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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真)’에 대한 작은 깨달음

상진(尚真)

【정견망】

역사서에서 ‘진(真)’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최초의 기록 중 하나인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진의 뜻에 대해 “진이란 선인의 모습이 변해 하늘로 오르는 것이다[眞,仙人變形而登天也]”라고 했다.

‘眞’은 匕+目+乚+八 4부분으로 구성된다. 맨 위의 ‘비(匕)’에는 변화의 뜻이 있다. ‘목(目 눈)’은 수도하는 사람에게 한 쌍의 혜안(慧眼)이 생겨 세간의 일체를 꿰뚫어 보고 생명의 진리를 깨달은 것을 말한다. 또 ‘은(乚)’이란 고대에 수도인이 사용하던 앉는 도구이고 ‘팔(八)’은 도인이 수련 성취한 후 하늘로 날아갈 때의 운반 수단이다.

즉 고문(古文)에서 ‘진(眞)’자의 본래 뜻은 수도인이 길고 간고한 수련을 거쳐 혜안을 갖춰 원만해서 날아 올라가 진인(真人)으로 수련 성취한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보면 이 ‘진(真)’은 고대에는 수련 및 신선이 되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대법수련에서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주의 ‘진선인(真善忍)’ 특성에 따라 수련할 것을 요구하시는데 ‘진’은 또 우주 특성 중에서도 첫 번째 특성에 해당한다. 그러면 수련과 원만 이외에 이 ‘진’은 대법 수련자에게 또 어떤 심오한 내함(內涵 안에 담긴 함의)을 지니는가?

대법제자로서 필자는 줄곧 생각해 왔다. 어떻게 수련해야만 ‘진(真)’할 수 있는가? ‘진’이란 대체 무엇일까? 사람의 층면(層面)에서 볼 때, ‘진’은 바로 “진솔, 순진, 성실‘ 등 사람 이치의 아주 얕은 층의 뜻에 부합한다. 그렇다면 우주 대법 중에서 ‘진’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층의 내함과 제자들이 완전히 깨닫지 못하는 법리가 있을까? 나는 아주 오랫동안 고민해 왔지만 정확한 답은 찾지 못했다.

한번은 사색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먼저 속인 중에서 ‘진’로 구성된 단어들을 살펴보자! 언뜻 보기에는 중요해보지 않았지만 ‘진’ 배후에 대해 더 심층의 깨달음을 많이 얻었다. 여기서 ‘진’으로 구성된 단어들을 한번 살펴 보자.

“진리(真理),진주(真主 진정한 주인),진상(真相),진심(真心),진제(真諦),본진(本真),진언(真言),진불(真佛),진도(真道),진정(真正),진지(真知) 등등.”

이 모든 단어 조합이 우리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는 것은 바로 ‘진’은 우선 천리(天理)와 관련이 있는데 아울러 가장 높은 천리와 관련이 있다. ‘진’이란 이 천리는 어떤 구체적인 요구와 대응하는가? 어떻게 해야만 천리에 부합할 수 있는가? 제자는 문득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실재로 《전법륜》에 존재하는 것을 깨달았다. 법에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제자들의 마음 수련에 대한 요구는 모두 어떻게 해야만 ‘진’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해야만 ‘진’을 해낼 수 있는가 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모두 대법의 요구에 따라 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진에 도달’할 수 있다.

다시 《전법륜》을 들었을 때 마치 자신이 천서(天書)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책 속에 가득찬 것이 ‘진리(真理)’였고 글자마다 주옥과 같았으며 구절마다 천기였다! 상상해 보라. 수련인이 천기를 읽을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면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빛나는 일인가? 돌이켜보면 나의 이전 법 공부는 자신이 마주한 법 속 매 한 글자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것으로 실로 부끄럽기 그지없다.

법 공부 태도를 단정히 한 후, 나는 ‘진(真)’의 경지는 아주 높아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고, 멀기로는 끝이 없으며, 광대하기가 비할 바 없음을 느꼈다. ‘진’은 ‘선(善)’을 지닌 ‘진’이고 ‘인(忍)’을 지닌 ‘진’이다. 무수한 ‘진(真)’을 공부한 후, 나는 마치 막 구름을 걷어내고 속인은 영원히 그중 일부마저도 엿볼 수 없는 최고의 우주 진리, ‘진선인’의 일부를 본 것 같았다.

