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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난》을 학습한 작은 깨달음과 사고

심로(心璐)

【정견망】

1. 업력(業力)

《법난》을 학습하는 과정에 내가 전에 가졌던 일부 곤혹(困惑)들이 분명해졌다. 예를 들면 사존(師尊)께서는 정법(正法)을 위해 오셨고 정법 중에서 일체는 다 사부님 말씀에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사존께서 왜 중생을 도와 업력을 감당하셔야 하는가? 사존께서 얼마나 고생스럽고 또 얼마나 아프시겠는가! 그런 업력을 책임지지 않을 수는 없는가?

나는 《법난》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이는 우리 생명의 내원과 관련이 있음을 문득 깨달았다. 우리의 주원신(主元神)이 탄생할 때, 우리는 그 한 층차에 어울리는 덕(德)으로 이루어진 공(功)이 있었다. 우리가 층층 아래로 걸어오면서 세세전생(世世轉生)하는 과정에서 일부분 덕이 업력으로 전화되었다. 만약 이 부분의 업력을 계산하지 않는다면 남은 덕(德)만으로 우리가 선천에 있었던 위치까지 돌아갈 공(功)을 자라게 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때문에 사존께서 제자들의 업력을 가져가셨고 또 중생의 업력도 가져가신 것이다. 사존께서는 당신의 신체(神體)를 사용해 중생의 죄업을 없애셨다. 또한 제자 및 중생에게 복덕(福德)으로, 생으로, 또 층층 우주의 번영과 승경(勝景 빼어난 경치)으로 돌려주셨다.

우리가 지은 업력은 지금껏 누구도 계산한 적이 없다. 업을 없애야 하는데 그 업력이 자동으로 사라지진 않으니 사존께서 감당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그 부분은 우리 자신에게 없애라고 준 업(業)이 아닌가?

《법난》에서 내가 이해하기에,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안배하신 소업 방식은 중생을 구도하면서 죄업을 없애는 것이다. 왜 중생을 제도하면 죄업을 없앨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우리는 역사적으로 살생한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진상을 알리는 과정에 이런 생명을 구하도록 안배하셨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장 좋은 것으로 사존께서 원하시는 선해(善解)와 소업(消業) 방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존의 고심한 안배에 대해 떳떳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에 충분한 홍대(洪大)한 자비와 선(善)을 지녔는가?

2. 새로운 업력

나는 동영상을 거의 보지 않는 편이지만, 가끔 동수들의 SNS를 보곤 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에 관해 몇 단락 아주 놀라운 논평을 본 기억이 난다. 또 중국에서 발생한 비극을 묘사할 때 거의 조롱하는 말투도 보았다. 여기서는 더 반복하지 않겠다.

나는 이런 말 속에서 수련인의 자비를 보아낼 수 없었고 내가 본 댓글에서 속인들도 이런 말을 불편하게 여겼다. 하지만 동수들은 마치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동수들은 의도적으로 이런 부적절한 말을 쓴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말을 쓸 때 그는 분명 사부님을 망각하고 자신이 대법제자의 신분임을 망각했음에 틀림없다.

우리가 만약 매사에 늘 사부님의 각도에서 서서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면, 사부님께서는 일체 중생을 소중히 여기신다. 그러면 우리 전쟁에서 죽어간 그 젊은이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2억 년을 기다려왔는데 생생세세 2억 년의 고생을 겪으며, 대법이 널리 전해지는 이번 한 세(世)를 기다려왔다. 그들은 본래 좋은 극장에서 션윈의 구도를 받아 마땅하고, 그들은 본래 진상 거점에서 그들 일방의 천체를 대표해 장엄하게 반박해(反迫害)에 그들이 서명했어야 마땅하다.

