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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기”에서 생각난 것

산우(山雨)

【정견망】

가장 간단한 식사라면 한쌍의 젓가락에 밥 한 사발이다. “밥 먹기(吃飯)”는 사람들이 날마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평범한 일과 중 하나다. 최근에 나는 법에서 문득 깨달았는데 이는 神이 사람들에게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곧 늦게 된다”는 경고의 말씀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인간 세상의 ‘밥’을 빨리 먹으라는 뜻이 아니다. ‘밥 먹기(吃飯)’의 흘(吃)은 ‘고생을 겪음(吃苦)’의 흘과 같은 단어다.

[역주: 吃飯에서 飯=食+反인데 飯과 反의 중국어 발음이 비슷하다. 또 젓가락을 뜻하는 쾌(筷)는 빨리라는 뜻의 쾌(快)와 발음이 같다. 이를 조합하면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다는 ‘筷吃飯’이 빨리 돌아가라는 ‘快吃反’과 발음이 비슷하다. 또 밥그릇을 뜻하는 완(碗)은 늦는다는 뜻의 만(晩)과 중국어 발음이 같다. 즉 “젓가락으로 밥그릇에 담긴 밥을 먹는 것”이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늦는다”는 뜻과 서로 통한다.]

“밥을 먹으면(吃飯)” 사람이 작은 데서 크게 성장할 수 있다. ‘소화(消化)’ 과정은 밥이란 이런 ‘반물질(反物質)’을 자기 신체의 일부로 만드는 동화(同化) 과정이다.

“고생을 겪으면(吃苦)” 수련자의 층차를 제고하고 용량을 확대할 수 있다. ‘소업(消業)’ 과정은 우주 특성에서 벗어난 업력이란 물질을 덕(德)으로 전화하는 과정이자 또한 공(功)으로 연화해 자기 신체(神體)의 일부분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반드시 심성 제고가 동반되어야 한다.

한 속인이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많은 고생을 겪으면 그를 괴롭힌 사람은 그에게 덕을 주고 그 자신의 업력(業力)도 덕으로 전화한다. 이때 그의 신체에서 덕이란 물질이 많아지면 생명이 곧 성장하고 커진다. 그러나 속인은 세간에 미혹되었고 또한 많은 고생을 겪었기 때문에 감당하지 못하고 더는 고생을 겪고 싶지 않다는 염두가 나온다. 가령 ‘노력분투’를 통해 편안히 살고 싶다거나 심지어 그를 해친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하거나 보복하려 한다. 이렇게 고생스레 바꿔온 덕을 다시 잃으면 생명은 다시 작아진다. 기나긴 윤회 속에서 생명은 끊임없이 선(善)과 악(惡) 사이에서 선택하고 있다.

수련인은 천리(天理)를 알기에 고생을 낙으로 삼는다. 끊임없이 법을 공부하고 마음을 닦음으로써 고생을 겪으면 소업하는 능력도 신체와 마음의 용량에 따라 증가한다. 많은 대법제자들이 99년 7월 이전 개인 수련 단계에서는 층차 돌파가 아주 빠르고 또 쉬웠다. 여기에는 사부님의 감당 외에도 또 한가지 이유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애초 층층(層層) 아래로 내려 가면서 줄곧 고생을 겪어 왔고, 특히 삼계에서 생생세세 윤회하면서 고생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가령, 개인 수련에서 수련자가 제1층 우주를 돌파했다면 제2층 우주를 향해 돌파하고 있다. 이 과정은 일반적인 생명에게는 거의 불가능하며, 설령 가능하다 해도 그것은 대단히 긴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정법(正法)이란 이번 일 중에서 사부님께서 체계적으로 배치하셨고, 대법제자는 본래 고층차에서 왔으며 또한 나쁘게 변해서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래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제2층 우주와 제1층 우주에서 모두 많은 고생을 겪었기에 일찌감치 이런 기초를 다졌다. 때문에 법을 배우고 연공하기만 하면 층차 돌파가 지극히 빠를 수 있었던 것이다. 아주 짧은 시간에 사부님에 의해 공(功)이 제 위치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99년 7월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나는 고생을 겪고 소업하는 각도에서 갑자기 난이도가 몇 배나 증가한 것을 발견했다. 원인은 대법제자들이 각자 자기 체계의 중생을 구도하기 시작하면서, 아래에서 위까지 매 한 층마다 아래로 가면서 인연을 맺었던 모든 중생들을 대신해 일부 업력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런 한 마디 말이 있다. “대법은 끝없는바(大法無邊), 당신의 그 마음에 의거해 수련해야 하며, 당신이 얼마나 높이 수련할 수 있는가는 완전히 당신의 인내력과 고생을 견뎌내는 능력에 달렸다.” 당신이 자신의 백색물질을 다 썼다면 당신은 고생을 통해 자신의 흑색물질 그것도 백색물질로 전화(轉化)할 수 있다. 그래도 모자라면 친척이나 친한 친구의 것을, 그는 수련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그를 대신하여 죄를 감당함으로써 당신은 역시 공이 자랄 수 있는데, 이것은 극히 높은 층차로 수련한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한 속인이 수련함에 당신은 친인(親人)을 대신해 죄를 감당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큰 업력으로는 일반인은 수련 성취하지 못한다. 내가 여기에서 말한 것은 부동(不同)한 층차의 이치다.”(《전법륜》)

내가 이해하기에 대법제자는 일반적인 생명이 아니며, 층층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매 한 층의 중생과 모두 인연을 맺었고, 매 한 층마다 친지들이 있는데, 아래에서 위로 가는 정법 수련 중에서 매 한 층마다 모두 애초 인연을 맺었던 중생들을 대신해 일부분 업력을 감당해야 한다. 물론 이는 단지 사부님께서 모든 우주 중생을 대신해 업력을 감당하고 우리가 마땅히 감당하도록 남겨주신 작은 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비록 사부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대부분을 감당하셨지만, 우리 자신에게 남기신 이런 작은 부분의 업력임에도 업애기란 대단히 어렵다. 만약 우리가 법 공부를 중시하지 않고 심성이 정법 노정에서 요구하는 우리가 마땅히 도달해야 할 위치에 도달하지 못하면 감당 능력이 크게 부족해진다. 그럼 마치 한 평범한 속인이 은하계와 같이 거대한 그런 업력을 마주하는 것과 같아 단번에 훼멸될 것이다. 만약 사부님께서 줄곧 우리를 보호해 주지 않으셨고, 또 우리를 대신해 본래 우지 자신이 감당했어야 할 업력을 감당해 주지 않으셨다면, 아마 우리 대부분의 대법제자들은 일찌감치 훼멸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충분히 성공할 수 있도록 또한 최대한도로 중생을 구도할 수 있도록, 사부님께선 이미 우리를 대신해서 너무나 많고 많은 것을 감당하셨다. 그러니 우리 대법제자에 대해 말하자면 수련 중에서 ‘고생을 겪음’은 정말로 대단히 좋은 일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1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