나는 깨달았다. 불선(不善)은 진(真)이 아니며, 불인(不忍)은 진(真)이 아니고, 그 어떤 사심(私心)도 모두 진이 아니다. 진정한 ‘진’은 완전히 중생을 위한 것으로 무사무아(無私無我)해서 신우주 최고표준에 부합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과 사물에 대해 악념(惡念)을 일으킬 때면, 우리는 이미 천리에서 아주 멀리 벗어난 것이다. 즉 ‘진선인’에서 벗어나고 수련 원만하는 길에서 벗어난 것이다. 원만해서 공을 이루려면 오직 한 가지 길뿐인데 그것은 바로 시시각각 일사일념(一思一念)에서 모두 위타(爲他)한 것이다.

자신을 위하는 것이 전혀 없어야 하며 마음 속에 오직 중생에 대한 책임과 자비만 있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이런 개념이 갈수록 담담해지고 허무(虛無)해지는데 중생이 바로 내가 된다. 내가 보고 듣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 내 세계를 구성하니 바르지 못한 일체를 보았다면 곧 우리 자신의 세계를 바로잡을 때다. ‘진선인(真善忍)’으로 일체를 바로잡고 일체 중생에 대해 자비로워야만 비로소 진정한 ‘진(真)’이 될 수 있고 진정한 정(正)이 될 수 있으며 진정한 좋음과 진정한 선(善)이다.

아직 많은 집착과 닦아 버려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에 사부님께서는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과 사물을 세심하게 배치하시어 그것들을 이용해 우리를 성취하게 하시는 동시에 우리더러 대법으로 그들을 자비롭게 구도하게 하셨다. 그들이 모두 구원되면, 주위의 모든 것이 다 바로잡히는데 우리는 자연히 수련을 잘하게 되고 닦은 것이 바르고 진(真)하게 된다.

‘진’에 대한 깨달음은 나로 하여금 다른 문제를 보게 했는데 바로 안으로 찾는 기점이다. 예전에 안으로 찾음은 늘 자아를 기점으로 했고 남과 모순이 생기면 안으로 찾아 자신에게 질투심 또는 쟁투심 또는 남을 무시하는 마음 등이 있음을 안다. 그런 후 스스로에게 이런 마음을 닦아버려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내가 모순이 생긴 후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에서 상대방을 고려하는 기점으로 바꿨을 때 상대방의 행동은 모두 그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임을 발견했는데 그럼 사람의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오직 상대방을 위하는 각도에서 이 일의 해결 방법을 고려한 것이 아닌가? 만약 자신을 상대방으로 여긴다면 어찌 모순이 생길 수 있겠는가?

내가 없으면 나와 상대방의 구별이 없고 우리 공간장에는 단지 공동의 바람만 있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하면 내가 아니라 그에게 더 좋은지다. 우리가 기점을 전환한 후에는 모순이 아예 생길 수 없다. 아울러 우리의 일체 위타(爲他)한 행동은 상대방에게 ‘진선인’의 위대함을 볼 수 있게 한다. 찾아낸 문제의 근원은 그것이 표현되어 나온 것이 쟁투든 질투든 모두 자사(自私)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런 사(私)의 뿌리를 뽑아내면 지엽적으로 나타나는 집착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이다.

‘진(真)’의 구체적인 함의를 깨달은 후, 다시 자신의 집착을 되돌아보고 다른 인식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 전에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다른 사람을 평가하곤 했다. 나중에 나는 또 수구를 못했으니 다음에 주의해야 함을 알았다. 하지만 늘 고치지 못했다. 마치 말을 할 때, 이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할 시간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무엇이 진인지 사고했을 때 위타한 각도에서 어떻게 더 잘 수구할 수 있는지 생각하면서 문제 발견과 문제 해결 방안이 완전히 달라진 것을 발견했다.