심지어 사부님께서는 “내가 예전에 말했다. 내가 말하는데, 실제로 속인사회에서, 오늘날에 발생된 일체 일들이 모두 대법제자들의 마음에 의해서 촉성(促成)된 것이다.”(《각지설법 2》〈2002년 미국 필라델피아법회 설법〉)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우리에게 이렇게 홍대한 자비가 있었다면 아마 구세력도 이런 전쟁을 일으킬 구실을 아예 찾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가 전쟁에 대한 글을 쓸 때, 중생들은 반드시 우리가 남긴 말에서 우리 마음속의 슬픔과 연민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우리가 중국 대륙의 뉴스를 쓸 때도 진상을 모르는 중생이 우리가 중국을 먹칠한다고 여기지 않고 우리가 정말로 그곳에서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낸다고 여겼을 것이다. 우리가 쓴 문장에는 우리의 진실한 생명이 소재한 경지가 드러나는데, 우리가 쓴 매 하나의 글자는 모두 우리가 내보내는 순정한 공(功)이고 모두 사악을 제거하고 중생을 구도하며 죄업을 없애는 작용을 일으킬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기와 기 사이에는 제약 작용이 없다”(《전법륜》)고 말씀하셨다. 삼계(三界)에서 정법을 파괴하는 마(魔)는 공산사령(共産邪靈)이며 공산사령은 증오로 조성된 것이니 증오를 타파하는 것은 지금껏 늘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었다. 만약 우리가 마음속의 증오를 버리지 못하면 사실 이는 사부님과 대립면에 선 것으로 공산사령에게 에너지를 주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이 세상의 평론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념(一念)을 형성하고, 우리의 말과 행동이 나오면 우리는 동시에 우주의 법리와 뭇신들에게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자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일부 프로그램과 문장은 중생을 구도하고 억울함과 원한을 선해(善解)하는 작용을 일으키지 못했고 심지어 중생을 더 멀리 밀어버렸다. 이렇게 수련 중에서 지은 새로운 잘못과 저지른 놀랄만한 새 업력은 또 사부님께서 우리를 도와 짊어지셔야 한다. 하지만 대법 자원(資源)을 무시하고 소중히 여기지 않음은 또한 마귀가 중생을 훼멸하고 마난을 만드는 구실이 된다.

3. 동심(同心)

정진하지 못한 하루 하루, 넘기지 못한 매 하나의 관, 효과 없는 진상 알림, 틀린 길을 걸어가는 것은 모두 업력을 쌓는 것이다.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하는데 이는 하늘의 이치다. 제자가 갚지 못하면 채권자는 사부님께 요구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제자와 중생을 보호하기 위해 업력을 감당하신다. 사부님께서는 전에 뇌혈전을 앓는 한 제자를 구하기 위해 한 사발의 독약을 드신 적이 있다. 그 채권자가 원하는 것은 사부님의 고통인데, 사부님께서 감당하신 고통이 그것의 마음이 평형을 이루게 했다.

우주에는 항하의 모래알 수보다 더 많은 중생이 있고, 말겁(末劫)시기의 중생은 부동한 층차 부동한 유형의 빚을 지고 있다. 그렇다면 만약 채권자가 주로 원하는 것이 사부님 육신의 건강, 명예, 지혜, 젊은 외모라면?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중생을 구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었다.”(《왜 중생을 구도해야 하는가》)

내 생각에 우리는 “모든 것”이 무엇인지 전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제자에게 자비를 베푸셨지만 정법 중의 그런 험악에 대해서는 지금껏 제자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전에 나는 밀라레빠 부처님의 수련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밀라레빠 부처님의 확고한 구도(求道)에 감동을 받곤 했는데, 지금 밀라레빠 부처님의 수련 이야기를 보면 마르빠 사부님의 간난(艱難) 때문에 눈물이 난다.

사람을 제도하는 사부는 높은 곳에 있으니 주변에 그의 경지에 도달할 자가 없다. 주위를 둘러봐도 모두 그가 구도해 주길 기다리는 중생들이지만 이들 중생은 오히려 진정으로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사부는 한 제자를 거둠과 동시에 이 제자의 업력을 감당해야 한다. 업력, 그것은 신(神)조차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가! 밀라레빠는 또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그가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은원(恩怨)들을 모두 사부가 공정하게 처리해 주어야 한다.

밀라레빠가 비록 수많은 고생을 겪긴 했지만 이 고생은 단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고생은 그의 사부가 감당한 것이다. 사실 밀라레빠조차 사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사모님이 자신에게 친절을 베푸신건 알았지만, 사부님이 자기에게 베푼 친절은 알 수 없었다. 그는 고생을 견뎌내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지만, 오히려 자신이 이런 고생을 겪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몰랐다.

사부는 제자가 업을 갚을 수 있도록 그런 관(關)을 설치하는데, 너무 무거우면 제자가 지나가지 못할까 염려되고, 반대로 너무 가벼우면 또 생생세세 남겨진 문제들과 미래에 다져야 할 영구한 복분(福分)을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이는 정말 어렵지 않은가!

밀라레빠는 이렇게 ‘숙세의 선(善)을 지닌 좋은 제자’지만, 마르빠 상사(上師)는 그를 정화시키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렇다면 우리 사부님께서는 말겁시기 전체 구우주를 직면하셨으니 그것이 얼마나 거대한 업력일지 우리는 생각해 보았는가?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힘든 것이 아닌가?

