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약(雨弱)
【정견망】
아마도 필자의 어린 시절 경험과 관련이 있거나 생생세세(生生世世) 윤회의 각인이 너무 깊기 때문이거나 또는 구세력이 내 성격에 간계를 부렸을지 모르지만 나는 죄책감에 빠지기 쉬운 사람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 특히 어머니는 나를 억압했는데, 늘 무슨 구실을 항상 찾아 나를 부정하고 질책했다. 때문에 나는 어머니를 보기만 해도 초조하고 두렵고 불안해졌고 내가 무슨 일을 잘하지 못해 질책당할까 두려웠다(실제로는 전혀 잘못한 일이 없거나 심지어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 나중에 수련하고 나서 더는 질책에 맞서 따지거나 울면서 하소연하거나 다투진 않았지만, 내가 완벽하게 하지 못해서 어머니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고 자책하면서 뭔가 알 수 없는 ‘죄책감’이 줄곧 존재했다.
나중에 결혼한 후 남편의 비난은 어머니보다 더 심했고 때로는 아주 사소한 일 때문에 내게 소리를 지르고 극도로 모욕하고 비하해서 내 마음이 두려움과 불안 및 죄책감으로 가득 차게 했다. (사실 나는 속인 중에서 일이며 능력, 외모 모두 그보다 못하지 않다) 나는 늘 자책하는 죄책감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렇게 수년 동안 나는 ‘죄책감이’ 비록 나를 극히 고통스럽게 했지만 이를 용인해 왔다. 이런 종류의 자기 비난과 자기 공격, 자기 부정을 안으로 찾는 것이라 착각했고 자신을 찾으며 수련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히려 자신이 수련에서 제고하거나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사존의 점화와 법 공부를 통해 나는 ‘죄책감’은 결코 ‘안으로 찾음’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죄책감에 대한 심리학적인 정의는 “실제 또는 상상으로 지은 죄와 잘못에 대한 책임 때문에 강렬한 불안감과 수치와 죄책감에 대한 감정적인 경험”을 말한다. 명백히 말하자면 죄책감은 사실 일종의 원한심(怨恨心)이다. 단지 그 원한이 자신을 겨냥해,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을 미워하며 자신을 공격할 뿐이다. 이는 안으로 찾음이 아니라 일종의 강렬한 집착이었으나 나는 줄곧 이를 몰랐다.
어떤 일 때문에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탓할 때 나는 이는 원한심임을 의식하고 사상에서 그것을 배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일 때문에 내심으로 자신을 탓할 때는 이 역시 원한심이며 자신을 원망하는 마음임을 깨닫지 못했다. 이런 자책과 불안은 자신의 의지를 파괴하고 사람을 절망에 빠뜨릴 수 있다.
미국의 과학자 데이비드 호킨스는 인체 의식의 에너지 수준에 순위를 매겼는데, 그중 가장 낮은 수준(부정적인 에너지가 더 크다는 의미)은 ‘분노’와 ‘두려움’이 아니라 수치심과 죄책감이었다. 죄책감의 에너지 레벨은 30인데 그는 무의식적인 죄책감의 에너지 레벨이 죽음에 가깝다고 보았다.
사존께서는 《오스트레일리아 법회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교회로 걸어 들어가면 매우 공손한 마음으로 그들의 주(主) 예수를 향해 참회하면서 어디가 틀렸고 잘못했으며 이후부터 잘하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후의 행위에서 그는 좀 더 잘하게 된다. 그 다음에 잘못을 발견하면 다시 참회하고 다시 더욱 높은 표준에 따라 하게 된다.”
나는 죄책감은 주로 과거에 대한 후회와 자책의 일종이지만, 참회는 실수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반성과 교정을 통해 미래를 적극적으로 대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비록 두 가지 심태 모두 과거에 대한 인식과 관련이 있지만 참회는 자기 반성과 교정을 통해 자아를 제고하는데 중점을 두는 반면, 죄책감은 자기 비판과 자기 비난에 더 중점을 둔다.
안으로 찾아서 참회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찾은 후 고쳐서 다시 잘하면 된다. 하지만 죄책감은 단지 자신을 탓하고 자신을 원망하며 자신을 공격하는 것으로, 이는 일종의 집착이자 일종의 당문화(黨文化)다. 자신을 탓하는 데 습관이 된 사람은 습관적으로 남도 탓하는데, 원한심을 없애기 어려운 원인이 여기에 있다. 사존의 점화에 감사드린다.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1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