만약 남에 대해 책임지는 각도에서 보자면 한 수련인이 소문으로 들은 소식을 다시 퍼뜨리거나 과장해서 말할 때면 이는 무책임한 표현으로 무의식중에 업을 짓는 것이자 우리가 담론하는 사람에 대해 자신의 판단 결과를 고정하는 것이 아닌가? 좋든 나쁘든 속인의 일생은 모두 신(神)이 배치한 것으로 우리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공능을 사용해 다른 신의 배치를 교란해선 안 된다. 속인의 운명을 이렇게 개변하는 것이 옳을 수 있겠는가? 다시 우리의 평론에 무슨 근거가 있는지 말한다면 우리는 일 자체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직접 조사하고 연구해 보았는가? 우리는 무엇에 근거해 함부로 결론을 내리는가! 업을 짓는 중에 자신의 질투심과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을 뒤섞고 더욱이 남을 무시하고 큰일을 만들어내려는 사악한 마음 씀씀이가 있는 것이다.

그럼 중생에 대해 책임지는 각도에서 볼 때, 수구(修口)란 조금도 어렵지 않다. 직장에서 반드시 해야 할 객관적인 평가 외에, 속인의 그 어떤 추측과 소문에 대한 평가는 모두 업을 짓는 것이다. 국가적으로나 국제적인 큰일은 우리 수련과 아무 관련이 없다.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것과 관련된 소식은 명혜망에서 다 볼 수 있다. 오직 이런 소식들만이 우리와 관련이 있으며, 인간 세상에서 한창 발생하거나 또는 장차 발생할 일은 사부님께서 모두 법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다.

진지하게 법을 공부한 제자들은 이미 미래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고 있다. 이미 정법은 반드시 성공하고 사악은 반드시 복멸(覆滅)됨을 알고 있다. 지나치게 사태의 발전 과정 속의 세부 사항을 알려고 함은 호기심이고 일 만들길 좋아하는 마음이자 적막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해진 집착일 뿐이다. 이는 사부님을 도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것에 대해 교란 작용을 해서 구세력의 흑수가 틈을 타서 정법 노정을 저애하게 만든다. 만약 이 이치를 똑똑히 안다면 우리는 뉴스에 대해 흥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또 남을 평가하는데 흥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

속인과 어울릴 때 대화 주제는 단지 속인이 흥미를 갖는 정면(正面)적인 화제여야 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니, 이를 멋대로 연장하거나 이용해서 함부로 과시하거나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나 일에 대해 오직 정면적인 각도에서 보아야 하며 오직 사람의 적극적인 일면만을 보고 말하며, 원망하지 말고, 비웃지 않으며, 불만이 없어야 한다. 또한 굳이 화제를 찾아 대화할 필요가 없고 할 말이 없으면 가서 법을 공부하면 된다. 당신과 내가 뜨겁게 주고받는 한마디 말이 업(業)을 많이 짓고 있음에도 자신은 모르고 동시에 또 환희심 속에서 사악한 마의 흑수를 자양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이 조금 전에 형용한 이 단어들 중 한마디를 아주 잘 말했는데 바로 ‘평화롭다’는 것이다.”(《음악창작회 설법》)

내가 깨달은 것은 수련인으로서 일상생활 속의 일체는 다 대응이 있는 것으로 일에 부딪혀 격동하지 말고 흥분하지 말아야 하며 함부로 말하며 분위기를 떠벌리지 말아야 한다. 마음이 물처럼 담담하고 평화로우며 적극적이고 선량하게 모든 사람과 일을 마주해야 한다. 이런 상태야말로 대법제자가 말로 교류할 때 마땅히 있어야 할 진이다.

이것은 단지 수구라는 이 하나의 문제에서 진으로 발견한 문제를 가늠하는 것이다. 수련의 다른 방면에서 진을 사용해 자신을 한번 점검하고 조사해보면 분명히 가장 바닥층에 숨겨진 집착이 무엇인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진’에는 또 보다 많고 깊은 내함이 있고 또한 우리가 법을 공부하고, 사고하며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진일보의 깨달음과 교류가 있을 것이다. 대법을 학습하면 할수록 대법은 너무나도 심오함을 느끼는데 표면적으로는 간단한 말처럼 보이지만 배후에는 무궁하고 거대하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내함이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07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