우리가 세상에 내려오던 초기 우리는 반드시 사부님을 위해 분담(分擔)하기 위래 온 것이지 대법에서 무슨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만약 지금에 이르러서도, 우리가 제자로서 성숙해져서 진정으로 사부님을 위해 분담하지 못하고 또한 여전히 우리 때문에 사부님께 걱정을 끼쳐드린다면 사부님께선 얼마나 고생스러우시겠는가? 얼마나 어려우시겠는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실 나는 우리가 사람을 구하고 있는 동시에, 아직도 15%의 업력을 없애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 이것은 중생구도 20여 년간 남겨진 것으로, 이는 매우 거대한데, 나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직면해야 할 거대한 압력과 감당해야 할 것들이 하나하나 다가올 것이다.”(《법난(法難)》)

만약 사부님께서 또 역사상 사람을 구한 각자(覺者)들처럼 그런 마난을 겪어야 하신다면 이는 우리 모든 대법제자들의 치욕이자 우리 수련의 실패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 대법 중의 매 한 일원(一員)은 모두 반박해 중에 있다.” (《법난(法難)》)

일찍이 우리는 한마음으로 창궁(蒼穹) 깊은 곳에서부터 걸어왔는데, 지금 또 우리는 다년간 쌓은 공력을 사용해 함께 법난에서 걸어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하는가? 내 생각에 부동한 수련상태에 처해 있고, 부동한 항목을 감당하는 동수들에겐 부동한 이해가 있을 것이다. 상관없다. 오직 우리의 마음이 한곳에 있기만 하면 우리는 힘을 합할 수 있다.

4. 마난에서 걸어나가자

아주 오래 전 ‘해리포터’ 시리즈를 볼 때 나는 이 작품의 결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볼드모트의 영혼 조각이 해리 신체의 일부였다. 해리포터는 반드시 볼드모트와 함께 사라져야만 진정으로 볼드모트를 죽일 수 있었다. 이는 마치 해결할 수 없는 문제처럼 보이지만 결국 볼드모트의 영혼 조각은 완전히 분리되었고 해리는 무사했다. 그는 완벽하게 그 자신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왜 ‘사랑’이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가?

법난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사실 덤블도어 교장은 줄곧 그 마성(魔性)을 벗겨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말해줄 수 없었다. 설사 말했다고 해도 어린 해리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해리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덤블도어 교장은 그에게 유무형의 모든 도움을 줄 수 있었지만 그 한 가닥 생명의 길은 반드시 해리 스스로 걸어야 했다. 다행히 해리는 아주 노력했고 그의 성장은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었다. 볼드모트가 추구한 것은 영생이었지만, 해리포터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젊은 생명을 포기할 수 있었다.

이 일념(一念)은 또한 생명과 생명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천험(天塹 넘기 힘든 천연의 요새)이다. 깨끗하고 밝은 심경(心境)에는 더는 마성(魔性)을 용납할 여지가 없다.

사부님께서는 장차 신우주로 중생을 구하려 하시니 그 어려움은 생명을 다시 만드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나’는 여전히 ‘나’지만 ‘나’는 더 이상 ‘나’가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대부분의 업력을 감당하셨기에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아주 많고 많은 것을 해주실 수 있지만 어떻게 위사위아(爲私爲我)한 구우주의 마성(魔性)을 우리 체내에서 벗겨내고 순정(純淨)하고 위타(爲他)한 신우주의 생명이 될 것인가? 하늘로 돌아가는 이 마음의 길은 반드시 우리 스스로 걸어야만 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실 慈悲(츠뻬이)는 거대한 에너지이며, 바른 신(正神)의 에너지이다. 慈悲(츠뻬이)할수록 이 에너지는 더욱 커서 어떤 좋지 못한 것도 모두 해체할 수 있다.”(《각지 설법 9》〈2009년 워싱턴DC 국제법회설법〉)

마성이 마귀를 끌어내니 마귀가 마난을 만든 것이다.

불성(佛性)으로 마성(魔性)을 없애고 자비(慈悲)로 마난을 선해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리가 慈悲心(츠뻬이씬)이 나올 때, 아마 중생이 모두 고생스러워 보이고, 누구를 보아도 모두 고생스러워 보이는, 이 문제가 나타날 것이다.”(《전법륜》)

우리 모두 이 구절의 법으로 한번 자신을 점검해 보자. 마귀가 호시탐탐 노릴 때 만약 우리가 여전히 이렇게 마난을 선해(善解)할 수 있는 자비를 닦아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수련은 아직 훨씬 뒤처졌음을 설명한다.

5. 다시 제자가 되는 법을 배우자

수련이 뒤처진 이유는 아마 우리가 아주 중요한 것을 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떻게 제자가 될 것인지를 망각했다.

그렇다. 오래고 먼 세월 속에서 생명은 망각할 수 있는데 온 길을 잊었고 돌아갈 길을 잊었으며 어떻게 제자가 되는지를 잊었다.

《봉신연의》를 보면서 내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긴 대목이 있다.

「진인(真人)이 급히 외쳤다.

“나타야, 빨리 가거라! 사해용왕이 옥제께 아뢰고 네 부모를 데려갔다.”

