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대법제자
【정견망】
“구름을 걷어내야 태양을 볼 수 있다[撥雲見日]”라는 성어가 있다. 먹구름을 걷어내야만 태양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마음속에 태양이 있고, 먹구름은 태양을 가릴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과감하게 먹구름을 걷어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천계(天界)에서 세상에 내려왔고 미혹 속으로 들어왔기에 천계의 무한한 빛을 볼 수 없다.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은 서로 싸우고,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가상(假相)이다. 이 가상은 비유하자면 하늘의 먹구름과 같다.
수련에서 먹구름이란 바로 사람을 구성하는 것들이 아닌가? 우리 생존 환경을 구성하는 물질이 아닌가? 우리가 미혹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아(真我)를 찾고 심성(心性)을 승화시켜 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수련이 아닌가? 만약 우리가 세상 모든 것을 담담히 볼 수 있다면 그럼 수련이 아주 쉬워질 것이다.
사람이 개변하기 가장 어려운 것이 관념(觀念)이다. 층층(層層) 아래로 내려가면서 사람은 이미 사람이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면 천지가 주멸(誅滅)한다는 사상 관념을 형성했다. 만약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위해 산다면 그는 바로 신(神)일 것이다. 그는 틀림없이 이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神)이 되고, 다시 신이 되며, 여기서 벗어나려면, 위타(爲他 남을 위함)를 닦아내야 하며 완전히 위타하게 살아야 한다. 어지러운 속세에 살면서 완전히 위타하기란 아주 어렵다.
나는 때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다행히 대법을 얻었고, 주불(主佛)께서 직접 전수하신 제자가 되었는데 내가 또 무엇을 더 바랄 게 있는가? 하지만 수련이란 아주 길면서도 또 짧은 과정이다. 긴 것을 말하자면 진법(真法)을 얻지 못하면 몇천 년을 수련해도 수련 성취할 수 없고, 짧은 것을 말하자면 사부님께서는 몇 년 만에 우리를 수련 성취되게 하셨다. 이 얼마나 성스러운 인연이고 이 얼마나 큰 복분(福分)인가! 나는 때로 생각하는데 지금 수련하지 않으면 또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수천 년에 걸쳐 뼛속까지 형성된 이치는 없애려고 생각한다고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닦아버릴 수 있다는 이런 바람과 확고한 신심이 있다. 법 공부와 법 암기를 통해 나는 사부님께서 나를 위로 밀어주신 것을 느꼈는데 때때로 일종 법 속에 녹아드는 즐거움을 느낀다. 특히 법을 외울 때 법 암송 방[역주: 동수들이 온라인으로 모여 함께 법을 외우는 공부방(背法房間)을 말한다]에서 나는 또 일종 물이 배를 띄우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법 암송 방 동수들은 수련 상태가 아주 좋기 때문에 이 방에 들어오면 그 어떤 나쁜 생각도 할 수 없다. 내가 그 안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정화(淨化)된다. 이 법 암송 방에 있으면 나는 모두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밀어주는 느낌이 든다.
나는 종종 법으로 나의 모든 사상을 가늠해본다. 가끔은 하루에 몇 번이나 사부님께 “사부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제가 왜 또 틀렸을까요?”라고 참회하는지 모른다. 끊임없이 법으로 대조하고 끊임없이 사부님께 참회했다. 매번 참회할 때마다 나는 늘 다음에는 절대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표시한다. 때문에 지금 나는 수련이란 가뿐하고 즐거운 일이라고 느낀다.
불쾌한 일을 만나도 더는 불편하지 않고, 기쁜 일을 만나도 더는 몰래 기뻐하지 않는다. 때로는 표면적으로는 대법(大法)을 위하고 동수를 위하는 것이지만, 깊이 감춰진 자신의 집착을 인식했을 때 나는 몹시 후회한다. 나는 자신에게 물어본다.
“왜 그때는 참지 못했는가? 왜 동수의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하지 못했는가? 왜 선의적으로 표현하지 못했는가?”
여전히 수련이 착실하지 못하고 선(善)이 부족하며 수련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위타(爲他)가 부족한 것이다.
