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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사(爲私)’의 뿌리를 캐다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며칠 전 남편이 화장실에 갔는데 아이가 세면대에서 씻고 나오더니 내게 조용히 말했다.

“다음에 아빠가 화장실에 갈 때 문을 닫으라고 해주세요.”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지만 집안일을 마친 후 이 일을 잊어버렸다.

어제 저녁을 먹다가 문득 악취가 나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이고, 악취가 어디서 나지, 정말 참을 수 없군!”

나는 일어나서 여기저기 찾아보았는데 화장실 문이 조금 열려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남편이 문을 닫지 않은 게 아니라 문을 잠그지 않아서 바람에 문이 열린 것임을 알았다.

이때 아이가 웃으면서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엄마가 아빠한테 말을 안 해서 그래요, 엄마는 늘 그래요, 말만 해놓고 약속을 안 지켜요.”

나는 부끄러워 웃으며 대답했다.

“미안해, 냄새는 안 나니?” 원래 아이가 아빠에 대해 뭐라 말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아이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 냄새도 안 나요, 냄새가 나지 않아요.”

이번에는 내가 놀랐다. 분명히 우리 둘이 함께 앉아 있는데 아이가 냄새를 맡지 못한다면, 이것은 분명 나를 겨냥해서 온 것이 아닌가? 이는 나더러 어떤 문제를 닦으라는 것일까? 즉시 안으로 찾아보니 나는 단번에 깊이 숨겨진 ‘사(私)’를 발견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일과 ‘사’는 십만 팔천 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내가 안으로 찾은 것은 바로 ‘사’였는데 내가 이것을 떠올린 이유는 “첫 일념이 자신을 돌아보고, 문제를 생각한다.”(《각지 설법 11》〈무엇이 대법제자인가〉)는 사부님 말씀에 따랐기 때문이다.

이는 사부님께서 점화하신 것으로 사부님께서는 시시각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예전에 나는 남이 하는 말이 자신의 이익을 건드리지 않으면 늘 보거나 듣지 못한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실 “큰 뜻을 품고서도 작은 일에 소홀하지 않으며”(《정진요지》〈성자〉)라는 사부님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한 말을 마음에 새겨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늘 망각하거나 심지어 돌아서면 생각나지 않았다. 직장에서는 그래도 괜찮은데 어쨌든 돈을 벌어야 하니 함부로 잊을 수 없었지만 집에서는 가족들이 뭐라 해도 아예 신경 쓰지 않았다. 나도 아주 답답했는데 나는 왜 이럴 수 있는가? 줄곧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지금 나는 원래 이 ‘사(私)’가 장난을 친 것임을 똑똑히 알았다.

집에서 남편은 모든 일을 다 내게 맡겼고, 또 다 수련인이기 때문에 작은 마찰이 생기더라도 서로 자신을 찾으며 서로 양보해서 모순이 생기지 않았다. 또 아이는 어릴 때부터 수련 환경에서 자라 나를 잘 이해하고 나를 많이 배려해 주며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다. 나도 자식이라고 해서 다 들어주지 않고 수련인의 각도에서 문제를 보면서 그를 많이 이해해 주었기에 모순이 생기지 않았다. 또 시어머니는 어른이니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한 속인이라 여겨 무슨 일이든 그녀와 따지지 않았기에 모순이 더욱 적었다. 이렇게 나의 이 ‘사’는 줄곧 숨겨져 자취를 감췄지만 도리어 줄곧 내가 법을 실증하는 것을 엄중하게 교란해 왔다.

내가 낙오되지 않도록 자비로 점화해 마침내 사를 잡아낼 수 있게 해주신 사부님께 마음으로 감사드린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또 당신들에게 알려주겠다. 사실 당신들 이전의 본성(本性)은 위아위사(爲我爲私)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신들이 앞으로 일을 함에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든지, 어떤 말을 하든지, 역시 남을 위하고 후세 사람을 위하는 데 이르기까지 고려해야 한다! 대법(大法)의 영세불변(永世不變)을 위해 고려해야 한다!”(《정진요지》〈불성무루〉)

나는 내심에 은폐된 ‘사’를 폭로해 단호하게 그것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단지 이 하나의 수련 문제만 하더라도 우주의 낮은 층에서는 대단히 복잡하지만 고층차에 이르면 간단한 것으로 수련이라는 개념이 없으며 오로지 업력을 없애는 개념만 있을 뿐이다. 더욱 높은 층에서 말한다면 모든 번거로움은 단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며, 더욱 높은 층에서는 무슨 소업이요, 무슨 고생이요, 무슨 수련이요 하는 이러한 개념이 없으며 바로 선택이다! 우주의 고층차는 바로 이런 하나의 이치이며, 보아서 누가 되면 바로 그를 선택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이치이다.”(《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사부님께서 나를 선택하셨으니 나는 반드시 사부님을 따라 걸어야 하고, 대법에 동화하는 것을 선택해 우주 정법 중에서 자신을 바로잡아야 한다. 사존의 자비로운 점화에 감사드립니다. 허스!

자신의 작은 수련 체험을 써내어 교류하고자 하니 법에 없는 부분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9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