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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안으로 찾아 자신을 수련

경심(耕心)

【정견망】

저녁에 친구와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내가 말했다.

“네가 이런 수예(手藝)를 할 줄은 정말 몰랐어.”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래, 넌 원래 나를 줄곧 무시했고 늘 나를 얕잡아봤어.”

나는 이 말을 듣고 좀 멍해졌다. 마음이 쿵쾅거리며 굴욕감을 느꼈는데 마치 체면을 손상당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곧 화를 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고험(考驗)이 온 것이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좀 당황했지만 이후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묵묵히 안으로 찾아보았다. ‘나는 줄곧 허영심과 자존감이 아주 강해 남의 굴욕을 견딜 수 없었다. 과거에 누가 나를 이렇게 욕했다면 나는 즉시 목까지 얼굴을 붉히고 상대방과 한바탕 말다툼을 하고는 화를 내며 떠나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것은 수련인의 행위가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필부(匹夫)는 모욕을 당하면 검을 뽑아 들고 싸운다.”(《전법륜》)고 말씀하셨다. 나한 층차에 도달하면 어떤 일을 만나든 모두 마음에 두지 않고 늘 싱글벙글한다. 그럼 내 마음이 은은하게 아픈 굴욕감과 불평하는 원망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선천적인 순진한 본성(本性)인가? 아니면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 업력인가? 교양 있는 속인들도 여전히 높은 자태를 유지하고 일반인과 식견이 같지 않은데 하물며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임에랴?

확실한 것은 자신의 내심 깊은 곳에서 그 어떤 불평, 난감, 치욕, 원망 등등의 느낌은 모두 진정한 자신이 아니고 모두 닦아버려야 할 변이되어 좋지 않은 것들이다. 이 갑작스런 충격은 바로 평소 내게 아주 깊이 감춰져 있던 이런 좋지 않은 마음들을 모두 폭로해 낸 것으로 이 기회를 빌려 그것들을 모두 찾아내 붙잡아 소각해야 한다.

내가 이렇게 묵묵히 안으로 자신을 찾을 때 내심이 더욱 넓어지는 것을 느꼈고 그렇게 답답하지 않았으며 점차 자비심이 나왔고 친구에게도 화내지 않았다. 이 문제에서 그가 나를 한번 수련하게 한 것이고 동시에 우리 두 사람 각자 존재하는 집착심을 모두 폭로한 것이다. 이때 누가 안으로 찾고 자신을 닦을 수 있는지 보는데 한 걸음 물러서면 넓은 세상이니 곧 제고해 올라온 것이다. 만약 표면의 옳고 그름에만 얽매인다면 곧 속인 속에 빠진 것이다.

내가 참아 내자 상대방도 서서히 변했다. 내 표정이 난감하던 데서 서서히 아주 평온해 지는 것을 보더니 그 역시 냉정해졌고 아울러 점점 부끄럽고 후회하는 것 같았다. 왜 뜬금없이 그런 말을 했을까? “한 걸음 물러서면 넓은 세상”으로 모두 제고했는데 만약 함부로 부면(負面)적인 감정이나 악담을 한다면 결과가 어떻겠는가?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道)를 깨닫고 마음을 닦기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비록 당시 표면적으로는 참아냈고 이치상 흉금이 많이 풀린 것처럼 보였지만 내심 깊은 곳은 여전히 아팠고 오랫동안 전처럼 그를 대할 수 없었으며 늘 그를 피하고 싶었다. 설사 그가 먼저 나를 찾아와 대화로 간격을 해소하려 해도 나는 여전히 표면으로만 응대했고 마음의 문은 여전히 닫아두었다.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알았으나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다.

최근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한 단락 법을 보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수호하는 것은 바로 정(情)과 사(私)를 위하고 자신을 위하는 표현이므로 제거하기가 가장 어렵다. 慈悲(츠뻬이)하게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하며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모두 자신한테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설령 다른 사람이 우리를 욕하고, 우리를 때렸을지라도 우리는 모두 자신한테서 찾아야 하는데 자신의 어느 면이 잘못돼서 조성된 것이 아닌지 찾아야 한다. 이런 모순의 근본원인을 찾는 것이 사(私)를 버리고, 자신의 집착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오스트레일리아 법회 설법》)

법과 대조해 자세히 생각해 보니 나는 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수호했고, 남이 나를 인정해 주길 좋아하며, 남이 나를 칭찬해 주기를 좋아하고, 남이 자기를 무시하고 자기를 모욕하거나 자기를 다치게 할까 두려웠다. 모든 것에서 자아가 중심이었고 모두 사(私)와 정(情)에 기초했다. 이는 법에서 요구하는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정진요지》〈불성무루〉)는 것과 상반되지 않는가? 마음이 자아로 가득 찬 사람이 어떻게 자비심이 있을 수 있겠는가? 소위 높은 자태란 사실 눈속임이다. 근본적으로는 여전히 자신이 옳고 남은 그르다고 생각했고, 서로 옳고 그름을 가지고 다투었으며 무사무아의 홍대(洪大)한 자비로 서로 간의 옳고 그름을 포용하지 못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말하자면 나는 정말 옳지 못한 곳이 있었다. 즉 예전에 정말로 자신의 표준으로 그를 가늠하고 무시했으며 그에게 단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진심으로 그의 장점을 알아주지 않았는데,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을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대하지 않았다. 이것은 확실히 무의식중에 다른 사람의 자존감에 상처를 준 것이다. 만약 입장을 바꿔 누군가 나를 무시했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비록 표면적으로는 아무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사람의 사상 염두는 정말로 진실한 물질 존재다.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말씀하셨다.

“과거의 승려는 이런 것들을 아주 중하게 보았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을 움직이기만 하면 곧 업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신(身)ㆍ구(口)ㆍ의(意)’를 말했다.”(《전법륜》)

자신이 무의식중에 남을 해쳐 많은 업을 지은 것을 생각해 보라. 어찌 뻔뻔하게 남이 나를 모욕했다고 할 수 있는가? 또 무엇에 근거해 남을 원망한단 말인가? 내심 깊은 곳의 은은한 통증은 자사(自私)와 다정(多情)이 아닌가? 허허! 이유 없는 재앙이란 없고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하는데 단지 자신이 이전에 자사(自私)하고 무지했음에도 여전히 억울하다고 여긴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9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