이때부터 위타의 의식이 끊임없이 내 사상 속에 형성되었고 때로 동수가 마치 자아를 찬양하는 것처럼 느낄 때에도 나는 자신을 찾을 수 있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그런 마음을 닦아버릴 수 있는데 우리를 성취 시키는 분은 사부님이시다. 동시에 나는 또 담담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데, 동수에게 정말 사람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수련 과정이며 반드시 제고해 올라가야 한다. 나 역시 이런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한 번 또 한 번 사부님 자비의 위대함을 느꼈고, 내 심성의 작은 변화에도 사부님께서 내게 아주 많은 것을 주셨다. 작년 513 경축 행사를 할 때 항목 협조인이 나에게 발언을 요청했지만 나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왜 늘 나더러 발언하라는 걸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런 사상은 이미 옳지 않다는 걸 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만 나온다. 협조인이 나더러 발언하라고 한 것은 나에 대한 특혜가 아닌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이 폭로되면 그것을 없앤다면 제고해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교류 전날, 경문(經文)을 읽을 때 사부님께서 나더러 발언하라고 점오(點悟)해 주셨다. 나는 즉시 협조인에게 발언하겠다고 했다. 내가 교류하고 나서 원래 아주 오래된 왼쪽 팔뚝의 심한 통증이 갑자기 사라져 좋아졌다. 심성이 제고해 올라 가자 몸의 물질에도 변화가 발생했고 사부님께서 내게 한 덩어리 업력(業力)을 떼어내 주셨다.
다시 한번 내가 무엇을 하든 모두 자신을 위해 한 것임을 느꼈다. 이때 나는 《험악을 멀리하라》에서 사부님의 법이 떠올랐다.
“사부는 당신을 구하는 동시에 또 당신을 대신해 죄업을 감당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온갖 방법을 대어 당신의 죄업을 상쇄해 주고 있는바, 당신이 사부에게 빚진 것이다.”
나는 사부님께 빚진 게 너무 많아서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사부님께서는 다양한 형식으로 우리를 점오해 우리의 집착을 제거해 주신다.
수련이 제고되어 올라가자 항목을 하는 것도 비교적 순조로웠다. 전화를 들기만 하면 나는 마치 무엇이든 다 내려놓은 것처럼 마음속에 더는 잡념이 사라졌고 전화를 걸 때 때로는 대응이 아주 자유자재하다. 우리는 흔히 서로 통화하는 시간이 비교적 길다.
상대방이 아무리 시간을 끌거나 자신을 방어하려고 해도 파룬궁 박해는 집단학살죄이자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장차 법률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는 말을 듣게 된다. 때로는 상대방이 비교적 더 협조적이다. 그들은 자신의 직무 범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노라고 약속한다. 내 생각에 이 생명은 자신을 위해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이다. 나는 마음이 안정적이고 당당하면서도 단호하고 침착하게 말하면 곧 대법의 자비와 위엄을 체현할 수 있고 대법의 지혜를 보여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때로 사부님께서 가장 수고가 많으시다고 생각한다. 사부님께서는 70억 명이 구도 받는 것을 마음에 담아 두시고, 1억 대법제자들이 원만할 수 있을지 마음에 담아두시는데, 우리는 이렇게 느슨한 환경에서 자신의 요만한 수련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니 사부님께 정말 부끄럽다.
앞으로의 수련 중에서 나는 묵묵히 우리 수련 환경을 원용할 것이다. 항목에서 하려는 일이 있으면 나는 묵묵히 완성하도록 협력할 것이다. 나는 때로 주위 사람들이 모두 친근하고 존경스러우며 그들이 모두 사부님의 친인(親人)이자 모두 구도 받아 하늘로 돌아갈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우리를 위해 수련 환경을 제공하니 나는 그들을 선(善)하게 대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내 용량을 확장해서 가급적 빨리 사람 마음, 사람 생각, 사람의 정을 버릴 수 있게 하는 것 같다.
사부님께서는 《홍음 6》 〈남을 제도하고 자신을 제도함은 어렵다네〉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법도(大法徒) 수련 어렵지 아니하나
첩첩 속인마음 곳곳에서 가로막네
상사(上士)는 난(難)을 만나면 웃음으로 풀어내고
중사(中士)는 고비를 만나면 탄연하지 못하며
하사(下士)는 사람마음을 버리지 못한다네
대법이 세상에 전해짐은 극히 비범(非凡)하거니
남을 제도하고 자신을 제도해 원만으로 돌아가는데
몇 사람이 행하고 몇 사람이 말뿐이겠는가
내 생각에 진정으로 사부님의 노고를 이해한다면 그럼 우리는 상사(上士)가 되어야 하며 사람 마음을 제거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제거하지 못하는 하사(下士)가 되진 말아야 한다. 이로써 사부님께 보답해야 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855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