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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목소리”와 “격앙된 표현”

해외 대법제자

【정견망】

나는 전에 말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부러워하곤 했는데, 좋은 단어나 구절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다보니 내 말주변도 점점 좋아졌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하는 말을 듣는 것을 좋아했고 나도 이를 꽤 즐겼다. 한번은 큰 모임에서 발언한 한 후 ‘칭찬’을 좀 받자 득의양양해졌다.

나중에 또 다른 큰 모임에서 내가 발언할 때 문자 메시지가 와서 또 ‘칭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해결해야 할 번거로운 문제임을 알게 되었고 “멋대로 상상한” 자신에 대해 조소를 금치 못했다. 그날 밤 나는 육체적으로 매우 견디기 힘들었고 또 과시심에 환희심이 더해져서 불러온 마난(魔難)임을 알았다.

큰 목소리로 말하기

나는 동수들과 교류할 때 청산유수로 말한다. 그런데 때로 ‘큰 목소리로 말하고’ 싶은 순간, 상대방이 갑자기 내 말을 끊는 경우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졸린다면서 잘 자라고 하거나 또는 다른 할 일이 있다거나, 또는 주제를 바꾸고 싶어 하는 등등이다. 이럴 때 나는 매번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맥이 빠짐을 느꼈다.

점차적으로 나는 “큰 목소리로 말하는” 배후에 수많은 사람 마음이 있음을 깨달았다. 우선 자신의 과시심을 드러내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말 잘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큰 목소리로 말하면” 찬사를 얻기 쉽다. 하지만 이는 단지 공짜로 얻는 ‘명성’이 아닌가? 이어서 희희낙락하며 뿌듯함을 느끼는데 이는 환희심이 아닌가?

나는 원래 말주변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진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암암리에 ‘명성’을 추구한 노력의 ‘성과’였다. 이 ‘성과’는 무슨 멋진 장식이 아니라 단지 명성을 구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가? 사실, 이런 것을 참고 쓰지 않는 것이 “명성 추구”를 내려놓는 일종의 노력이다.

비록 말재주를 쓰면 ‘명성’을 얻기 쉽고, 당장은 아무런 후과(後果)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법(法)에서 내가 이해한 것은 공짜로 얻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사실 공짜가 아니며 모두 덕(德)으로 교환해야 한다. 즉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헛된 명성은 실질적인 행복을 가져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수련 제고는 더욱 가져올 수 없고 이는 오히려 계율을 어기는 것이다(과시심과 환희심이 생긴다). 이는 자신의 공간장에 패물(敗物)을 더하는 것에 해당하는데 그야말로 너무나도 손해 보는 ‘거래’다.

지금 나는 기본적으로 “큰 목소리로 말하기”를 중단했다. 가끔 여러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다 보면 뭔가 요점이 없는 것 같고, 내가 ‘고견(高見)’을 발표하면 반드시 ‘놀라며 나를 흠모’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느낌은 정말 간질간질하지만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수구(修口)와 수심(修心)의 가치는 헛된 명성이 가져다주는 영광보다 훨씬 가치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격앙된 표현

얼마 전 어느 이른 아침, 갑자기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고, 나는 그것을 단번에 이해했다. 이 단어는 특히 지난 몇 년간 나의 습관적인 표현방식을 아주 정확하게 표현했는데 바로, ‘격앙된 표현 방식’이다. 이 점을 똑똑히 이해하고 난 후 나는 이 방식이 많이 타파된 것을 느꼈는데 마치 간파된 후 폭로된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이런 방식이 얼마나 가소로우며 배후는 당(黨) 문화로 사람이 정상인이 말하는 그런 말이 아님을 알았다.

이런 방식에선 내심이 평화롭고 안정되기가 어렵고 반대로 격동되거나 동요하기 쉽다. 말을 꺼내기만 하면 쉽게 비분강개하거나 ‘큰 원칙’을 사용해 남을 끌어올리려 한다. 물론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고 또 내 말이 아주 도리가 있다고 여긴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데 이것이 바로 “과도하게 힘쓰는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선정”성이 있다. 이렇게 말을 해야만 만족스럽고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옳지 않다.

전통문화에서는 ‘평온(平)’을 중시해서 말하는 것도 차분하며 심태가 담담하며 말투도 자연스럽고 인간적이다. 도리를 따지는 것 역시 평화롭게 한다. 하지만 당 문화는 ‘높이(高)’를 추구하고, 말하는 것도 격앙되며 거창하다. 심태도 거만하고 ‘겉만 번지르르해서’ 일상적인 화제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높이’ 말하고 강렬한 말투가 더해지면 분위기를 과장하거나 사람을 흥분시키며 심지어 극단적으로 만들 수 있다. 또는 듣는 사람이 반감하거나 저촉하게 만들 수 있다. 어느 쪽이든, 다 사람의 정서를 이지적이고 냉정하게 만들기보다는 더 강렬하게 만든다.

