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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감’을 말하다

대법제자

【정견망】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불교 중에서는 인류사회의 모든 현상이 모두 환상이고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 어찌하여 환상인가? 이 확실하고 확실하게 거기에 놓여 있는 물체, 그것을 누가 가짜라고 할 수 있는가? 물체가 존재하는 형식은 이런 것이지만, 그것의 표현 형식은 도리어 이런 것이 아니다.”(《전법륜》)

현재 층차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인류라는 이 공간은 환상(幻象)에서 온 것이고, 우리 한 쌍의 육안은 단지 환상 속의 장면만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장면은 가상(假相)이며, 육안으로 본 이 공간의 물체는 마치 진실하게 존재해 만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물질이든 모두 양면성(兩面性)이 있어서 어떤 물체든 모두 다른 공간과 대응한다. 삼계(三界)는 우주의 쓰레기장이자 우주에서 가장 낮은 공간이라 이렇게 본다면 사람 이쪽 공간의 일체는 다 다른 공간의 요소가 대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계는 환상일 뿐만 아니라 또 미혹의 공간이고, 삼계는 반리(反理 반대되는 이치)이며, 우리는 인류라는 이런 가장 낮고, 가장 나쁘고, 가장 좋지 않은 공간에서 수련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가 정진하지 못하도록 층층 가로막는 것이 바로 관념과 업력이며, 관념을 전변하면 사람의 한 층 껍질이 벗겨지는 동시에 업력도 없어진다. 그렇다면 관념이란 무엇인가? 내가 깨달은 것은 관념이란 바로 사람이 집착하며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사(私)를 위해, 우주 특성을 위배해서 끊임없이 축적한 변이 물질이다. 이 변이 물질은 또 다른 공간에서 살아 있는 것으로 부동한 시기에 뛰쳐나올 것이다.

전에 누군가 “존재감을 드러내라(刷存在感)”라는 말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왜 존재감을 드러내야 하는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중시 받으려는 것으로 이런 감각이 있어야만 존재감이 있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남에게 맡기는 것이다. 마치 남들이 인정해야만 사는 것이 가치가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이런 생각은 아주 불쌍한 것으로 남들의 평판과 인정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런 생각이 없는가? 사부님의 설법에 대조해 법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을 찾아보니, 잠재의식 속에서 남의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만약 누군가 나를 무시하면 마음이 불편한데 때로는 남들이 자신을 중시하도록 마성을 폭발하기도 한다. 목적은 바로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존재감을 가리려는 것이다.

존재감은 다양한 방면에서 드러나는데, 자신에게는 이런 방식이고, 또 다른 방면도 비슷하다. 육안으로 본 것이 소위 현실이기 때문에 이 현실 이익을 붙잡고 놓으려 하지 않는다. 이뿐만 아니라 또 강렬하게 추구한다. 구우주는 위사(爲私)하지만 신우주는 위타(爲他)하기에, 자아를 크게 보면, 위타한 경지를 닦아낼 수 없다. 사실 소위 ‘존재감’이란 바로 다른 공간에서 위사위아(爲私爲我)와 대응하는데, 사람의 것이 많을수록 다른 공간에서 변이 물질이 더 많아진다. 수련이란 바로 이런 사람의 것들을 닦아내야 하는데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법리(法理)가 드러날 수 있고 당신이 법을 얻어 미혹을 타파할 수 있다.

자아의 존재, 물욕에 대한 미련, 집착의 강렬함, 관념의 고수, 변이된 강제 수단, 왜곡된 심태,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공간에서 변이된 물질이 교란하는 것이자 또한 사람 이쪽 공간에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법(法)을 얻은 생명은 행운이 있는 것으로 늘 법에 의해 깨끗이 씻기는데 당신이 자신을 법 속에 놓았기 때문에 당신이 법으로 가늠해 법으로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위타한 생명은 사상속에 소위 ‘존재감’이 없다. 오직 대법의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정진하며 법과 함께 존재하는 것만이 한 생명이 존재하는 진실한 의미다.

작은 수련 깨달음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16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