉬고 싶었고,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이 잠을 자고 싶었다. 그가 나를 보고 묻는다면, “여기서 자고 있어요”라고 말하자. 나는 그 사람이 두렵지 않아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12시쯤 지나니 너무 추워서 얼어붙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산은 여전히 ​​조용했고 주변도 여전히 조용했다. 그 사람은 왜 나를 보지 못했을까? 나는 사부님께서 나를 보호해 그가 나를 보지 못하게 하셨음을 알았다. 이때 컵을 들고 물을 마시고 싶었는데 컵 안의 물이 얼어붙은 걸 보니 날씨가 아주 추웠다. 얇은 이불을 덮고 이불 밑에 물컵을 넣어 따뜻하게 했다. 그것을 올려서 조금 마셨다. 날이 점점 추워져서 결국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동네 시장에 가서 기름떡 가게를 찾아서 콩국수 세 그릇을 시키고, 기름떡을 시켜 먹었다. 몸을 따뜻하게 한 뒤 시장에 나와 계속 사람을 구했다.

돌아와서 근처에 있는 동수들과 이 문제를 말하자 동수가 말했다.

“그 산에는 원래 여동빈(呂洞賓)이란 선인이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이것은 2023년 초에 있었던 일이다.

아래에 내가 직접 쓴 시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부디 자비로 시정해주기 바란다.

고독행(孤獨行)

낙엽 늦가을 비, 산 마을 가득한 들풀
20년을 떠돌며 홀로 행동하니 법이 몸을 비춘다
팔방에 진상을 알리며 얼마나 고달픈 지 말하지 않나니
정법 사명의 길에서 추위를 이겨내니 봄이 다시 돌아오네

落葉深秋雨 荒草繞山村
流離二十載 獨行法照身
八方講真相 不言困苦深
使命正法路 渡寒再回春

2023년 11월 5일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8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