비유를 들어 보자. 개인적으로 나는 전통문화의 역할은 ‘차(茶)’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차를 아는 사람들은 “담담하면서도 오래 가는 맛”의 오묘함과 차가 사람을 차분하게 해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반면 당 문화는 ‘술(酒)’과 같은데 일시적인 흥분과 즐거움을 주지만, 과음하거나 취한 후에는 후유증이 남고 사람을 자극해 차분하지 못하게 만든다. 전통문화가 사람을 ‘평온’하게 만든다면, 당 문화는 사람들을 ‘끌어올린다.‘

사실, 생각해 보면 ‘격앙된 표현’ 방식은 노력과는 상관없이 별로 효과적이지 않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본성에 의해 거부당해 누구도 이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감정을 선동해” 한 차례 ’수확‘을 얻는다 해도 실제로는 소통 효과가 좋지 않다. 반면 평화적인 소통 방법은 힘도 덜 들고 효율적이며 풍부한 지혜가 있어 흔히 가볍고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왜냐하면 우주 특성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음악과 미술 창작회 설법》〈음악 창작회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평화로운 상태야말로 바로 선(善)한 것이고 사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람의 상태이다.”

당 문화는 사람들의 사상과 언행이 자신도 모르게 이상하고 왜곡되게 만든다. 나는 몇몇 동수들이 하는 말이 듣기 싫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의 말을 격정적으로 표현했고 늘 감정이 고양되어 있었다. 마치 평화로운 방식이 아니라 격정적인 방식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것은 자신의 거울이었다.

몇 년 전 내가 말하는데 어떤 사람이 마치 소리를 지르는 것 같고 너무 격동적이고 초조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나중에 나는 말투를 낮추고 속도도 느리게 하는데 주의했는데 힘을 많이 줄였다. 표면 형식은 좋아졌지만 나는 여전히 모종의 ‘격앙’된 요소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평범한 말은 익숙하지 않고 뭔가 ‘격정’적인 말이 있어야 힘이 있고 정진하는 것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런 힘은 정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 문화에서 근원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수련에서 심성이 더 높아질수록 좋지만, 다른 일부 방면도 따라서 높아져선 안 된다. 가령 높은 목소리, 오만, 격앙 등 이런 것들은 모두 당 문화가 가져온 폐단들이다.

나는 또한 자신을 ‘자조(自嘲)’해서 걸핏하면 격동했다. 그것은 정말이지 틀이 너무 작아서는 안 되며, 시야가 너무 좁아서는 안 된다. 식견이 많다고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나는 또한 진정으로 식견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사회적으로 ‘견문이 넓은’ 사람이 아니라 마음속에 전통문화가 풍부한 사람임을 발견했다. 전통 이야기를 보면 일부 글을 모르는 부인들에게도 식견이 있고 시야가 있다. 부유함[富]은 표면이 아니라 내심을 보아야 하며, 허영이란 내심이 공허하기 때문에 비로소 밖으로 구하는 것이다. 즉 자신을 자랑해 남의 칭찬을 받고 남에게 아첨해 남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니 가련하고 불쌍하지 않은가!

“잘 격앙하면” 법을 실증할 수 없으며 또 쉽게 사람을 밖으로 밀어낼 수 있다. 내게는 한 가지 교훈이 있는데 전에 한 서양인 친구와 여러 차례 소통하다 연락을 중단한 적이 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소통에서 나의 표현 방식이 좀 성급하고 자연스럽지 않았으며, 충동과 격동이 있었다. 나는 당시 문제임을 몰랐지만 남들은 아마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또 한 동수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그녀의 한 속인 가족이 동수를 만난 후 일부 사람들이 너무 쉽게 격앙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속인은 성격이 온화하고 차분한데 아마 걸핏하면 격동하는 성격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결론

일부 수련에 소질이 있는 동수들은 다년간 모두 묵묵히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다. 주의 깊게 관찰하고 생각해 본 결과, 나는 그들이 모두 아주 지혜롭고 침착하고 차분하며 내심이 아주 “명확”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데 세속에서 추구하는 것은 사실 쓰레기와 같고 떠가는 구름일 뿐임을 안다.

이 동수들은 대화가 순수하고 솔직하며 과장하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내가 보기에 그들은 실제로 묵묵히 “차를 음미”하는 즐거움을 알기에 떠들썩하게 함께 “음주”하는 자극과 도취를 좋아하지 않는다. 많은 관련 원칙을 정리한 후 나는 이 동수들의 가치와 지혜를 점점 더 깨달을 수 있었다.

이상은 개인의 작은 수련 소감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98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