나타가 이 말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진인에게 간청했다.

“사부님! 제 부모님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자식이 재앙을 일으켜 부모님이 연루되게 했으니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습니까?” 말을 마친 후 대성통곡을 했다.

진인이 나타의 이런 모습을 보고는 귀에 대고 말했다.

“여차여차하면 네 부모님의 재앙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나타가 절을 올려 감사하며 토둔법을 써서 전당관으로 갔다.」(《봉신연의》)

나는 “절을 올려 감사하며”를 보고 내심으로 정말 충격을 받았다. 뒤의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태을진인(太乙真人)이 나타의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배와 창자를 가르고 뼈와 살을 발라 부모님께 돌려드리고 더는 부모님을 연루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태을진인은 나타에게 육신을 버리라고 알려준 것이다. 그러자 나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고 첫반응이 바로 “절을 올려 감사”했다. 사부님에 대한 그의 믿음과 사부님께 대한 감사는 마치 그 생명의 본능과 같았다. 나중에 사부가 그의 법보(法寶)를 줄 때도 그는 사부님을 믿었고 사부님이 육신을 버리라고 할 때도 그는 여전히 사부님을 믿었으며 그의 육신이 사망한 후 첫일념은 바로 사부님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생(生)과 사(死)도 사부님께 대한 그의 믿음을 단절시키진 못했다.

나타는 이렇게 제자가 되었다. 이는 또한 우리가 세상에 내려오던 초기에 마치 호흡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기나긴 세월 속에서 점차 생명의 가장 소중한 본능을 망각해 버렸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수련할 수 있겠는가? 수련이란 사부가 제자를 이끌고 첩첩의 천문(天門)을 돌파하는 것이 아닌가! 첩첩 천문에 첩첩 생사관(生死關)이라 자그마한 의심조차도 모두 사부님의 손을 놓고 만장(萬丈)의 심연(深淵)으로 추락할 수 있다.

만약 나타처럼 시시각각 마음속에 사부님께 대한 감사가 존재한다면 그럼 수련은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

한 가지 도구는 무형(無形)의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가 고기를 먹으면 배가 아프고 먹지 않으면 아프지 않은, 이런 상태가 나타날 것인데, 뜻인즉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전법륜》)

이때 통증은 사부님의 가르침과 일깨움으로 배가 아플 때 나타처럼 한다면 사부님께 절을 올리고 감사드릴 것이다.

한 가지 도구는 유형(有形)적인데 가령 사부님께서 설법에서 언급하신 사과, 집 등과 같다. 모두 사존께서 우리더러 집착심을 포기하라고 가르치기 위해 사용하신 도구인데 집착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를 부동한 층차 구우주에 가두는 만유인력이다. 내려놓음은 우리의 생명을 가뿐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존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내려놓음을 쉽게 한다.

때로는 한가지 작은 연극으로 집착심을 표현할 필요가 있는데 가령 동수와 동수 사이의 모순이 그렇다. 모순 중에 표현되어 나오는 매 하나의 장면은 모두 아주 소중한 것이다. 우리더러 이속에서 생각해보고 자신의 부족을 보게 한다. 이는 또한 내가 이해하는 중생이 “서로 구조하는” 한 가지 형식이다. 이때 우리는 사부님께 감사드려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번거로움’을 가져다준 동수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이 환경 자체가, 인류사회가 바로 대법제자를 위해 제공한 수련장이 아닌가?”(《각지 설법 12》〈세계 파룬따파의 날 설법〉)

그렇다면 법을 공부하는 과정뿐 아니라 우리 생명의 매 1분 매 1초 모두 사존의 가르침을 공경히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또 이 공간장(空間場) 상의 일체는 모두 사존께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사용하신 도구가 아닌가?

만약 우리가 우리의 수련을 이렇게 인식할 수 있고, 만약 중생에 대해, 동수에 대해, 만물(萬物)에 대해 늘 이런 선념(善念)을 지닐 수 있다면 그럼 내려놓지 못할 집착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선해하지 못할 마난이 있을 수 있는가? 해결하지 못할 모순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날마다 세 가지 일을 하는 과정은 마치 밀라레빠가 집을 짓고 허무는 것과 같고 마난(魔難) 속에서 고통 속에서 잠시 배후의 위대한 의미를 보지 못할 뿐이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면 비로소 “가벼운 배는 첩첩산중을 이미 지났음”을 알게 된다. 마침내 명백히 알게 되는데 그 집은 자신에게 지어준 것이고 그 업력은 자신에게 없애준 것이다.

제자로서 사부님 은혜에 대해 오직 감사뿐이다! 제자가 사존께 절을 올려 감사드립니다!

주: 이 글은 현재 수련 상태에서의 작은 깨달음과 생각일 뿐이며 동수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2113